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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초콜릿
미리암 프레슬러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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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바는 열다섯 살의 독일 여학생이다. 열다섯이란 나이에서 전해지는 감수성은 날카롭고 불안하다. 심기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질풍노도의 시기, 이른바 사춘기다.

에바는 자기 나이보다 네 배가 넘는 몸무게 때문에 고민이다. 실질적인 고민은 몸무게보다 겉으로 보이는 뚱뚱함이다. 뚱뚱함은 에바를 어두운 구석으로 내몬다. 그리고 홀로 버거운 몸무게가 짓누르는 세계와 비곗살 같은 담을 쌓는다.

첫째로 태어난 에바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사랑을 빼앗기면서 처음 절망을 경험한다. 사랑을 빼앗긴 에바는 남동생보다 아빠가 더 원망스럽다. 하루아침에 매몰차게 사랑을 빼앗아 간데 대한 일종의 배신감이다.

그 빈자리를 엄마는 고단백, 고칼로리 간식으로 채운다. 사랑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허기로 느낀 에바는 끊임없이 먹었다. 어느 날, 뚱뚱해진 자신을 사람들이 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에바는 또 한번 허기를 느낀다. 밤이면 냉장고를 뒤져 버터를 듬뿍 바른 토스트와 연어, 초콜릿을 배가 차도록 먹고 잠들기 일쑤.

초콜릿은 쓰고 떨떠름한 맛이지만 이미 에바는 거대한 하나의 입 일뿐, 맛을 따질 겨를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길가에서 우연한 부닥침으로 인해 미헬이라는 남자친구를 만난다. 미헬은 가난한 직업학교 학생이지만 에바를 진심으로 대해주고 그녀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해준다.

미헬은 에바에게 난생처음 디스코텍이란 곳에서 세상을 향한 몸짓 언어를 풀게 했고 그녀는 아주 서서히 자신을 찾아간다. 미헬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에바에게 학교 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제 에바는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에바에게 초콜릿은 더 이상 씁쓸하지 않다. 에바는 더 이상 거대한 입이 아니다. 에바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됐고 그동안 스스로 움츠렸던 것이 혼자만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린 것을 깨달았다.

<씁쓸한 초콜릿>은 흔히 말하는 성장 소설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열다섯 살 여학생이 뚱뚱한 외모에 스스로 위축되어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다가 현실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담백하게 담고 있다.

원작자 미리암 프레슬리는 제2의 루이제 린저로 평가받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인 청소년 문학작가다. 이 책은 1980년 올덴브루크 청소년도서상을 수상한 그녀의 대표작이다. 프레슬리는 격하지 않고 차분하게 한 여자 아이의 일상을 쫓으면서 ‘성장’과 ‘성징’을 잘 짜여진 병풍처럼 펼치고 있다(옮긴이의 감각도 큰 몫을 했다).

몸무게로 인한 비관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는 그녀의 시선은 가부장적인 제도를 관통하면서 자칫 비뚤어 질 법도 한 에바를 어엿한 숙녀로 성장시키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인식한 에바의 입을 빌려 프레슬리는 말한다.

‘뚱뚱한 가슴과 뚱뚱한 배, 뚱뚱한 다리를 가진 뚱뚱한 소녀가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 소녀는 못생겨 보이지 않았다. 약간 눈에 띄긴 하지만, 그렇긴 하지만 못생기진 않았다. 에바는 뚱뚱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뚱뚱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도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었다. 대체 아름답다는 건 무엇일까? 패션잡지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생긴 여자들만이 아름다운 것일까?’

책의 마지막에 나오는 에바의 가벼운 웃음이 유쾌하다. 자신이 여름날 같아 보인다는 에바. 여름엔 옷을 가볍게 입는다. 그녀는 그만큼 가벼워 진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인지는 에바만이 알 것이지만.

