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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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시작점이 된 책이다.

처음부터 이 책은 예사롭지 않은 느낌을 주었다. 역시 노벨상 수상작이었던 '야만인을 기다리며'(쿳시)의 사색을 기대했던 탓인지 말이다. 점점 읽을 수록 스토리의 줄기가 그다지 잘 잡히지 않았다. 다만, 이 작품의 사색의 깊이는 기대 이상이었다. 시작부터 끝까지, 그냥 넘길 수 있는 페이지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좋은 표현의 페이지를 살짝 접고 페이지를 넘어가자면, 책의 1.6~8배는 넓어졌을 것이다(이 책 자체를 그냥 접지 않고 둬도 될 정도였다). 그런데 곳곳의 의미가 잘 이해는 되지 않았다. 새로운 인생은 '사고'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경험했는가에 대한 기록도 잘 보았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서 실제와는 약간 차이를 느낄지도 모르겠다. 거의 중말반에 사랑에 대한 작가의 나름대로의 정의가 나오는데, 나는 그것에 별로 공감을 못느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소설은 어떻게 써야하는 가를 말해주는 듯 했다.

나의 독법을 말해보겠다. 한 문장의 주제를 찾는다. 그 주제에서 하나의 질문을 연상해본다. 거기에서 나온 주제를 뒷 문장과 접합해본다. 그것이 질문인지 아닌지 따져보고 그것에 대한 반응을 결정해 의미를 내놓는다. 그러면 질문과 대답, 대답의 질문, 이런 식으로 사색의 정도가 나온다. 이것은 사실상 시를 읽는 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은 결국 경계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 시의 독법이 쓰인 것인지 모르겠다. 김연수 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살짝 읽어본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도 그런 식으로 읽어보면 상당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느껴진다. '묘사'가 돋보이기 때문에 띄는 작품과 '캐치'를 잘 한 작품, '사색'이 도드라지는 작품. 이것은 자세히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사색'을 잘했다면 '캐치'를 잘 해낸다. 그러나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은 '깊이'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이 작품의 묘사를 보노라면 '온다 리쿠'의 '흑과 다의 환상'과 같은 '색다르다' 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소 진부해보이는 표현들도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사색의 깊이로서 이 점을 커버하고 있다. 얼마나 노력하면 익숙한 표현도 용서되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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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워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권남희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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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것과 같이 낑겨들어오는 '바다의 선인'을 계기로 사게 되었다. 일본 소설은 거기서 거기다, 라는 인상도 있었고, 몇몇 작가를 제외하면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느낌의 소설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냥 체념하고 읽으려 했다. 그러나 이 작가는 뭔가를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맨 처음이 너무나 인상을 당긴 탓이다. 이 작품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묘한 무드를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시적인 이미지화도 잘 되어 있고(원래 나는 그런 이미지화를 좋아한다. 요즘 내가 가쿠타 미쯔요(그녀는 디테일이 좋아 생각을 잘 할 수 있게 만든다)를 사들이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살짝 들쳐본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들 다음으로 마음에 든 소설이 이것이었다. 단 하나 흠이 있다면, 바로 소재다. 해설에도 나와있지만, 이 소설은 '근친상간'이 내용 중 일부다. 작가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능력이 있음에도, 이 해설 자체로 인해 이 작품 자체에 대해 호감을 잃어버렸다. 해설을 보기 전까지는 이 소설에 엄청난 호감이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작품의 능력을 반증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책 두 권(사랑의..., 비틀거리는...)도 그다지 밝은 내용은 아니고, 불륜 등의 이야기를 쓴 것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거부감보다는 묘한 무드와 함께 공감이 약간 생기는 것이었다. 일본 작가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나, 나중에 시킨 '나카노네...'와 '빠지다' 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게 만들었다. 뭐, 이 책은 내용 면에서는 아름답지만 아름답지 못한 것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점에서의 반감 뿐이다. 나쁜 것의 미화는 세상을 어둡고 탁하게 만드는 데 일조를 한다. 그렇게 나쁜 것인지 모르고 저지른 죄가 나타내는 본성은 사람을 힘들게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외하고 보면 별 네 개 짜리의 작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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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유키 -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조두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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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난 느낌은 바로 웰메이드, 였다. 그냥 이렇게 저렇게 예상되는 결말이 아닌, 무난하고 아름답게 끝나는 것. 작품 날개(책을 딱 펴면 왼쪽)의 작자 설명을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처음 산 계기도 다름 아닌 '마일리지' 였다. 한겨레 문학상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절대적 기준도 아니었을 뿐더러, 유아독존에 빠져있던 K모 작가 이후로 신뢰가 조금 무너져 있어서 그게 나오면 나왔나보다... 했다. 아니, 문학 전반에 관심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한 1.5년동안 문학과 떨어져 있다보니, 문학을 어떻게 읽는가도 가물가물하다. 더더욱, 책을 읽어왔음에도 입원생활을 한 터라 센스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이 책은 입원 직전에 산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당연하게도' 책장으로 직행했다. 그 책을 다시 들여다 본건 퇴원 이후였다. 역시 병원을 다니면서 책을 살짝 보는 식이었다. 이 책은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에서 만만찮은 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력은 소설 한 두개 정도와 자신의 포부 정도였다. 더더군다나 신춘문예나 유명잡지로 등단한 것도 아니라서, 나에게는 비웃음 거리로 충분했다(자기도 등단 못한 주제에).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그 생각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 선생님도 등단 제도의 '무용론(無用論)'을 펴신다. 글만 잘 쓰면 인정이 되는데 등단 작가 위주로 기회가 가게 되어서 등단 전용 스타일이 나온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다.

