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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 ㅣ 스칼라 월드 북스 5
쥘 베른 지음, 홍은주 옮김 / 창작시대 / 2000년 2월
평점 :
품절
이야기는 1872년 10월 2일 수요일에 시작됩니다. 영국 런던, 매사 기계처럼 정확한 필리어스 포그란 신사가 매일 들르는 '개혁 클럽'에서 다른 회원들과 논쟁 끝에 80일만에 세계일주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그 일은 곧 2만 파운드(필리어스 포그의 거의 전 재산)를 건 내기로 비화합니다. 포그는 그 날로 당장 세계일주여행을 떠나는데 난감한 사람은 그 날 바로 포그씨의 하인으로 취직한 프랑스인 빠스빠르뚜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빠스빠르뚜는 조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선망해 포그의 하인으로 취직했던 것이죠. 취직 첫 날부터 느닷없는 물벼락을 맞은 셈이지만 충직한 빠스빠르뚜는 주인을 따라 나섭니다, 허둥대느라 미처 가스등도 끄지 못한 채.
이후 두 사람은 프랑스를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인도를 가로질러 홍콩, 상하이,요코하마를 경유해 미국대륙을 횡단, 마침내 12월 21일 8시 45분에 개혁클럽에 나타나기까지 숱한 모험을 함께 합니다. 아, 참, 중간에 포그를 은행을 턴 도둑으로 오인해 쫓아 온 픽스라는 형사와 인도에서 우연히 구해주게 된 아름다운 아우다 부인도 끝까지 여행을 함께 합니다.
당시 교통편으로 얼마나 빨리 지구를 돌 수 있나가 관건이기 때문에 여유로운 여행담이 될 순 없었지만 소설 속엔 나름대로 당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정확한 묘사가 많습니다. 당연히 영국 식민지였던 지역과 일주여행의 중간 기착지 몇 곳에 한정되지만 작가가 마치 직접 일주여행을 해 본 것처럼 상당히 정확히 묘사하고 있어 흥미롭습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극에 달한 시기인지라 그만큼 세세한 정보들이 유럽으로 취합되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시대가 시대인지라 다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비치기도 합니다만 오히려 당시 시대정신을 감안하면 작가의 시선은 매우 공정하고 균형잡혀 있어서 지금 읽어도 별로 거북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이 소설이 재미있는 건 주인공이 영국인이고 그의 파트너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영국의 기계처럼 규칙적이고 합리적인 신사 필리어스 포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건 당연해 보입니다. 아마도 당시 세계일주를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나라 사람은 영국인이었을 테니까요. 실제로 소설에서도 일본과 미국을 빼면 거의 영국의 식민지들을 경유하는 일정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파트너이자 소설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람인 하인 빠스빠르뚜는 프랑스인입니다. 하인이라고 번역하니까 좀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고용 집사라고 보면 맞겠죠. 빠스빠르뚜는 여러모로 포그와 대별되는 인물입니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포그에 비해 빠스빠르뚜는 격정적입니다. 포그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합리성의 화신 같은 사람이라면 빠스빠르뚜는 실수투성이지만 인간적인 사람이죠.
주인공이 영국인인지라 언뜻 작가가 영국인의 합리성을 찬양하고 프랑스인의 감정적인 국민성을 비판하는 것 아닌가 싶지만 사실은 양쪽 모두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선 포그 못지 않게 빠스바르뚜의 활약이 많습니다. 쥘 베른의 그런 균형잡힌 시각이 이 소설을 오늘날까지 고전으로 사랑받도록 만들었겠지요. "15소년 표류기"에도 비슷한 설정이 나옵니다. 영국 아이들이 주가 되고 프랑스 아이가 주인공이죠. 미국 아이는 양쪽 사이에서 균형을 잡죠. 쥘 베른이 꿈 꾼 세계는 그런 조화의 세계입니다.
전 어릴 때 이 책을 아동용 문고판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영화도 보아서 내용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아들 녀석에게 사 주기 위해 뒤져보니 "완역판"이 많이 나와 있더군요. 이 책은 소설과 함께 당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도판과 사진들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서점에서 골라 제가 먼저 읽어 보았는데 어릴 때랑 느낌이 달랐습니다. 완역판의 내용이 훨씬 풍부한 이유도 있지만 역시 제 눈높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죠.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