p007

...인생이 주는 쓰라림과 환멸은 엄청난 집중력으로 생활에 따라붙는다고 믿었다.

p046

 나에게서 받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크고 깊은 사랑이라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느낀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필요한 존재란느 확신이 있어야 '잘 쓰이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확신은 자신을 믿고. 재능이 꽃필 시간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일부터 시작된다.

 이제는 면접장에 들어설 기회가 드문 나이에 이르렀다. 하지만 꽃 피는 나무와 마주서거나, 몸을 부풀렸다 사라지는 구름을 보거나, 누군가를 만나 한 끼의 식사를 나누거나, 버스나 지하철에서 서로 발을 좁혀 설 때 나는 좀 더 확장된 면접장에 들어선 것임을 안다. 일상의 면접관들이 무엇보다 보고 싶은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이의 환한 얼굴이 아닐까. 나에게 불친절한 순간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면접관이 되어 묻는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었는가?"

p059

 '지불책우知不責愚'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이 네 글자에는 들끓는 감정을 한 단게 아래로 끌어내려 급냉장시키는 탁월한 기운이 담겨 있다. 한동안은 이 기운에 의지해 내 안의 불길을 잠재워 갔다. 그 뒤 세월이 흘렀고, 내게도 겨자씨만한 지혜의 싹이 돋아났다. 이제는 안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니 굳이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괴로운 사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임을.

p061

 당신이 평화롭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그래, 그 밖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것이 궁극의 기도일진대. 

 그 밖의 것들은 밤사이에 옮겨 가는 모래언덕처럼 덧없고 덧없다.

p081

"이번 생은 망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사계절 순환처럼 내 일상도 반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숨을 쉬고 있다. 계절의 반복처럼 나는 수없이 실패하고 절망하고 비통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말, '그래도 다시' 가 아니라 '이번 생은 망했다'고 낮게 읊조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걸을 것이다."

p086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이 되더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대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단.'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 걸 알기에.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뒷말까지 온전하게 전해듣고 그 말에 담긴 서슬 푸른 삶의 비의에 혼자 몸을 떨었다.

p115

 "사람이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란다. 갖고 싶은 게 아무리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사랑도 이와 같다. 애당초 손바닥은 깨물기 좋게 생기지 않았다. 내 손바닥도 개물지 못하거늘 상대의 손바닥이야 말해 뭣하랴. 전쟁 같은 사랑이 지난 뒤에야 손바닥과 손바닥은 서로 마주 잡기 좋게 생겼다는 걸 깨닫는다.

p127

 우리가 걸어온 시간보다 길게 남아 있는 여로를 생각한다. 젊음의 한때 만나 이어진 인연이지만, 존재의 깊숙한 안쪽까지 변화시키며 가는 길. 상대를 잃을까 염려하지 않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서로의 인생을 지켜보며 가는 길. 그 길에 함게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참으로 고맙다.

p166

...중독과 몰입의 차이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있지 않을까. 어떤 일에 지독하게 빠져 있는 자신이 밉고 죄책감이 든다면 중독이다. 그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사랑하게 되며 내면의 자부심이 커진다면 몰입이다. 왜냐하면 중독은 결국 자신의 실체를 잊기 위한 몸부림이며, 올바로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에게서 거부당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중독이 치명적인 것은 물리적인 파괴의 속성 때문이다. 몸 어디 한군데가 손상된 뒤에야 간신히 벗어날 수 있는 것, 그게 중독이다. 옛날에 게임에 푹 빠겨 지낸 적이 있었다. 처음엔 일을 시작하기 전, 기분 전환 삼아 가볍게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멈춰지질 않는다. 그만하자, 그만하자. 수없이 다짐하면서도 게임 창을 닫지 못했다. 결국엔 손목에 탈이 나서야 겨우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알코올, 니코틴, 도박 중독.....모든 중독은 황폐한 상처를 확인해야 끝장을 보게 된다. 그래서 중독을 일컬어 느리게 진행되는 자살 시도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정말 불가사의하고 약 오르는 진실 하나는 좋은 습관은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p176

 "사랑이 무슨 죄니. 사랑이 약한 게 아니라 사람 마음이 약한 거지. 사랑은 있어."

 그러니까 애당초 잘못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는 수많은 환상과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이다. 사랑은 있는데, 사람이 변한다는 거다. 그 동안 애꿎은 '사랑'만 쥐 잡듯 잡아 왔다는 얘기다. 선배의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비록 그 선배가 이 근방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으로 인증받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장 바보로 소문난 사람도 아니니 믿어 볼 수밖에. 아아, 사랑이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