조두진님은 지금까지는 무명이었을지 모르지만 필력이 상당하다, 주제를 구현하는 힘도 있었다. 내가 가장 소름끼치게 봤던 장면은 바로 왜군이 도망치기 위해 병든 사람의 목을 베어서 적장에게 선물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병 걸린 사람, 즉 생활의 의에 좌절을 느끼고 괴로워 하기만 하는 사람에게 딱이라고 생각했다. 그 병든 상태로만 있으면, 다시 말해 이 생활에서 도피하고 싶기만 하고, 나는 이 생활에 적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들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들의 결과는 참혹한 죽음이다. 병든 사람(즉, 인생에 좌절하고 포기한 인생을 사는 사람)의 도피는 오직 죽음만을 부른다는 것, 그리고 그 뒤를 누구도 불쌍하게 여겨주지 않는다는 것으로 읽혔다. 그런 이후로, 나는 병에 걸려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가 병에 든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도모유키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다. 말도 통하지 않지만, 그녀를 살리고 싶은 일념으로. 그녀가 어디에선가 살아준다면 그는 기쁠 것이다. 이 작품은 단지 한 시대에만 묶이는 것이 아닌, 이 시대의 고민과 해결법을 모색하고 있는 책으로 여겨진다. 뒤의 작품인 '능소화'는 그에 비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아니, 이 책이 준 인상이 너무 큰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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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안을 걷다 시작시인선 62
김병호 지음 / 천년의시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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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대 시절의 은사님이다.

그분이 맨 처음 하시던 말씀은,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하셨다.

는 말이 제일 기억난다.

이 분의 시를 감히 재기보단,
먼저 선생님이 내 시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별것 아닌 내 시를 잘봐주셔서 이렇게나마 살아있노라고.

거의 학기가 끝날즈음 선생님이 수업을 위한 카페를 닫으면서
놀러가게 되면 홍제쪽에서 자주 계시다 하니 전화도 한번 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찾아가 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한번 뵙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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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서커스
천운영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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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다’와 ‘기분이 나쁘다’, 이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것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료하다. 오늘은 WBC를 봤다. 한국과 미국의 대결. 그 뒤에는 승자의 환호가 있겠지만, 패자의 침통도 있다. 이 세상은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밟혀야 한다. 밟힌다는 것은 당하는 사람에겐 수치이자, 괴로움이다. 그것이 다만 자발적인가, 아니면 강제적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오발탄이라는 소설을 보고 남몰래 훌쩍훌쩍 운적이 있다. 나도 그렇지는 않았을까. 이런 세상에, 이런 시대에 왜 태어났을까. 나는 왕따 1세대였다. 왕따가 공식 언어로 자리잡기도 이전에 나는 그런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필름에 빛이 들어갔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저지른, 이른바 ‘무심코 던진 돌’, 이른바 어린 나이의 실수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그 돌에 맞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질문 하나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돌에 맞았으니 돌에 안맞을 연구를 하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의 생을 실수 투성이라 해본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인간이기에 실수 한 번 하지 않고 살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런 실수는 보통 상처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서커스 단원의 실수는 완벽한 묘기보다 더 흥이 난다. 서커스를 보는 사람들은 실수를 염두에 두는 법이다. 서커스를 보는 것도 환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실수를 확인하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난이도가 높을수록 관중들이 열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6P)


