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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이 책을 왜 샀을까? 별로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아니면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일까? 사실, 처음 살 때는 오로지 마케팅의 승리였다. 문체가 내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고전 얘기를 많이 하는 것을 보니 갑갑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풍에 가보니 이런 문구가 하나 눈에 띄지 않는가. “밀도 높은 문체”, 우리 선생님께서, 시의 첫 줄은 삐끼라고, 그러셨다. 내가 그 삐끼에 끌려들어간 꼴이다. (밀도 얘기를 처음하신 분은 다른 시 선생님이셨다) 그냥 몇 장 읽어보고 시켰다. 그러나 잘 끌리질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냥 어디 있는지 모르게 놓아두었다. 『웬즈데이』와 『800』등등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리뷰를 쓸 만한 적절한 꺼리, 즉 화제가 생기질 않았었던 것 같다. 웬즈데이는 처음의 와일드한 느낌이 그냥 식는 게, 조금씩 질리는 게 싫어서 중간에 멈추었던 반면, 800은 시적인 느낌은 좋았지만 중심소재가 뭔지 모르겠다는, 다 읽긴 했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소리를 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었다. 내가 너무 눈을 이상한 데 뒀나?
그래서 결국 같이 샀던 『그 여자의 자서전』과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찾게 되었다. 내가 보고 배울 것은 역시 그 곳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찾으려고 하니까 또 쉽게 나오지 않았다. 평소에 놔두던 책장 옆의 책 쌓아놓는 곳은 열심히 뒤졌다. 결국은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가장 찾기 어려웠던 컴퓨터 아래 있었다. 결국 나의 문학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데 못 찾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책을 내 나름대로 읽다보니, 아주 놀라웠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화제와 대략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 속의 소설들은 ‘반소설’적이다. 이런 얘기를 들어봤자 무엇하느냐는 식이다.
그게 바로 지금 자네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아닌가? 그런 책 따위는 다 던져버리게나. 내 손보다도 못한 그 따위 책일랑은.(70P)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가 전쟁에 나가기 싫어서 스스로 이 손가락을 잘랐다고 생각하나?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이런 얘기는 소설에 써먹을 수 있겠지(73P)「이상 뿌넝숴(不能說) 中」
댁에는 쓰레기통이 없나요? 다 찼습니다. 워낙 쓰레기 같은 원고가 많아서. 어쨌든 지금은 쓰레기통을 다 비웠으니까 돌려주십시오. 자, 들어보세요. (130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그렇지만 히스테리에 관해서 이런 얘기는 있어. 히스테리성의 소질을 가진 사람과 공상 잘하고 감정의 변화가 많은 사람은 말이네, 될 수 있는 대로 정신의 과로를 피하고 감정이 흥분될 소설이나 연극을 보지 않아야만 한다는 거지.”
“지금 내 얘기 하는 건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지. 히스테리, 조심하게나.(214P)(연애인 것을 깨닫자 마자 中)
이전에 ‘북새통’이라는 무료배포 되는 책을 읽어보니 이렇게 쓸 데 없는 소설을 쓴다는 그는 도리어 “소설은 목숨을 걸고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뭔가 앞뒤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역설은 완전 꽝 아니면 뭔가 많은 생각이 있는 것이다, 싶어서 구미가 당겼다. 그래서 나는 목숨을 걸기까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해될 때까지 읽었다. 그냥 쓴 이야기 같은 이 이야기들이 내 시각으로 읽으니 전혀 단순하지가 않다. 나는 이 소설들이 관통하고 있는 비유와 그 의미를 대략 이렇게 봤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 많다. 머리가 아프다….
1, 농담 같은 인생, 그리고 사랑(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2, 주석의 하찮음, 혹은 내 주관의 덧없음. (다시 한달을 가서…, 남원고사에 관한 이야기와 한 개의 주석)
3, 체험의 중요성(뿌넝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4, 이 세상을 움직였던 우연(그건 새였을까, 네즈미, 이등박문을, 쏘지 못하다)
5, 상상이 지배하는 인생(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거짓된 마음의 역사, 다시 한달을 가서…)
6, 인생의 통찰(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당연히, 모두 합치면 1+2+3+4+5=6이 되겠지만.
