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소설만을 객관적으로 읽기가 어렵습니다. 작가가 1970년 11월25일, 당시 45세의 나이로 일본육상자위대의 주둔지로 난입해 자위대의 궐기를 외친 후 할복자살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주옥 같은 작품들과 할복자살이라는 극우적 행위자로서의 작가가 쉽게 연결되지 않아섭니다.

어쩌면 소설 속에 작가가 투영되리라는 기대는 독자의 오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쓴 작품과 전혀 다르게 살다 간 작가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아니면 세상의 독자들이 작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

"금각사"는 탐미문학의 최고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금각의 아름다움을 질투하여 방화를 저지른 말더듬이 청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졌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미(美)"에 대한 여러 철학적인 사유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저는 이 소설을 "사념 과 행위"에 대한 사유로 읽었습니다.

소설을 쓸 당시, 미시마 유키오는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육체적 열등감을 육체미 운동과 검도로 극복해 나가고 있던 과정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아마도 미시마 유키오가 육체적인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할복자살하지는 않았으리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에 예술가에서 행동가로 변해가는 작가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금각의 절대적 아름다움에 파고드는 열등감의 화신 말더듬이는 예술가로서의 작가를 상징합니다. 예술은 세상에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예술은 예술로서만 행위할 뿐 육체로 행위해서는 예술이 아닙니다.(행위예술도 자연인이라는 존재가 아닌 예술의 도구로서의 육체로 예술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세상에 행위하는 순간 예술은 사라지고 정치만 남습니다. 하지만 사실 예술이 정치를 완전히 떠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애초 있을 수 없습니다. 미추(美醜)의 구별엔 이미 선악(善惡)의 판단이 내재돼 있고 선악의 구별이란 결국 주관적이고 정치적일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미시마 유키오는 "금각사"를 쓸 당시 그런 것을 고민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는 금각을 태우고서야 "살아야지"하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모든 주제가 녹아 있다고 봅니다. 비로소 미에만 탐닉하는 예술가가 아닌 행위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찾는 순간입니다. 이 때가 바로 미시마 유키오가 활복자살하게 되는 자아형성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아마도 절대로 절대적일 수 없는 금각을 태움으로써 오히려 절대적 미를 성취하게 되는 순간, 즉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아름답게 만든 육체를 할복이란 방법으로 버림으로써 행위자로서의 완결을 이루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풀잎의 뾰족한 끝 부분에 관하여 오랫동안 생각한 적도 있다.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그 기묘하고 사소한 생각은 결코 지속되는 일이 없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를 나의 감각 위에,음악의 후렴처럼 집요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어째서 이 풀잎의 끝이 이처럼 날카로운 예각을 이루어야만 하는가 ? 만약 둔각이라면, 풀의 종별(種別)은 사라지고, 자연은 그 일각(一角)으로부터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 자연의 톱니바퀴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떼어 내면, 자연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나는 부질없이 이것저것 생각하곤 하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읽으면 미(美)란 너무나 쉽게 변질되고 부서지기 쉬운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마약처럼 사람을 끌어 당기는 "아름다움"에의 갈망 또한 강렬하게 느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