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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살만 루슈디는 무척 난감한 작가입니다. 이 작가의 작품들을 읽으면 지금은 돌아가신 이란의 호메이니옹께서 왜 루슈디를 무슬림의 공적으로 삼고 사형선고를 내렸는지 이해가 갑니다. 호메이니옹이야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무함마드와 그의 부인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코란의 일부를 모욕했다고 열받으셔서 그랬다고 합니다만 저도 옹 못지 않게 분노가 치미니 별일이지요!
현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엮어 놓은 이야기, 신화에서 최첨단 유행까지, 고전에서 TV와 영화 만화를 넘나드는 해박함까지, 더구나 결정적으로 유들유들 깐죽깐죽 사람의 폐부를 후벼 파는 루슈디의 말빨에 화가 치밀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오, 신이시여! 어찌 한 사람에게 그 모든 재능을 주셨단 말입니까!
살만 루슈디의 소설은 무척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겸손함이나 독자에 대한 배려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이 작가의 현란한 문체와 인정사정 없는 비유, 독서속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종횡무진의 인용들(각주가 없으면 이해가 불가능한 인용들. 그나마 각주는 번역자가 찾아서 올린 것입니다.작가는 전혀 그런 수고를 할 사람이 아닙니다)에서부터 사람 미치게 만드는 말장난까지 독해해 나가다 보면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당연히 책 한 권 읽는데 며칠이 걸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작가 책은 한 번 손에 들면 내려놓기 어렵습니다. 읽기 힘들어도 재미있습니다. 끙끙대며 독해하느라 짜증나다가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책을 다 읽게 되면 이렇게 난해한 책을 읽어 낸 자신의 지적능력에 뿌듯한 자부심이 생기면서 다음에도 그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되죠. 작가의 글재주만 뛰어난 게 아니라 인류와 세계에 던지는 그 메세지 또한 묵직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악마의 시"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영국에서 은둔하던 작가가 사형선고가 해지되고 나서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 쓴 소설입니다. "악마의 시"에 비하면 훨씬 편하고 쉽게 읽히는 소설입니다. "분노"에서도 작가의 그 현란한 글솜씨는 여전합니다. 내용은 여러 매체에 많이 소개되었으니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재미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가지는 분노의 근원이 좀 상투적인 감은 있지만 뭐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사실 그런 설정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긴 하지만 이야기로 승부를 보는 작가는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분노의 세기'를 살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던지는 작가의 화두일 것입니다.
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주제를 찾았습니다. 알 수 없는 내면의 분노로 가족을 떠났던 말릭 솔랑카 교수가 우여곡절 끝에 분노를 없애고 어린 아들을 보러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몰래 숨어서 이젠 이혼한 것과 다름 없는 아내와 그 아내의 남자가 돼 있는 옛친구 그리고 아직도 "아빠"를 외치지만 아저씨를 아빠 삼아 잘 놀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봅니다. 그 때 아내가 솔랑카를 발견하고 아이 앞에 나서지 말라고 눈짓을 보냅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거죠. 그제야 솔랑카는 분노의 치유법을 발견합니다. 솔랑카는 오히려 아이들이 노는 점핑대에 올라가 통통 도약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의 날개짓입니다. 솔랑카의 도약은 하늘을 나는 천사의 모습입니다. 하늘은(신) 어떤 하늘이든 무스림의 하늘이든 기독교도의 하늘이든 불교도의 하늘이든 모두 사랑과 화해와 용서의 하늘입니다. 솔랑카의 행위는 그걸 상징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들 '아스만(하늘이라는 뜻)'을 위해섭니다. 아들 아스만은 미래를 상징합니다. 미래의 후손은 인류의 희망이자 하늘입니다. 그 하늘을 위해서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는 것이죠.
한 때 증오와 분노의 희생자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아니 지금도 그럴 지 모르는 작가의 외침이 가슴 뜨겁게 와 닿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