사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소설은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하 설산)」이다. 산에는 사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산은 “여러 가지 고비”등의 뜻으로 쓰인다. 산에는 많은 고사가 있다. “믿음만 있다면 너희가 산을 옮기리라(성경)”, ‘우공이산(愚公移山)’등등, 그렇다면 내가 읽은 고비란 무엇인가? 인생, 그 자체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부문에서 그것을 시사하고 있다.
「설산」은 자기의 난관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고, 가장 험하기로 소문난 산을 오기로 넘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에베레스트는 이미 누군가 그 투자를 따내서 더 이상 가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낭가파르바트’라고 불리는 이 산은 에베레스트보다는 낮지만 험하기는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악명이 높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에게는 그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넘기란 힘들고, 남은 투자금은 많지 않다. 이것을 실패하면 더 이상 투자금을 기대하기는 힘든 형편이다. 그러나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다. 주변 환경은 험악하고 고소 증세(이른바 산지대의 잠수병: 산의 높이에 따른 환경변화에 적응을 못함)때문에 계속 왔다갔다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가 이 “산”을 진짜 인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탐구로 본 이유는 이렇다. 대부분의 종교는 “산”이 나오지 않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절도 “산”에 있으며, 기독교 성인인 “예수님과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고(예수님은 산 위에서 가르치셨고, 모세는 산 위에서 법을 받아 내려왔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어떤 산 속 동굴에서 천사에게 진리를 전수받았다, 고 한다. “도가”도 남이 없는 곳, 역시 산에서 진리를 생각했겠고. 그래서 산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의 무대’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찾으며 괴로워도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이므로. 이들이야말로 “진리탐구자”의 모습을 닮아 있는 것이다. 물론 ‘죽음 앞의 두려움’을 가진 대원들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들에게 투자비가 떨어져간다. 재산은 무엇인가? Quality가 있는 메마르지 않은 人生이다. 그들에게 그것이 없다면 인생은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상징이 자살한 ‘여자친구’다. 그녀가 자살하기 전에 줄을 쳤던 혜초의 책 중 이 부분은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상징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여진다.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파사국에서도 어머니를 아내로 삼는다.(128P)
이 문장을 딱 보자면 엄청나게 타락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사람은 여러가지가 있다. 인생의 참 의미를 알고 제대로 알아가는 사람, 아니면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 인생의 참 의미를 알았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 인생의 참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찾을 생각도 없는 사람, 자기 인생이 참이라 믿지만 제일 큰 함정은 자기 자신인 사람…. 요즘 참 말세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세상이 참 끔찍하다. 그런 일은 매일 보도되는데도 지금은 전율보다는, 그래, 그런가보다. 식으로 듣는다. 지금보다 몇 십 배 끔찍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사람들은 놀랄 것이다. 유신이나 전, 노통 시대가 낫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지만, 성적인 타락과 인간관계의 삭막함과 광기는 누구도 아니다 할 수 없는 진실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10여 년 전만 해도 드라마에서 상스러운 욕과 섹시 컨셉은 꿈도 못 꿀 이야기였다. 텔레비전 심의위원회의 커트라인은 무척 단호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난 10여 년 동안의 변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성적 타락은 인간관계의 사랑이 식고,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듯, 성관계 자체는 사랑이 아니고 최대의 사랑이 전제가 된 사랑이어야 되는데, 욕심이 그것을 거꾸로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은 가분수가 되어버렸다. 똑바로 서 있을 수 없고, 너무 무거운 몸이라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그것은 인간의 만족을 모르는 끝없는 갈증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인간은 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원한다. 돈에 물들어, 인간은 끝없는 욕심 때문에 만족이 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등반대의 대장과 죽어버린 여자 친구는 그것을 말 하는 것 같다.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 때문이었다. 그는 이 거대한 틈 사이에 많은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없었습니다”까지 쓰고 그 다음에 “후회는 없어”라고 쓰기까지 여자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에게 설명하고 있었을까? (143P)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후회가 없다고 했다. 용기 있게 사는 것보다, 죽는 쪽이 편하다, 라고 한다. 죽을 용기는 없는데, 살 용기는 더더욱 없다? 