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든 영화든 그 표지나 포스터를 척 보는 순간 나하고 인연이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 작품이 있습니다. "호밀밭의 파수꾼"도 그런 책 중 하나였습니다. 이 책을 처음 서점에서 보았을 땐 반세기 내내 꾸준히 팔리는 책이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보나마나 지루한 책이겠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목이 목가적이기도 하고 꾸준히 팔린다고 하니 어디 또 뻔한 감동스토리겠군 하고 지레 생각한 것이죠. 그런 책은 그냥 읽기가 싫어집니다. 하지만 그때도 왠지 그 책을 피해갈 수 없을 것 같은 숙명 같은 걸 느꼈습니다.

그 뒤로 이 책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멜 깁슨이 주연한 "컨스피러시 (Conspiracy Theory,1997)"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였죠. 멜 깁슨은 반쯤 미친 사람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의심하고 세상은 거대한 음모 속에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나옵니다만 그의 집에 이 책 "호밀밭의 파수꾼"이 수십권 꽂혀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멜 깁슨이 줄리아 로버츠에게 존 레논의 살해범 등 유명인을 살해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가지고 있었던 거라고 얘기하죠.

어라 ! "호밀밭의 파수꾼"이 목가적인 감동스토리가 아닌가보네 ! 그 뒤로 언젠가는 이 책을 읽어보리라 결심했지만 막상 쉽게 손이 안 갔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제서야 읽게 됐습니다. 이 책은 다니는 학교마다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당하는 17세 소년 홀든 콜필드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또 퇴학당한 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틀간의 이야기를 콜필드 자신의 목소리로 주절이 주절이 늘어놓는 소설입니다.

제가 처음 보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완전히 딴판인 소설이었던거죠. 이 책을 읽고나니 비로소 멜 깁슨이 영화 속에서 했던 말이 이해됩니다. 정말 약간 정신이 돈 문제아가 내뱉는 넋두리 그대로거든요. 그런데 이 어설프고 못난 청춘이 내뱉는 온갖 같잖은 불만과 넋두리가 사람을 빠져들게 만듭니다. 정말 묘한 마력이 있는 책입니다. 책을 읽는 동안 저도 모르게 제가 콜필드처럼 세상에 불만투성이가 되고 있었습니다.

괜히 모든 일이 억울하고 울분이 치밀었습니다. 세상은 착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이란 생각도 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콜필드처럼 우울해하고 비꼬고 욕하고 구역질하기도 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은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 책을 콜필드 나이인 열일곱에 읽었다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까요 ? 그렇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범생이인 제가 콜필드의 영향을 받진 않았을 겁니다.

나이가 든 지금은 어떤가요 ? 지금은 이 책 하나로 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철이 덜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반세기도 훨씬 전 17세 소년에 공감하고 있는 서른일곱의 아저씨라니 ! 다 늦은 나이지만 저도 콜필드처럼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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