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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돼지 - Porco Rosso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내는 저를 가끔 R.P 라고 부릅니다. Red Pig의 약자입니다. 집에 있을 때 소매가 늘어진 빨간 티셔츠를 입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밖에서는 입고 다니기 창피한데 그냥 편해서 집에서 잘 입는 옷이 있습니다. 그걸 입고 낮잠 자다 얻은 별명입니다. 빨간돼지가 자고 있는 줄 알았다나요.
그래서 이 애니메이션 제목을 보는 순간 '아, 이거 나를 위한 영화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때는 내용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보고나니 정말 나를 위한 영화 맞더군요. 혹시라도 "똘이장군"에 나왔던 그 돼지를 연상하신 분들은 오해를 푸시기 바랍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과 같은 "산소결핍의 중년남성"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는 지극히 단순하고 유쾌한 작품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과 달리 "환경" 이나 "인간"에 대한 무거운 주제의식 없이 오로지 상쾌한 자연과 낭만적인 남성판타지를 위해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제작에 들어 가기 전 미야자키 하야오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적어놓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일상과 업무에 지칠 대로 지친 비즈니스맨들... 산소 결핍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 그것이 바로 <붉은 돼지>가 되어야 한다. 소년과 소녀는 물론, 주부까지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이제는 지쳐 뇌세포가 두부가 되어버린 중년 남성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인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즐겁고 유쾌하지만 야단법석은 아니며 다이내믹하지만 파괴적이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가득하지만 육체의 욕망은 쓸데없다. 긍지와 자유로 가득 차 있지만 스토리는 단순하게, 등장 인물들의 동기는 명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남성들은 모두 즐겁고 명랑하고 유쾌하다. 여성들은 매력이 넘치고, 인생을 즐겨야 한다. 그리고 지극히 밝고 명랑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으로 그려져야 한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한다."
이 영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자연이 나오고 시원한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 비행기가 나오고 착한 악당들과 사랑스런 여성들이 나옵니다. 물론 히사이시 조의 아름다운 음악도 빼놓을 수 없죠.
내용은 단순합니다만 흰구름이 둥실 뜬 하늘을 배경으로 통쾌하다 할 만큼 시원하게 날아 다니는 비행기들을 보노라면 스트레스가 확 풀립니다. 주인공 "붉은돼지"가 하도 멋있게 나와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난 다음부턴 아내가 더 이상 저를 R.P라고 놀리지 않습니다.
돼지의 모습을 한 주인공 포르코는 모습은 비록 배가 나오고 귀가 처진 돼지일망정 매력 넘치는 남자로 나옵니다. 중년남성의 매력은 육체적인 것에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만약 자신이 아내나 자식들에게 볼품없는 몸매와 무기력한 모습으로 놀림감이 되고 있는 중년남성이라고 느끼시는 분이 있다면 이 애니메이션을 보시고 산소결핍의 삶에 산소를 한껏 충전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