인터넷에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후불제’ 결혼주선,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런 사진에 대한 댓글은 보통 “사람이 물건이냐?” 정도였다. 그러나 농촌출신이나, 결혼하기 아주 힘든 조건의 사람의 경우 그것이 차선의 수단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여기서 필리핀 등에서 온 이른바 ‘팔려온 신부’들을 피해자로 할 경우, 그들의 상대, 즉, 우리나라 사람은 무조건 가해자라 볼 수 있을까, 그들을 알선하는 중개업자들은? 막상 우리는 그것을 너무 먼 곳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앞에 놓고 보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이 소설의 중심은 중국동포와 장가가려고 여행 간 한국 사람의 이야기다. (우리 아랫집에도 중국동포가 살고 있다.) 이 소설의 작중인물은 모두 서커스와 그렇게 관련이 많은 사람들 같지는 않다. 제일 위험하고 피해자로 짐작되는 인물은 ‘해화’이다. 그는 이국땅으로 ‘돈’ 때문에 팔려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못할 일을 한다. 해화는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발해의 무덤을 보며 그곳에 대해 끌림을 느낀다. 이 무덤을 통해 작가는 해화의 심리를 설명하는데 쓰고 있다.


‘정효공주는 발해의 제3대왕 대흠무의 넷째딸로서…… 벽화인물 형상은 분을 바른 얼굴에 입술은 붉고 낯은 둥글며 머리에 복두를 쓰고 발에는 삼신을 신었는데 짙은 당조 시기의 회화 풍격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붉은 입술의 여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나 붉은 기운만 떠오를 뿐 명확히 잡히는 것은 없었다.(35P)

붉은 입술, 그것은 그녀가 시집갈 때의 이야기다. 붉은 기운이 떠오르는 것은 그의 막연한 기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이 무덤의 이미지는 몇 번씩 변화를 거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형수 될 사람, 그 서커스 하던 여자랑 닮은 것 같아. 작고 예쁘고,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18P)


이것은 단지 인물의 외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자는 서커스(이른바 희생)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에 적합하게 생겼다. 즉, 형을 만족시킬만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양은 위험한 흉기다. 장미의 가시는 날카로운 법이다. (시에서 보면, 묘사는 단지 묘사는 아니다. 거기에서 말하는 바가 따로 있으며, 앞으로 나가는 바를 말하기도 한다. ‘소나기’의 외양묘사가 그들의 앞날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듯.) 해화만 해도 그런데 나머지는 얼마나 복잡한 관계를 말하고 있을까, 형도 서커스를 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제일 큰 피해자가 바로 형이다. 해화는 그에 비하면 가해자 같기도 하다. 주민증 하나만 받으면 도망칠 수도 있다.(다만 그렇진 않은 것 같다) 나의 대화는 그녀의 외양을 통해 복선을 말해주고 있다.


형이 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람들 즐겁게 해줄 생각도 하지 말고, 바보처럼 당하지도 말고, 속 썩이지도 말고, 내가 언제까지나 형을 보살필 수는 없어. 그래, 정말 선녀 같잖아. 날개옷 같은 건 태워버려. 도망가지 못하게.(18P)


이렇게 독하게 사는 것이다. 악랄하고 우악하게 살면 그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지않아도 된다. 그런 반면에 있는 것이 바로 해화이다. 물론 잠시동안은 그에게 이른바 ‘서커스’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나지 않게 되었고, 자신마저 잊어야 했기 때문이다.


부쩍 숱이 적어진 듯한 머리칼. 이것은 내 얼굴이 아니다. 내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데 넌 누구지?

나는 거울 속에 대고 물었다. 거울 속 낯선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중략)……

가슴에 손을 올려놓았다. 따뜻했다. 내 몸은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육체였다. 묶이고 갇혀야 할 고깃덩어리가 아니었다.……(중략)……

나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며 이름을 불렀다.

“해화야!”

내 이름은 해화야. 림, 해, 화. 나는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119P)


여자로서 일생을 바쳐야 하는 나(해화), 그리고 형의 동생 나(해화가 아닌― 이 작품은 해화(1인칭 주인공)와 나(1인칭 관찰자)의 이중 시점이다.). 나는 남자로서 따이공의 생활을 배운다. 그의 길잡이인 상원은 이렇게 말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밟히기 전에 밟아야 한데이. 밟히기 전에……”(132P)


이것도 역시 서커스의 법칙이다. 서커스를 하지 않으려면 그 전에 서커스를 시켜야 한다. 그렇게 사는 인생은 엄청나게 지친다. 이것은 또 다른 서커스를 요구한다.


