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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ㅣ SERI 연구에세이 3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3년 2월
평점 :
데뷰작 "비명을 찾아서"에서부터 "민족어의 쇠멸"이란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온 복거일은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최초로 "영어공용론"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이 소책자는 그의 영어공용론을 조리있게 정리한 소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1.언어는 정보전달의 망(network) 노릇을 한다.
2.현대의 망 경제(network economy) 상황은 강력한 국제어를 요구한다.
3.현재 그런 국제어로 부상한 언어는 영어이다.
4.영어는 과거 역사에서 나타났다 사라져간 국제어들과는 다르게 다른 어떤 언어들도 도저히 도전할 수 없을 만큼 확고한 국제어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고 그런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심해질 것이다.(교통.통신.미국의 힘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터넷)
5.영어의 득세로 인해 궁극적으로 민족어들이 쇠멸할 것이다. (약 300년내)
6.이런 추세로 나가면 한국어도 "박물관 언어(museum language)"로 남을 것이다.
7.영어를 잘 못해서 발생하는 손실은 막대하다. 세계정보의 대부분이 영어로 통용되고 있지만 한국이 영어를 못 해서 아예 들어오지 않는 정보가 막대하며 이는 한국의 국제경쟁력이 현저하게 약해짐을 뜻한다.
8.번역과 통역 등은 이러한 현상의 대책이 될 수 없다. 언어는 11세 이전에 배운 제1언어가 평생을 지배한다. 그 이후 배워서 쓰는 언어는 한계가 있다.
9.결국 가장 확실하고 진정한 대책은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것이다.
10.당장 영어를 모국어로 삼는 것은 어려우므로 현실적으론 영어공용이 대안이다.
11.영어공용을 하더라도 우리 민족전통과 민족문화를 지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여러번 언어를 바꾸면서도 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유지해 온 유태인들과 한글창제 이전까지 우리문화의 대부분이 한문으로 기록된 예를 듬.
12.언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민족의 혼이 담긴 것이 아니고 도구에 불과하다.
13.이미 민간주도로 영어의 공용화가 진행되고 있고 정부가 주도하지 않기 때문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고 있다. 이러한 피해는 상류층.지도층이 아닌 서민층에 더욱 크게 돌아간다.
14.따라서 지금부터라도 시급히 정부 주도의 영어공용이 시행되어야 한다.
15.궁극적으론 후손들에게 풍요로운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영어를 우리의 모국어로 삼아야 한다.
이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약해 놓고 보니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정의 솓구침을 막기 힘듭니다만 복거일의 논리적이고 냉정하면서도 깊이있는 분석은 무시할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영어는 영어권 국가(영국,미국,캐나다,호주, 아일랜드 등)들만의 말은 아니라는 점도 수긍할 수 있습니다. 비 영어권의 영어가 오히려 영어권 국가로 침투하는 현상까지 있다고 하고 그런 현상은 앞으로도 심화될 거라고 합니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감정적 거부감으로 영어를 편협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도구일 뿐 언어 자체가 민족과 동일어가 아니라는 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에 대한 필요성과 대중의 욕구는 이미 막을 수도, 막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영어를 받아들여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세계로 퍼뜨리고(영어로) 세계와의 경쟁에서 이긴 잘 사는 미래를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주장에 이르면 그의 주장이 황당한 것이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아직은 감정적으로 그의 주장에 쉽게 동조할 수가 없습니다. 민족의 존재와 전통이 언어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말은 여전히 전적으로 동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논의가 충분히 근거있고 공론화할 가치가 있다는 데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오랫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깊이 "민족어의 쇠퇴"문제를 연구해 온 작가의 문제의식과 감히 누구도 나서서 말하지 않는 논의를 시작한 작가의 용기에 머리를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