‘옛 거장들의 그림 속에 나오는 통통하고 풍만하고, 살찐 여인들을 생각하자 에바는 웃음이 나왔다. 에바는 웃었다. 거울 속의 소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내가 여름날 같아 보여. 내가 여름날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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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꼭 해야 할 34가지
김옥림 지음 / 미래문화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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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 김옥림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듯하다. 그동안 저자의 저서가 끊임없이 관통하고 있는 단어는 ‘가족’과 ‘행복’이다. 이번 책 역시 가정, 직장, 사회에서 여성이 역할을 다하기 위해 쌓아야 할 소양을 모은 것이다.
 
하필 왜 서른네 가지만 골랐을까 궁금해진다. 저자에게 물어보지 못한 이상 상상에 의존 할 수밖에. 아마도 만혼이 유행인 요즘 세태를 반영한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서른네 살까지는 책에 있는 소양을 익혀서 결혼에 성공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책은 대단히 평범하다. 특별히 평을 할 내용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흔히 듣던 이야기를 모아서 엮은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듯 흔하지만 한 곳에 모아서 세상이 ‘효측’할 수 있도록 엮은 저자의 노고가 아름답다.

이 책은 제목만 봐도 내용이 읽힌다. <한 가지 기술은 반드시 익혀라>, <멋진 연애 꼭 해보기>, <적극적인 섹스를 즐겨라>, <자신을 항상 가꾸는 여자가 돼라> 등 평범한 제목에 내용 또한 평이하다. 그래서 부담 없이 읽힌다. 가볍게 읽고 깊게 생각하라는 저자의 숨은 주문이 숨겨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많은 사례를 인용해 우화적인 교훈을 던진다. 한 여성이 중장비기술을 배우려고 나서자 남편이 말린다. 남편 역시 중장비기술자여서 힘들고 어려움을 알기에 부인의 호기심을 애써 외면한다. 그러다가 부인의 열성에 못 이겨 남편은 훌륭한 선생님 역할을 한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이 사고로 죽는다. 부인은 중장비 기술로 남편이 이끌었던 가정을 손색없이 꾸려나간다.

이러한 우화적 교훈은 글쓴이의 생각만으로 엮은 내용보다 다가서는 감동이 더하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는 것이다. 책은 평이하지만 가끔 카타르시스를 전한다. 그러나 짠하지는 않다. 그래서 가볍다.

책을 읽다보면 사이사이에서 아름다운 수채화를 만날 수 있다. 한 면을 모두 차지하는 제법 커다란 삽화다. 꽃, 연인, 풍경 등을 밝고 예쁜 색감으로 담았다. 책을 읽다가 그림 감상을 하면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일종의 ‘팁’이다. 그림은 어쩌면 아련한 옛날로 독자를 되돌려 놓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 몫이지만.

“이 책에는 영원한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이 세상 모든 여성들을 위한 아름답고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지혜로운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는 저자의 말대로 책 내용을 따르면 분명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저자는 여자가 ‘꼭’ 해야 할 다양한 경구를 담았지만 책을 ‘꼭’ 읽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상식’의 범위 내에서 생활하고 자기계발에 힘쓰는 여성이라면 이미 책이 요구하는 여성상을 능가하고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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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할 만 하세요? - 새로운 의료패러다임을 꿈꾸는 '의사 CEO' 장동익
장동익 지음 / GMD북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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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익은 소위 잘나가는 의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15년간 개원의 매출, 의료보험청구 건수, 환자 수에서 언제나 전국 수위를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다른 의사들이 언뜻 들으면 조롱하는 듯한 “의사 할 만 하냐”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이유는 뭘까.

