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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의 자서전
김인숙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평점 :
「재킬박사와 하이드」를 기억하는가? 서태지의 3집 Rock 노래. 그 당시에는 엄청 생소했다던, 처음에는 별 신경 안 쓰고 듣지도 않다가 요즘에야 대략의 의미를 알아챘다.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을 철저하게 숨기고 살아온 내 인생에/가슴깊이 존재했던 불만이 있어” 이 작품집 곳곳에는 도대체 어떤 마음을 숨기고 살아왔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Come Back Home」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이 소설집에는 그 불만에 대한 형상화가 있다.
끝없는 내 마음의 갈증은 ― 문제의 시작
내 인생이 창창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행복한 꿈을 꾸고, 출세해서 결혼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낙을 끊임없이 채우면서, 하루만 지나, 자고 깨어나 열리는 하루가 기대로 가득차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하루가 그렇게 설레일 때도 물론 있다. 「그 여자의 자서전」의 화자는 많은 기대를 하고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때부터 이미 작가가 되고 싶었고, 내 책이 언젠가 아버지의 책장에 꽂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16P)
그러나 이 기대는 여지없이 현실에서 어긋나고 있었다. 어느 국회의원의 “가짜” 자서전을 대필해주는 그녀는 더 이상 그녀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돈에 대해서는 철저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던 아버지와도 일치한다.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평생 스스로 당신 자신을 속였다.(25P)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도 이 안에는 있단 말이다.(34P)
― 이상「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이 세상의 어떤 부모님께서 거짓말 잘해야 산다. 세상엔 돈이 짱이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악착같이 살라고 자식들에게 가르치시는가? 안 그런 사람들도 약간 있지만,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대강 이렇게 말한다. 착하게 살아야한다, 성실하게 살면 언제든지 성공하게 되어있다, 노력해야 한다, 가끔은 인정도 베풀어야… 그러나 이렇게 손해보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대부분은? 가끔은 질서도 어기고, 거짓말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이 소설엔 넘쳐난다. 이 세상을 사는 모범은 따로 있는데 정작 세상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추월을 당하고 나면 추월을 하고 싶은 심리, 나만 느리게 가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되는 거 말이다.
아무리 샘플자료를 가지고 자서전을 대필해준다고는 하나, 그 속에 내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볼품없는 고양이를 통해 자서전을 쓰고 있는 주인공이 그 속에 자신을 넣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참 기막힌 일이다. 그 조작한 자서전, 아니, 소설에 이호갑의 고통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소극은 아버지와 나, 그리고 오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호갑 그 자신도 고통이 있었다고 호소한다. 이런 고통은 이 소설집 안에 가득하다. 이 소설집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이 소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의 고통을 성찰하고 있다는 데 있겠다. 이 소설이 그런 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가치는 그다지 높지 않을 것이다.
난 언제라도 꿈틀거릴 내 본성이 두려웠어 ― 인간의 본능
중국어로 하오펑여우는 정말로 친한 친구일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말이라고, 화선은 말했었다. 화선은 그를 끌어안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 하오펑여우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샤오친은 그의 고객이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오펑여우였다. 항상 돈이 두둑한 지갑을 갖고 있는 한국인 고객이라면 샤오친의 하오펑여우가 아닐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셈이었다.(113P)
인간에게는 이런 심리가 있기는 있는 걸까? 순간 나도 많이 속아오긴 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을 아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진 거의 없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깔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니다, 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느끼는, 혹은 지치면, 위험한 때가 되면 인간의 악한 본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정신대와 731부대다.
규상은 이제까지 세 번쯤 여행객들과 함께 731부대를 관람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처음 볼 때의 충격과 고통과 역겨움은 사라졌지만,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그대로 남았다. 살아 있음에 대한 냉소와 환멸, 그런 말을 했던 건 화선이었을 것이다. 그는 화선과 함께 처음으로 731부대를 관람했었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악해질 수 있고, 그 악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을까.(117P)
사랑은, 연민은, 아픔은…… 살인은, 폭행은, 강간은…… 전부 사람이 하는 일이지.(117P)
―「감옥의 뜰」에서
인간에게 이런 것이 원래 인간에게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는 게 아닐까,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살면 살수록 인간이 끊임없이 더러워져 왔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라도 자신을 속이고 살아야 하는데 - 속이는 또는 속고 있는 인간
무슨 전화야? 당신 또 빵집 전화 착신해놨구나. 그렇지 말라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목소리. 생일케이크를 주문해놓고 안 찾아간 사람이 있어서요. 이름까지 새겨놨는데…… 근데 여보, 웃기지? 생일케이크 이름이 내 이름하고 똑같은 거 있지? 안 찾아가면 내 생일케이크로 써야겠어. 가만있자, 당신 생일이 며칠이더라? 당신, 내 생일도 잊었어요? 혹시 내 이름은 기억해요? 당신, 내 이름도 잊어버린 건 아니에요? (160P)
처음으로 나를 만족시키고 행복하게 할 수 있던 여자, 그러나 그녀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는 여자였다. 빵집 여자에게 집요한 집착을 하는 나, 빵집 여자, 아니 빵집 여자였던 여자는 모르는 척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이 전화는 빵집 전화로 착신이 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나는 나의 정체를 속일 수가 없다. 빵집 여자로 일했던 사람은 빵집 여자였던거고, 한번 청소부 했으면 청소부였던 거다. 그런 적 없다, 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순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작가는 알고 있다.
