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개의 거짓말
라픽 샤미 지음, 유혜자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내 이름은 사딕이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말도 거짓말이었으니까 말이다. 태어난 지 육개월도 안 되어서였다. 일터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난 무척 화가 났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아버지는 몸을 굽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난 질끈 눈을 감고 내게 다가올 미래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것도 눈지채지 못한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는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난 몹시 화가 났다. 아버지는 내가 당신을 어머니로 착각하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그걸 이미 알고 있었던 나는 팔을 쭉 벋으며 아버지를 불렀다. '엄마!' 그게 내가 한 첫번째 거짓말이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이 녀석은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겠어 !']

오리엔트의 한 소국 '모르가나'에 인도에서 서커스단이 찾아 옵니다. 소년 사딕은 서커스의 줄 타는 여자 말라에게 첫 눈에 반합니다. 사딕은 말라를 사랑하게 되면서 서커스를 사랑하게 되고 그도 서커스의 일원이 되어 관객들에게 하루에 한 가지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바야흐로 천일야화가 아닌 1001개의 거짓말이 시작되는 것이죠. 사딕은 가족과 친지들을 한 사람씩 회상하며 동물에 빗대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이 책의 저자 '라픽 샤미'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나서 1971년 이후독일에 정착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이야기가 사라진 현대에 진정한 이야기를 들려주는,'화석' 과도 같은 작가라는 평을 얻고 있다고 합니다. 모르가나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일까요 ? 어차피 그의 이야기는 모두가 거짓말입니다. 세상엔 모르가나도 사딕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는 사딕와 말라가 사랑을 하고 인도 서커스 단원들은 재주를 부리고 있을 겁니다.

사딕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유머러스하지만 그 속엔 아련한 추억과 향수가 녹아 있습니다. 촌철살인의 비유와 위트 속에 이웃과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과 슬픔을 숨기고 있습니다. 사딕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만 진실보다 강한 울림을 전해줍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자꾸 어린시절이 떠 올랐습니다. 새벽이면 단층 슬레이트 지붕들 사이로 피어 오르던 밥짓는 연기며 어딜가나 널려 있던 공터도 보이고, 골목을 돌아가면 정겹게 들려오던 번데기 장수나 뽑기장수의 목소리도 들려 왔습니다. 조금만 나가면 개울가에서 미꾸라지를 잡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밤에는 뒷산 공동묘지에 숨박꼭질하며 오싹하는 느낌에 오줌을 찔끔 싸던 생각도 났습니다. 온 동네가 서로 부엌의 숟가락 숫자까지 알던 인정 많던 시절이었습니다. 도로가 생기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자동차 없인 한 발자국도 나설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해진 것일까요 ?

['저는 그 동안 계속 거짓말을 해왔고, 이야기도 다 꾸며냈습니다. 저 자신이 거짓말 자체죠. 저는 사실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이 건물도 여기에 없는 거구요. '
'그게 무슨 소리야 ? 이 건물이 거짓이라니 ?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데 !'
'아직은 그렇죠. 하지만 백 년 후에는 어떻게 될까요 ? 백 년 후면 사라져버릴 것을 지금 진실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 좀 긴 공상일 뿐이지요. 모두 거짓이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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