▲ 책 표지
ⓒ GMDBOOK
그는 책머리에 이 책이 자선전이 아닌 걸어온 길에 대한 반성이자 새롭게 지게 될 십자가를 준비하는 마음가짐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새롭게 지게 될 십자가는 다름 아닌 7만여 명의 의사를 이끄는 수장인 대한의사협회 회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가 십자가를 질게 될 지는 오는 3월18일 판가름 난다. 그는 8명의 후보 중 한명으로 의협회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의사 할 만 하냐는 질문도 여기에 연유한다. 이런 이유로 책은 읽어 내려가기 다소 껄끄럽다. 의사는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만 마치 정치인이 출마를 앞두고 출판기념회를 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서두는 어릴 적 회고와 의사의 길에 접어들면서 생긴 에피소드, 그리고 그의 병원인 영림내과의 성공담이 놀랄만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1985년 개원한 그의 병원에는 지금껏 160만 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한다. 이를 휴일 없이 일수로 나누면 일일 170명이 내원했다는 계산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많은 날은 하루에 600명의 환자를 진찰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림내과의 성공담에 이어 책은 중간부분부터 갑자기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한다. 한의사, 간호사, 약사 등 소위 패러메디칼(유사의학) 분야 전문직과의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십자포화를 퍼붓는다. 한마디로 의사의 영역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다. 의사는 머리고 타 직능은 팔, 다리 쯤 되니 각자의 맡은 기능에만 충실 하라는 것이다.

그는 특히 한의학에 대해 상당한 불신과 적개심을 쏟아내고 있다. 한의학은 <동의보감>에 매몰된 비과학적 학문이라는 지적과 함께 한약은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이라는 자극적 단어까지 동원하고 있다. 약사들도 그에게는 의약분업의 파트너가 아니라 언제 의사의 영역을 파고들어 올지 모르는 위험한 집단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인 의사협회에도 일갈한다. 의약분업 당시 회원들이 믿고 위임한 권리를 집행부가 잘못 대처해 대국민 신뢰와 명예를 모두 잃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의협의 강력한 역할과 위상론을 들고 나왔다. 이는 책을 출간한 이유이기도 하다.

의협회장 선거는 오는 28일부터 7만1833명의 의사 중 투표권이 있는 3만4967명이 3월17일까지 18일간 우편투표를 하게 된다. 저자를 비롯해 모두 8명의 내로라하는 후보들이 출사표를 던진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 치열할 전망이다.

출사표를 한권의 책으로 엮을 만큼 의료계 현실에 대해 할말이 많은 그가 의료계의 수장이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의사, 약사, 간호사를 국민보건향상을 위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너그러운 눈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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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NO.5가 뇌에 이르기까지 - 신기한 사람 몸속 탐험 여행
루돌프 E. 랑 지음, 도복선 옮김 / 이손(구 아세아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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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표지.
ⓒ 이손
독일 의대교수의 신기한 사람 몸속 탐험 여행 이야기라. 썩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독일이라면 각종 세계대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인간의 '몸'을 알아내기 위해 몹쓸 짓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 나라가 아닌가.

때문에 생리학 분야가 상당히 발달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곳에서 병리학자가 인간 몸에 대한 책을 냈다? 그것만으로도 탐험 욕구를 자극하기 충분한 조건이다.

그러나 책은 탐험에 나선 독자에게 출발부터 어정쩡하고 불친절한 안내를 시작한다. 우리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가는 여행은 고등학교 4학년용 생물교과서 수준이다.

상당 부분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거나 인터넷을 뒤지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에다가 때로는 의학용어 상식 없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친절까지.

책은 미각기관인 혀로부터 여행을 시작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이 우리 몸 각 부위에 미치는 영향, 목마름, 홍조, 배고픔, 소름, 간지럼, 웃음 등의 기전을 설명하면서 목적지인 항문을 향한다. 담배 식물이 해충을 없애기 위해 분비하는 니코틴에 대한 설명 중 일부분 등은 전문 용어의 나열로 여행을 방해한다.

'게다가 니코틴이나 아세틸콜린은 VTA-신경세포의 아세틸콜린 수용체에 달라붙어 세포막 전위를 떨어트리면서 도파민계 VTA-신경세포에서 벌어지는 글루탐산의 효과를 더욱 키워준다. 이런 공동작용으로 도파민계 VTA-신경세포들의 탈분극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측중격핵과 전전두엽 속에서 도파민이 쏟아지게 된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생리학적 현상을 평이하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 역시 이 부분을 염두해서 '의학이나 생물학 지식이 있는 독자를 상대로 쓴 것이 아니라 생리학적 연장상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일반인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친절한 필자의 설명이 어정쩡한 독자층을 만든다.