상원의 뒷모습을 보니 따이공들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배에 오르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리면 왜들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잔뜩 허기진 얼굴로 여자에게로 술집으로 안마방으로 달려가는지…… (151P)


배는 잠시 도피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피하지 않으면 결국은 여자에게로 떠나간다. 그들은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밀무역을 해야 한다. 이것 역시 하나의 희극이다.


그들은 더 많고 더 위험한 짐을 지면서 자유를 완성했다. 무게제한을 넘기고, 금지물품을 숨기는 것. 그것은 강도를 높여야만 효과를 얻는 약물처럼, 수위를 높여야만 얻을 수 있는것이었다. 강도를 더할수록 불안과 위험이 높아지고, 불안과 위험만큼의 자유를 얻었다. (151P)

  

형은 동생에 이어, 잠시 동안의 아내에게도 서커스를 하게 되는 제일 처참한 인물이다. 동생에게 보여주는 서커스는 자기 목숨이라고는 아랑곳도 않는다.


형은 새처럼 날아올랐다. 비상은 잠시였다. 형은 땅바닥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그것은 형이 보여준 최고의 서커스였다. 혀를 빼물고 전선에 휘감긴 채 누운 형은 우스꽝스러웠다. 나는 그것이 형이 꾸민 묘기인 줄만 알고 폴짝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형은 목숨을 건진 대신 목소리를 잃었다. 형은 목소리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나쁜 생각을 목소리와 함께 버린 것 같았다.(46P)


원래 그에게 목소리(자기를 위한 행동)가 있었는가? 목소리가 있었다면 서커스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소리는 그에게 원래 없었다. 이미 그는 서커스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원인이 결과를 만든 것이다. 이미 내적으로는 그것이 완성되어있던 것이다. 다만 없어진 목소리의 결과로 그가 그렇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해화에게 강요되고 있었다.


나그네 손에 들린 검은 전선. 나는 아연하여 검은 전선만 바라보았다. 나그네는 내 손목에 전선을 칭칭 감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전선을 너무 세게 당겨 손목이 욱신거렸다. 나그네는 제 손목과 내 손목을 단단히 묶고 뒤로 벌렁 누웠다. 나는 전선에 손을 얽매인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113~114P)


‘전선’이라는 물건은 이 소설 전체에서 괴로움의 상징으로 쓰인다. 동생을 기뻐하게 하기 위해 쓰였던 이 전선은 다시 해화를 속박하는 도구가 된다. 형의 불안감도 한 몫을 했겠지만, 이 전선은 해화에게 무거운 짐으로 쓰이게 된다. 지금까지의 해화가 자유로운 해화였다면, 이것은 무거운 짐을 지고 서커스를 하고 있었던, 그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말하는 걸게다.

나(남자)는 우연히 발해왕조의 무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여기서 무덤의 이야기를 듣는다.


“정효공주 무덤 말임까?”

“누군지는 모르겠고, 암튼 무덤이었어요. 뭐 조잡하게 그림도 그려놓고 관도 만들어놓고 그랬는데,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모형일 뿐이었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든. 박물관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엉성한 밀납인형에 옷이나 입혀놓고.”(158P)

그래요, 중국이 아니었죠. 그런데 말예요. 거기 벽화는 말예요. 아무리 봐도 고구려 사람들 같지가 않아요. 당나라 옷을 입고 당나라 머리를 하고 있거든요. 난 아직 확신할 수가 없어요. 발해에 대해서.”(159P)


이 무덤은 모형이 있다는 것이다. 해화는 눈 앞에 팻말을 보고 막연한 상상을 하고 떠오르는 것을 남기지만, 남자들이 들여다보고 온 것은 별것 아닌, 구색을 갖추기 위한 모형일 뿐이다. 남자들의 여자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을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 형체도 없고 제대로 된 것이라고는 없는 것 같은, 안개 같은. 하지만 여자는 생각이 약간 다르다. 237페이지의 서술을 보노라면 무덤에 대한 그녀의 상상은 너무나 기대에 차있다.

그러나 하혈을 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룬 것 하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다. 자신이 품은 욕심은 많았으나 욕심은 이루지 못했던, 남자의 아픔이 자신에게 전가되는 것을 참고 집에라도 남아있었으면 주민등록증이나마 받아 챙겼을 것을, 그러지도 못하고 여관 일을 하다 내쫓기고 제대로 한 것도 없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삶에 대한 한탄이 형상화된다.


