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문학동네 시집 41
박남준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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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 시가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 아니 시 쓸 의지가 부족하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만든 말을 되씹어보려고 생각하는 중이다. “내 말로 얻은 사물들의 새 생명을 생각하라”는. 그것은 창조의 기쁨, 아니, 발견의 기쁨이다―발견을 또 하나의 창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시라는 것의 목적도 어차피 감정 혹은 주제의 전달에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사랑을 그리는 시는 여타 일반 시보다 많이 뜰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무한 것을 그리기가 쉬울까? 사랑할 때의 감정을 그리기가 쉬울까? 뭐라고 말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노래들의 가사를 보면 사랑이 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이 뭔지 쉽게 말하고 다니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에서 출발한 사랑은 대량생산되어 폐기처분되고 있다. 사랑이 흔하다고 여기는 시대야 말로 정말 찌든 세대다.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이 세상이 너무나 환하다. 그러나 정작 사랑은 그 빛의 따스함을 잃었다. 왜냐? 대량생산된 사랑―얼굴이 예쁘다, 혹은 느낌이 좋다, 돈이 많다, 혹은 단기간의 파트너, 그냥 쓸쓸해서 등등의 여러 가지 이유다―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이 전부는 아니지만 주류기도 하다. 지금처럼 얼짱 열풍이 부는 때가 없다. 돈 많고 개성적으로 생긴 연예인의 여자친구는 돈에 혹한 걸로 의심당한다. 하나도 진실한 사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무언가에 의한 거품이다. 금방 갈라질거다, 라는 식의 루머만 가득하다. 언론은 잘하면 띄워주고 못하면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현대 사회엔 격려라는 게 그리 많지 않다.

요즘 사랑은 무척 육체적인 사랑이 많다. 그저 관계만을 위한 사랑, 불륜이 뜨는 시대. 동거만 전제로 하는 여자. 섹시 컨셉이 지금만큼 불티나는 때가 없다. 그리고 요즘은 싱글맘도 하나의 스타일로 여겨진단다. 남자는 싫고 아이만 좋은.

남성 혹은 여성의 편향적인 주의가 나타난 것도 그렇게 대량생산된 사랑 때문은 아닐까.

내가 리뷰를 썼던 지미의 『달과 소년』이란 책을 읽어보시라. 그 책엔 대량생산된 것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진정한 사랑은 꽉 붙들고 있는 것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질린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시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 혹은 관념에 집착하여 그 사물의 끝없는 가능성에 집착하여 많은 것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각설하고, 이 시인의 시를 보노라면, 사랑보다는 허무에 가깝다. 그런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나 할까?


사랑이었지 가득 찬 마음으로 일어나는 사랑

그리하여 소나무는 자라나 푸른 그늘을 드리우고

바람을 타고 굽이치는 강물 소리 흐르게 하고

새들을 불러모아 노랫소리 들려주고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던가

―「아름다운 관계」


시인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갖고 있다. 또한 그렇게 살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있다. 이 시편의 나머지는 그렇게 살지 못했던 시인의 투쟁록이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혔던, 역경의 기록이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열매들을 아픔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의 한 절씩을 따오면 한 가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어지럽다 타래난초 때문이다 안간힘으로 비틀어야만 꽃을 피울 수 있는가 비틀린 것만이 타래난초인가

        ―「타래난초와 한판 붙다」


단풍처럼 붉은 각혈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던가

        ―「무릎을 꺾는 사내」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

                      

오호라, 시인의 성숙에 대한 생각이다. 성숙해진 것은 이리도 아프게 온다. 비틀어진 것만이 꽃을 피우는 ‘타래난초’, 나의 아픔으로 피를 쏟은 다음에야 성숙한 ‘단풍’, 성숙해서 떨어진 ‘동백’. 그렇게 열매를 맺은 것도 마찬가지로 아프다. 아픔의 열매는 아픔일 수밖에 없다.


선홍빛 수줍은 연지곤지 새색시로 피었습니다

흰 눈밭에 울컥 각혈을 하듯 가슴도 철렁 떨어졌습니다 그려

        ―「선운사 동백꽃」


여기서 ‘각혈’이란 표현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각혈’은 심하게 고통스러워하다 토해진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동백꽃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결실이다. 그러나, 시인의 눈에 그것은 아픔이다. 그 상태가 유지가 되지 않기 때문일까?


시인의 생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주는 표현이 있다.


생애를 걸어 단 한 번 피우고 죽는 꽃이 있다

꽃을 피웠다고 온통 몸이 잘리운 꽃밭이 있다

        ―「대밭 그 꽃밭」


상처는 상처이지만, 나대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생은 그 자체로 상처이니 너무 괴로워하지도 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그 안타까움에 있는 것 같다. 사랑이 있다면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위안이 되었을 것을, 사랑을 위해, 사랑 때문에 조금도 비우지 못했던 나에 대한 아쉬움...

 

조금 손가는 대로 쓴 듯한 글도 있고 감상적이기도 한 듯한데… 표현도 좋고 힘이 있다. 좋은 시를 읽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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