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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의 소녀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
티에리 르냉 지음, 조현실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느 이야기나 다 그렇듯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안 끝날지도 모른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문장은 짧고 간결합니다. 시적인 묘사도 눈에 띄는데 왠지 먹먹한 아픔이 전해져 옵니다. 어린이 책이라고 가볍게 본 게 잘못이었습니다. 80쪽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소설이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은 정말이지 몰랐습니다.
내용이 한 어린 소녀가 당한 성폭행을 다루고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제 모습이기도 하니까요. 얼어붙은 운하는 얼어붙은 마음입니다.
늘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했지만 실상은 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의 질문이 귀찮아지고 함께 놀아주는 게 피곤했습니다. 쫑알쫑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는 아이들의 눈을 보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TV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 커녕 조리없는 말솜씨를 비난하기 일쑤였습니다.
사라는 미술 선생님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 놓을 수 없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모릅니다. 어릴 때 부모가 친부모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충격으로 마음의 문을 닫아 건 엄마는 사라의 고통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아빠도 마찬가지, 사랑하는 마음은 있으나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라의 담임선생님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지만 차마 아이에게 물어보지 못합니다. 담임선생님도 20년 전 사라와 같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애써왔던 그녀는 사라를 통해 과거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는 걸 두려워합니다. 20년 전 그 때 운하가 얼어붙었던 것처럼 지금 운하도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 얼어붙어 작은 배조차 다니지 못합니다.
최근 제 마음도 얼어붙은 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