그 앞 본문에 의하면 이렇게 힘들고 지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 있었다. 내가 만들고 싶은 세상은 있었지만, 욕심에 지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할 방법이 없다, 아니 없는 것 같다. 이것을 치료할 최고의 약은,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 그러나 근 100년 동안에도 그것은 쉽지 않았나보다. 이 사랑은 이 소설 곳곳에서 멍들어있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이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지금은 만신창이다. 그러나 옛날까지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 구절을 보면 말이다. 그들의 과거를 짐작케 해준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그녀가 꿨다던 꿈에 대해서 생각했다. 같이 살던 시절에도 그녀는 꿈을 꾸면 늘 내게 얘기했다. 꿈을 얘기할 때, 그녀의 눈빛은 때로 기대에 부풀기도 하고 때로 불안해하기도 했다. 나는 꿈 따위는 조간신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었다.(14P)
‘옛날에’ 같이 있었던 아내는 기대와 불안 두 가지가 공존하는 꿈이다. 아직 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희망을 갖고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극히 현대적인 인간형인 ‘나’는 조간신문, 눈앞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 잊어버린다. 이것은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울어버린 곳은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도를 들여다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생각했다. 이 행로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을 구하기 위해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다지 논리적이랄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16P)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의 행로 한가운데 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는 사실. 나는 장마 내내 선을 그어놓은 지도를 벽에 붙여놓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 봤다. “저게 도대체 다 뭐야?” “나도 잘 몰라서 바라보는 중이야.”(16P)
나도 잘 알 수 없는 것, 그들은 나무를 좇고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다고 이렇게 머리를 썩일까?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28P) 이상「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中」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재밌지 않은 농담, 혹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사람”이다. 여기서 ‘말’은 나무나 인간이나 그들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분출하던 것을 뜻한다. ‘농담’은 그들을 웃기던 것이다. 즉, 우리가 행복하게 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는 없지만, 괴로워하려고 살지는 않잖은가? 그래서, 여기서 이 “농담”은 삶의 이유이자, 행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인식한 순간 농담 정도가 되어버렸다. 서로서로 남에게 소중한 것을 무시한다. 나는 아내의 꿈을 무시하고 아내는 나의 혼잣말을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에서도 역시 사랑은 정상적인 사랑으로 쓰이지 않는다. 무엇의 수단이 된 것이 사랑이다. 작가는 이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개념적으로만 알고 있으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랑이 최대의 병이다.
아아, 이제야 깨달았도다. 쿠리야가와가 관동대지진으로 죽으면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연애 역시 죽었다는 사실을. 각급 학교의 학도들이 아침마다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듯이 그저 나도 쿠리야가와를, 콜론타이를 외웠다는 것을. 자유연애가, 그리고 그 부산물인 화류병이 아니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이 신념 자체가 바로 박래품이라는 것을.(225P)
돌아선 내 등뒤로 이 친구의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거 과연 끝나기는 할 전쟁인가?”
이 친구, 어쩐지 쉽게 돌아갈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비를 많이 맞았는데도. 아주 골치아프게 됐다. (226P) 이상「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 中」
전쟁을 빈정거렸지만, 이것 역시도 마찬가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다. 전까지 했던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논쟁이었지, 전쟁에 대한 논쟁은 아니었다. ‘전쟁’이라는 당시의 화두를 사랑에 맞추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것 역시 다른 비유적 의미로 “넘지 못한 산”으로 여겨진다. 역시 「이렇게 한낮 속에 서 있다」에서도 그렇게 이용하는, 혹은 이용당하는 여자 하나가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는 조선의 평양을 완전 황금도시로 말하는 중국인들에 대해서 볼 수 있다. 미국인들 역시 그런 상상을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을 비롯해 이 소설집에 나오는 소설들 중 몇 편 중 말반에서는 정말 이럴까요? 하고 뒤집는 장면이 나온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게 뭐란 말인가? 라는 의구심(내지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 「뿌넝숴」에서 이것을 말했듯, 소설을 정말 믿지 않는 것이 좋다고, 믿을 건 정말 현장의 느낌 말고는 없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작가는 정말 그런 것을 말하고 있을까?
