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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평점 :
제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가진 책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였습니다. 그 때가 초등학교 2학년초였습니다. 학교 들어가기까지 글을 모르고 있다가 한글을 배우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였습니다. 글자가 써진 것이면 간판이든 벽보든 무엇이든 큰 소리로 읽고 다니는 저를 위해 당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공장에 취직을 했던 삼촌이 첫월급으로 사 주신 책입니다.
삼촌이 사주신 책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로빈슨 크루소" 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이 읽기엔 글씨도 작고 분량도 많아 제법 두툼한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책과의 첫만남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읽고 또 읽어서 책을 통째로 외워 버렸습니다. 그 첫만남은 실로 중국에 따라 갔던 실학자들이 서양문물을 접하고 받은 충격과 같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필이면 그 책이 서양 근대정신의 위대함을 웅변하는 "로빈슨 크루소"와 서양정신의 뿌리 "그리스.로마 신화" 였으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재미 있습니다.
누구라도 첫사랑은 잊지 못하듯 "로빈슨 크루소"는 제게 알게 모르게 "서양 근대정신의 위대함"이랄까 어쨌든 그런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습니다, 미셸 투르니에의 책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기 전까진 말입니다. 이 책은 서양인 "로빈슨"이 주인공이 아닌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주인공인 책입니다. 줄거리는 "로빈슨 크루소"에서 따 왔지만 책의 주제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잠시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 1719년에 나온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에는 극도로 충격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소설에는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어 있어요. 그는 단순히 빈 그릇일 뿐이지요. 진리는 오로지 로빈슨의 입을 통해서만 나옵니다. 그가 백인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도는 방드르디가 중요한 역할을, 아니 심지어 끝에 가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소설을 써보자는 데 있었어요. ...중략...나는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로빈슨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소설,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느낌 때문에 그의 건설 사업이, 이를테면 내부로부터 잠식되어 붕괴해 버리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는 방드르디가 불쑥 나타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소설을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지 상태 위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종교, 새로운 예술, 새로운 유희, 새로운 에로티즘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로빈슨은 서양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외딴 섬에 홀로 남은 로빈슨은 탈출을 꾀하다가 좌절하고 짐승보다 못한 무기력한 타락에 빠져들었다가 섬에 관사를 짓고 성채를 만들어 스스로 총독으로 취임합니다. 로빈슨은 법령을 제정하고 섬의 곳곳을 개발하며 식량을 비축하고 성서를 읽으며 항해일지를 써 나갑니다.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인디언들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된 열다섯살 가량의 흑인 혼혈아를 구해 주게 되고 그를 노예로 삼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로빈슨을 근본부터 변화시킬 사건의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이름붙인 방드르디는 서양의 타자(他者)로서의 야만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 다른 가치관을 가진 또 다른 인식 주체, 행동 주체인 또 하나의 위대한 인간이었던 겁니다.
이 책은 미려한 문체 속에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노래하는 위대한 철학서입니다. 항상 서양중심의 세계관에서 타자로만 존재해 왔던 근대 이후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서 인류 미래를 사색케 해 준 좋은 첵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전 지금 로빈슨이 찬란한 태양 속에 웃고 있을 그 섬 "스페란차"에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