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 The Dark Knigh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미국은 자경(自警)의 전통이 강한 나라입니다. 미국의 선조들은 국가나 제도의 억압을 피해 신대륙으로 건너간 사람들입니다.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밖에 없었겠지요. 서부영화에서 보면 법에 호소하기보다 스스로 총을 뽑는 경우가 더 많고 자연스럽습니다. 일단 위급한 상황은 스스로 해결하고 나중에 법적으로 따져보자는 주의죠.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 아직 총기소유가 허용되는 이유입니다.
 배트맨은 이른 바 자경단(vigilante)입니다. 악인을 응징하긴 하지만 법 밖에 있는 사람이죠. 사실 배트맨 뿐만 아니라 온갖 슈퍼히어로가 다 자경단입니다. 미국에 유달리 슈퍼히어로가 많은 이유도 오랜 자경의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많은 슈퍼히어로 중 배트맨이 가장 인기를 끈다는 점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배트맨에 가지는 애정은 유별납니다. 오죽하면 "슈퍼특공대(Justice League of America)"의 대장도 배트맨입니다. 거의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슈퍼맨이 밀릴 정도죠.
 아마 배트맨이 가장 미국적인 영웅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선 배트맨은 초능력자가 아니죠. 오로지 돈이 많아서 각종 장비와 최첨단 탈것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을 빼면 그저 보통 사람입니다. 또 하나 배트맨은 정통 미국백인입니다. 슈퍼맨과 원더우먼 등은 외계인 혹은 외국인이지만 배트맨 브루스 웨인은 유서 깊은 가문의 미국식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계층 출신도 아니고 열등감이 강한 성격도 아닙니다. 물려받은 부자라 우리 같으면 상당히 반감을 가질 만한 인물인데 미국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미국의 초기 부자들이 청교도적 전통 속에 각별한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았고 높은 도덕심으로 많은 사회적 공헌을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겁니다. 스스로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악을 응징하는 배트맨이 딱 그런 미국 정통 명문가의 착한 후손이죠. 우리는 좀 우습게 보지만 부시 대통령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퇴임 말년에 인기가 추락했지만 여러 가지 결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재임에 성공했던 걸 보면 확실히 미국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나 봅니다.
 "다크 나이트"는 그런 면에서 현재 미국이 빠져있는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세계의 자경단임을 자처하고 있는 미국이 처한 자기모순이 영화를 통해 스며나오고 있습니다. 조커는 악의 화신입니다만 배트맨이 결코 죽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조커를 죽이는 건 배트맨 스스로 세운 원칙을 깨뜨리는 행위가 될 테니까요. 배트맨은 법 밖에 존재하지만 스스로 법보다 더한 도덕적 기준을 세우고 있는 인물입니다. 무기를 안 쓰고 굳이 주먹으로 해결하는 것이나 스스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자기기준 때문입니다.
 조커는 배트맨의 이런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조커는 배트맨이 자신을 직접 죽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해 배트맨을 괴롭힙니다. 법 밖에 있는 배트맨이 법 안에 있는 하비 덴트 검사를 진정한 영웅으로 삼아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 주길 바라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조커는 정의의 상징과도 같은 하비 덴트를 악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배트맨은 좌절합니다. 마치 세계 도처의 "악의 축"들을 제거하려다 성과도 없이 망신만 당한 미국의 현재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정의'의 기준입니다. 과연 누가 '정의'의 기준을 세울 수 있나요? 배트맨이, 아님 미국이? 조커는 배트맨(미국)에게 좀 더 솔직해지라고 합니다. 배트맨의 존재가 오히려 악을 불러내오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조커 자신은 배트맨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배트맨에게도 조커라는 존재가 꼭 필요한 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물음은 인간사 모든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정의'를 외칩니다. 하지만 '정의'가 완전히 구현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왜? 원래 '정의'란 따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결국 분쟁과 갈등의 본질은 '정의구현'이 아니라 '서로의 입장차'일 뿐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뿐입니다. 법이나 제도는 그런 사람들간의 분쟁을 공정하게 조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법 밖에 존재하는 배트맨은 한계와 모순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배트맨이 아무리 악을 응징해도 끊임없이 악은 새로 생겨납니다. 배트맨 혼자서 모든 악을 응징할 수도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배트맨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결국 법과 제도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배트맨은 영원히 '흑기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엔 '배트맨의 아이들(배트맨을 추종하는 가짜 배트맨)'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저마다 '정의'의 구현자가 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법과 제도를 무시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에 빠진 나머지 나와 다른 남의 의견은 곧 '악'으로 여깁니다. 우리나라도 이젠 절차의 민주주의에 관해 좀 더 관심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국은 몰라도 우리나라 만큼은 '배트맨'과 같은 슈퍼히어로들이 앞으로도 없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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