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이 흘러가는 시간
저스틴 고 지음, 김목인 옮김 / 시공사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유려한 솜씨로 쓰인

야심찬 데뷔작 

한결같이 흘러가는 시간



흔히들, 첫 작품에서는 작가의 패기가 강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작가 저스틴 고의 데뷔작인 이 소설이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다. 소재만 놓고 보면 무려 6개국을 오가는 주인공의 유산 찾기에 제1차 세계대전과 에베레스트 등반까지 등장한다. 소설 여덟 편을 쓸 소재로 한 권을 쓴 셈이랄까. 그럼에도 작가는 산만한 구석 하나 없이 인생의 순환에 대한 진중하고도 매끄러운 이야기 한 편을 엮어낸다. 또한 그는 장인의 기질을 지닌 사람인 듯하다. 쉬운 방법보다는 꽤 공이 드는 방식들을 써가며 그 진가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르포처럼 발로 뛰며 취재한 자료들이 가득하다. 각 장은 화자의 목소리 외에도 옛 신문기사, 제품 홍보문구, 포스터, 편지글과 전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읽다 보면 독자 역시 주인공 트리스탄처럼 유산 찾기를 잠시 잊고 다양한 문물과 지식에 빠져들게 된다. 정해진 양식에서 필요한 문장만 남기고 지우는 방식의 야전엽서, 20세기 초 유럽의 보관 우편물 서비스 등이 이야기 안에서 생생히 활용되고 있다.


인물이나 배경도 실제의 사료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소설 속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대원 중 노엘, 소머벨, 브루스 대장 등은 1924년 영국 원정대의 실존 인물들이다. 이 해는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맬러리가 정상 공격을 시도하다 실종된 해로 허구의 인물인 애슐리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이모젠과 애슐리가 몰래 숨어들어갔던 성당이나 베를린 거리의 옛 명칭, 웨일스의 산장 등도 모두 실제의 장소를 모델로 한 것이라 번역 중에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실제와 허구를 섞는 이러한 역사 다큐식 기법은 과거의 장면들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우리는 런던의 지명뿐 아니라 1920년대 택시의 미터기에 달렸던 빨간 깃발까지, 1차 대전의 참호뿐 아니라 독일군 포의 사양까지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문장 역시 주로 회상보다는 현재시제를 유지한 채 시간만 과거로 옮기는 정공법을 쓰고 있다. 출간 직후의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메소드 연기자들처럼 한동안 1930년 이전 작품들만 읽으며 감각을 유지했다고 밝히고 있다.


장별로 과거와 현대 이야기가 교대로 진행되는 구성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다. 마치 푸가 음악에서 같은 선율을 시차를 두고 진행시켜 무수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두 이야기는 포개어지고 멀어지며 여러 가지 섬세한 주제들을 던져준다.


첫 번째는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 규모가 달라지는 과거이다. 소설은 상속 추정자가 자신의 직계를 확인하는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점차 과거의 이야기 전체를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서류 한 장만 찾으면 된다고 강조하는 법무사와 막연한 단서를 따라 아이슬란드까지 여행을 감행하는 트리스탄은 각기 다른 관점— 효율의 세계, 이야기와 공감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애슐리와 이모젠의 이야기는 첫머리에 이미 완료된 과거로등장한다. 하지만 법무사와 트리스탄이 그 빈틈을 채우는 방식은 다르다. 트리스탄 초점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목록을 만들고 자료들을 점검하지만, 이 가족 이야기의 당사자이고 기본적으로 공감능력을 통해 추리를 하는 사람이다. 반면, 법무사는 소설 말미에 가면서 오히려 목적만을 위해 흐지부지한 결말을 내리려한다. 점점 거대해지는 과거에 이미 깊이 들어와 있는 트리스탄은 현실의 목적을 넘어 이야기의 퍼즐을 끝까지 맞춰보려고 한다.


두 번째 주제는 주인공의 행동 안에 숨겨진 결핍과 욕구이다. 트리스탄은 조사를 진행해나갈수록 자신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법무사나 시간 제한이 아닌, 자신의 조사 방식 자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죽은 어머니의 안쓰러운 삶으로부터 비롯된 결핍이 있다. 그것을 메우려는 욕망은 조사의 원동력이자 방해물로 작용한다. 과거의 흩어진 조각들을 좇아 갈수록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지는 트리스탄의 모순된 상황은 작품 속에 인용된 아이슬란드 사가 속의 영웅들과 닮아있다.


트리스탄은 자신을 유럽 한복판으로 데려온 것이 결국 자신의 욕망이었다는 것, 하지만 거기에서 삶을 마치게 할 수 있는 것도 그 욕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슬란드의 외곽도로 한복판에서 그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듯한 자신과 애슐리를 생각한다. 그렇게 소설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고, 모든 것을 거두어들이는 운명이 곧 각자 안에 있는 결핍과 욕망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세 번째 주제는 사랑에 대한 관점이다. 과거와 현대 이야기 모두에서 불길함을 알아보고 현실적인 판단을 재촉하는 것은 여주인공들이다. 이에 반해 남자 주인공들은 늦게 깨닫고 갈팡질팡하는 존재들이다. 애슐리의 이별은 외형상 전쟁이라는 시대의 비극 때문으로 보여지지만, 구체적으로는 이모젠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해 헤어진 것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우울한 서사를 따라 케냐와 아라비아 반도, 에베레스트까지 활동 폭을 넓히지만 그럴수록 운명적 사랑은 현실에서 멀어져 추상적으로 변해간다.


트리스탄의 계속되는 여정에서 심리적 결핍을 감지하는 것은 여러 모로 이모젠을 닮은 미레유다. 미레유는 자신은 결코 트리스탄이 조사 중에 얻게 된 경험의 일부로 남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삶 자체가 아닌 이야기에 빠져드는 트리스탄에게 경고를 던진다. 닮은꼴로 유전되는 운명을 보여주던 이야기는 트리스탄이 한 발짝 더 용기를 내어 삶으로 돌아올지의 문제를 향해 나아간다.


작가 저스틴 고는 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공부했고, 20대 초반을 뉴욕의 로펌에서 근무하며 안정된 삶과 자기주도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했다고 한다. 결국 유럽으로 떠난 뒤 6,7년 동안 베를린, 파리, 런던 등지에 머물며 쓴 작품이 이 소설이다. 그래서인지 트리스탄의 이야기는 작가가 선택해왔을 삶의 과정들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서류와 효율의 세계, 이야기와 공감의 세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문제까지. 


재치와 도발로 무장한 작품들이 젊은 소설의 한 축에 있다면, 이 작품은 고풍스럽고 우아한 장인적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가 저스틴 고의 젊은 감각으로 고풍스러운 것들을 재해석해냈다는 점에서 ‘신고전주의’와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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