그것은 어쩌면 내 속에서 잠시 살다 간 나그네의 분신인줄도 몰랐다. 아니면 한국에서의 행복한 생활을 꿈꾸었던 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몰랐다. 정신이 혼몽해져갔다.(195P)

당금 사라진 그 붉은 피는 아무것도 아니다. 차올랐다가 이지러지는 달 같은 것이다. 아무 생명도 품지 못해 제 몸을 허무는 쓸모없는 핏덩이에 불과하다. 나는 욕실에서 이불 위로 기어가며 끊임없이 되뇌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195P)

  

그녀에게 삶에 대한 욕심은 모두 떠내려간다. 작가는 속박을 긍정하지 않는다. 여자가 만난 여자는 “생식력까지 통제당하는 국가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230P)고 했을까. 그러나 여자에겐, 아니 사람에겐 회귀본능이 있다.


“그래도 말이다. 죽을 때가 되면 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당이고 민족이고 조국이고가 다 뭐냐. 나고 자란 곳이 고향 아니겠니.”(230P)


힘들게 살아도 생은 생이다. 회귀본능, 남자의 형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속박할 그 여자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가다가 바다의 안개가 나와 형을 덮는다. 작가는 이런 서커스에 대해서 모든 것을 “덮음”으로 말한다. 모두가 제자리에 오게 되는 것이다. 안개 같은 그녀는 안개 속에서 재회하게 될 것이다.


형은 두 팔을 뻗고 전사처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어쩌면 형은 저 속에서 여자를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저 멀리 뗏목을 탄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주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고 있는 중이리라. 나는 모두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잘 가라, 어디든지, 잘 가라.(248P)


이제 보니, 「바다와 나비」와 비슷한 소재이다. 『잘가라, 서커스』는 삶의 슬픔과 죽음에 이르는 기록이다. 사실 첫 부분의 내용이 이 ‘서커스’라는 것의 비유적 의미에 초점을 맞춰보면 이 제목이 말하는 바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란 것을 한 개의 이야기로 가볍게 보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 나는 김연수 소설가가 말했듯, “목숨을 걸고”읽기 위해 노력해보고자 한다. (물론 빠르고 깊게 읽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소설의 정의를 모두 적는다.

“소설은 한 주제와 한 사상을 그려내기 위해 어떤 사상을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 펼쳐놓고 연결고리 하나를 놓은 다음 끝까지 반복되는 일관되게 깔려있는 주제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를 가지고 돌지 않는다. 보통 사랑이라는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무척 힘들다. 잠언식의 짧은 말 한 마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말이 필요하거나 거의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역시 생각이 무척 많던가, 거의 없던가, 그것도 아니면 불변의 진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증명하겠는가? 그것을 길게 늘여, 아니, 독자들이 보는 현실로 만들어 와 닿게 증명하는 사람이 소설가다. 철학자가 이론을 아무리 써놓아도, 실생활에서 증명하지 못하면 공론(空論)이 되는 것이다. 이래서 작가가 화자를 통해 어떤 말을 한 다음에는 보통 작중 인물을 통해 화자의 말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다’라는 주제를 가진 소설이라면 그 뒤에 따라붙는 여러 말이 있다. 작품의 내용을 통해 단지 한 질문만 던지고 끝난다면, 그것이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면 깊이 있는 서술이라고 보기는 조금 힘들 것이다. 시인은 모든 말을 직선적으로 툭 던지지 않는다. 비슷한 말을 한 후, 주제라는 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그런 후, 문을 열기 위해 문이 어떤 문인지를 파악한다. (왜 시인일까? 요즘 소설은 詩적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뭐가 있을까를 짐작하고, 문을 열기 위해 노력한다. 그 다음에 조금씩 문을 연다. 그러나 활짝 여는 경우는 드물다. 요즘 소설은 이렇게 조심스럽다.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본다. 덤으로 붙여서, 배경묘사 역시 식사(소설)에서의 반찬이다. 밥이 아무리 좋아도 반찬이 안 좋으면 그것이 밥맛을 망친다. 배경묘사를 시시껄렁하게 볼 수는 없다. (사실 나는 왜 주제를 눈에 띄게 그렇게 배경까지 꽃단장을 해놓는 것일까,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마디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줄거리를 알면 다 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소설은   한 문장을 읽고 느끼는 것이지 줄거리를 좔좔 왼다고 장땡이 아니라고, 그 곳에서 해화와 형과 나를 만났으면 되었다고, 나와 비슷한 그를 발견하고 공감하면 되었다고, 다만, 그의 슬픔에 갇혀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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