확실한 것은 없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상상하면서 주석을 다는 나나 내 일상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나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짐작만 할 뿐인 원정대원들이 그런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저 서로를 짐작할 뿐이었다.(143P)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내게 보낸 편지에다가 그는 언젠가 그 축대를 기어올라간 적이 있었다고 썼다. 제가 워낙 높은 곳만 보면 올라가고 싶어하는 성격이어서, 그 축대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평소에 갈고 닦은 실력이 있으니까 조그만 크랙과 홀드만 있다면 그 어떤 벽이라도 넘어갈 수 있답니다. 막상 올라가보니 힘이 빠지더군요.(150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그러나 이것은 짐작에서 멈춘다. 사랑이 단절되었기 때문에.「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은 꿈, 즉 사랑이 많이 식어버린 현실만 보는 그런 현실 속의 암울한 상상력만 풍선처럼 부푼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상상력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당신은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는「거짓된 마음의 역사」에서도 이야기한다. 어떻게 상상하든 진실은 다른 것이라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143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이 문장을 읽을 때, 짐작, 즉 인간의 상상력 하나가 결과를 어떻게 바꿔놓았는가를 알 수 있다. 짐작과 사랑의 간극은 너무나 크다. 현실과 사랑은 다르다. 사랑이 현실을 감싸주지만 현실은 사랑이 감싸주는 그런 현실이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가 지치면, 일견 정신차리고 콩깍지 씌인 사람이 제 시선으로 보이기 시작하면, 즉 ‘축대를 넘으면’ 그것은 너무 어이없기 짝이 없다.
올라가려고 했지만 올라갈 수 없었던, 하지만 올라가면 별 볼 일 없는, 그런 사랑. 현대인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은 분명 있는데 그것이 없는 것 같다는 의심마저 든다. 축대를 넘으면 높은 산을 넘은 것에 비해 별 볼일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이 너무 별 볼일 없는 사랑을 한다고 하기 보단, 인간의 눈이 너무 높아져 있는 것은 아닐까? 분명 직관은 축대와는 비교도 안되는 설산을 빨리 넘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내 인생이 축대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선 나도 사람들을, 정말 상대하기싫은 사람들의 삶 마저도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진짜는 너무나 힘들다. 정작 되고 보면 별게 아닌 게 되는 인간의 욕심. 이 커트라인을 낮추는 것이 제일 먼저 병을 고치는 방법이 아닐까. 아직 내가 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그래서 이 문단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이라는 문장은 70행에서 71행에 걸쳐 있다. ‘우일월정과성산(又一月程過雪山).’ 그 다음에는 ‘동유일소국(東有一小國)’이 이어진다. 혜초는 자신이 가본 나라를 다룰 때는 예외없이 종(從), 행(行), 일(日), 지(至) 등의 글자를 사용했다. 예를 들면 ‘우종남천북행양월(又從南天北行兩月) 지서천국왕주성(至西天國王住城)’,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又一月程過雪山 東有一小國’이라고 말했을 때는 혜초가 실제로 가보지 않고 들은 얘기가 나온다는 뜻이다.(152P)「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中」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저 사람을 다 안다”고 해서 상대를 막 대하지 않는다. 그 때는 이미 ‘축대’를 넘었다. 인간이 인생을 괴롭게 살지 않기 위해 넘어야 할 것은 ‘축대’가 아니라, 설산이다. 한파와 보이지 않는 크레바스가 사람의 한 걸음도 걸어가기 두렵게 만드는 “설산”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주관과 감정이 제멋대로 나를 지배하는 사람 아닌가? 그래서 나도 아직 “道를 아십니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이것처럼, 나도 이 소설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도 없다. 어긋난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아는 것도 전부가 아니고, 나의 상상력 속에서 잘못 읽은 것도 있고, 더더우기 작가는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았으므로. 즉, 이렇게 말했으므로.
이 세계는 상상하는 대로 구성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1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