밤의 고속도로에서 나는 내 숨소리의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내가 숨쉬고 있음을 잊는 것은, 극히 찰나의 순간 내가 정신을 놓았을 때 뿐이다. (137P)
―「밤의 고속도로」에서
그 때가 나를 움직이는 것이다. 나를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 그 짧은 순간이,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하고, 별 시덥지 않은 순간으로 여긴다. 고속도로에서 한번 삐끗하면 죽음이다. 자살하려고 마음먹지 않은 바에야, 그런 상황에서 마음먹고 조는 사람이 있을까? 시간을 너무 아쉽지 않게 여긴다. 시간을 가장 아쉽게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자각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죽음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다만 세상의 어느 알 수 없는 곳에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중략)…… 아버지는 늘 어딘가를 떠돌고, 늘 어떤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다. 그것이 어머니가 생각하는 아버지 죽음의 전부인 것 같았다.(174P)
―「짧은 여행」에서
죽음이 그렇게 와닿지 않는다. 도대체 왜? 인간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고 있다는 것을 안 후에도 인간은 붙잡힌다. 왜? 속이는 사람도 속고 있고, 속는 사람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돈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흔히들 하는 말로, “가진 돈 싸갖고 저 세상갈래?”라고 하지 않는가? 물론, 지금이야 먹고 살기 위해 약간은 갖고 살아야 하겠지만. 소유욕이라는 게 대부분 부질없는 거 아니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아직도 무언가를 갖기 위해 뛰고 있다.
그는 자식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기 위해 평생 스스로 당신 자신을 속였다.
―「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25P)
그렇게 속고 속이고, 상처입히고, 상처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그렇다면 이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생에 대한 이 욕망은 간절하게 남아있나 ― 이 생 속의 순환
오래간만에 들었지만, 「재킬박사와 하이드」 속에서 “생은 마약이다” 라는 비유를 떠올리고 난 후, 이 가수에 대해서 내심 여러 번 감탄했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픔에 대해서만 말하고 정작 그 어둠속에 갇혀 있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정말 간절하게 필요하다. 「짧은 여행」과「빨간 풍선」에서는 사랑과 관련되어 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몸은 올라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려가기를 또한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려갈 때는 계단이 아니라 허공이었다. 몸은 내게 ‘비상(飛上)’을 꼬드겼지만, 나는 절대로 속지 않았다. 실업자인 여자가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건물의 옥상에서 뛰어내린다면 그것은 비상이 아니라, 의심할 여지없이 추락이었다. 그랬음에도 나는 때때로 속고 싶었다. 물론 오래 전의 얘기다. (241P)
―「빨간 풍선」에서
「빨간 풍선」의 여자는 전업 히트 CF, 그러나 기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성우이다. 이 소설의 ‘나’의 직업들은 묘한 상징성을 가진다. 성우 바깥에는 대부분 연예인이나, 만화, 즉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 등장한다. 그것들의 모양에 나를 맞춰나가야 하며, 어긋나면 어색한 연기로 즉시 퇴출되는, 철저하게 나를 속여야 하는 것의 전형이다. 그러나, 그녀는 냉장고CF 하나만 성공한 후, 나를 속이는 것에 실패한다. 그가 성공하는 이유인 대사, 즉, “나도 갖고 싶어요.”는 상징성이 매우 많다. 왜 “도”일까, “는”이 아니고?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말한다. “갖고 싶어요.” 역시 인간의 보편적 욕구일 뿐이고,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잘할 수 있는 것은 나만 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남도 할 수 있는 말을 좀 더 잘해서 남의 공감을 사는 것, 그것 하나였던 것이다. 그래가지고 어디 성공하겠나? 말하자면, 이 소설에서의 나는 아주 모범적으로 살려고 했던, 이전의 소설들이 전부 평범하지 않고, 약간씩 나를 속이는 밉살스럽고, 때로는 불쌍한 사람이었다면, 이 소설의 나는 “평범한 나”이다. 그런 결과로 ‘나’는 성우자리에서 쫓겨나 베이비시터로 간다. 표면적으로 볼 때, 베이비시터는 사랑이 많이 필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마음에 안 들면 막 패주고, 괴롭히는 일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되는데, 그렇게 사건을 내서 사람들의 불신(不信)을 샀다. 보일 때만 사랑하고, 보이지 않으면 장난감으로 전락시키는 사람들의 최악의 본능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망을 잃은 “사랑”의 아픔이다. 이것이 ‘연애’에서 변용되어 사용되면, 사랑은 그야말로 환멸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지금의 “사랑”이다. 드러나는 몇 마디 말이, 혹은 스킨쉽이 사랑과 이퀄이라고 믿는 것은, 사랑이 겉으로 드러내기만 하고 뒷감당이 안 되는 가짜 사랑이다. 커플이 그렇게 잘 생기고, 잘 깨지고 이혼이 늘어나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작품집의 소설은 무척 좋다. 그러나 이 작품집이 다소 아쉬움을 남기는 것은 이 생에 대한 해결책이 부족하다는데 있다. 정말 없을까….
「짧은 여행」에서 이 생이 너무 길면 다른 괴로움이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체념하는 것도……
“늙지도 않고 시들지도 않고, 낙엽도 안 만들면서 천년을 산다면, 에그, 징그럽기도 하지.”(184P) 「짧은 여행」중
「그 여자의 자서전」에서 이호갑이 “나도 정말 힘들게 살아왔소.” 라고 말하는 대목, 나는 다소 아쉬웠다. 주제를 말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항목이긴 하지만, 다소 싱거운 끝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