여행을 하다보면 출발이 썩 기분 좋지 않더라도 중간 중간 눈요기가 있기 마련이다. 책은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신체 특성 몇 가지를 제공한다.

보조개는 흔히 볼에만 생기는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등에도 생긴다. 허리 쪽 등뼈의 움푹 파인 곳이 바로 보조개다. 이 보조개가 비대칭인 여성은 골반이상으로 출산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

모기가 담배를 좋아하는 이유는 니코틴과 결합하는 수용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거나 보톡스는 주름진 피부를 펴서 삶의 질을 높이는 양약(良藥)이지만 원균인 클로스트리듐 보툴리눔은 강력한 생화학 무기 목록의 맨 위를 차지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체는 우주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간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체 신비를 한 꺼풀씩 벗겨내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그동안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생리학적 분야의 궁금증을 일부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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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정복한 동굴생물의 세계
최용근 지음 / 보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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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림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절대 암흑의 공간. 시간이 멈췄다가 석순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의 굉음에 화들짝 놀라 제 갈 길을 가는 곳. 바로 동굴이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영구암대는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감각을 무력화시킨다. 어둠의 심연과도 같은 이곳에도 과연 생물이 살고 있을까.

안전모에 매달린 헤드랜턴을 켜자 세숫대야만한 물웅덩이에서 무엇인가가 재빠르게 움직인다. 새우다. 신기하다. 이런 곳에서도 새우가 살다니. 이름을 알고 나니 녀석의 터전임을 알 수 있다. 장님굴새우란다. 빛 한줄기 들지 않는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살다보니 불필요한 눈은 퇴행진화로 사라졌고 몸의 색소가 없어서 반투명의 흰색이다.

눈이 없어 뵈는 것도 없는 것일까. 이 녀석은 먹성이 좋고 난폭하기로 동굴세계에서 유명하다. 장님굴새우가 사는 물가는 다른 생물들이 범접을 금한다니 어쩌면 어둠 세계의 '왕따' 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음습한 곳에 사는 동물들의 세계는 누구에 의해 알려지는 것일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찐득거리는 곳.

저자 최용근도 처음부터 동굴생물에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산을 좋아했던 저자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를 찾았지만 마침 문이 잠겨있어서 옆방에 있는 동굴탐험연구회를 들어간 것이 동굴과의 첫 인연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 동굴과는 이별할 줄 알았는데, 원로 동굴연구가인 남궁준 선생이 후계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 12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다시 '어둠의 세계'에 발을 딛은 것이 오늘에 이른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동굴관련 책으로 <동굴측량> 이후 5년 만에 선보인 것으로써 어둠 속에 사는 동물(제목은 생물이라고 했지만 주로 동물만 등장한다)들을 밝은 세계에 소개한 것이다. 문헌에 의한 것이 아닌 저자가 직접 발로 뛰며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그들의 생태를 조명한 것이라서 책에서 진한 땀 냄새가 난다.

일제 강점기인 1918년 평안남도 강동에 있는 청계동 동굴에서 발견된 낯선 벌레 한 마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생물로 기록된다. 일본인에 의해 발견된 이 벌레는 지네처럼 생겼으나 흰색을 띠고 있어 전문가에게 넘겨졌지만 무슨 종(種)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20년이 지난 1938년에야 독일 생물학자 베르호프에 의해 새로운 종으로 밝혀지고 '안트로코리아나 그라킬리페스'라는 학명으로 탄생했다. 우리말로 '한국동굴의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벌레'라는 뜻이다.

▲ 넉넉한 활자, 풍부한 사진자료, 시원한 편집으로 쉽게 읽힌다.
ⓒ 보림
이후 1930년에 두 번째 동굴생물인 등줄노래기가 발견되고 1960년대부터 동굴생물에 대한 탐사와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70만 종이 넘는 생물들이 동굴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도 계속 새로운 종이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600여 종이 발견됐다. 세계 수준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저자는 이를 동굴연구가 늦었고 연구자도 극히 적은 데서 이유를 찾는다.

동굴생물 연구가 시작된 지 50여 년이 흘렀지만 그동안 이를 위해 동굴을 탐사한 연구자는 5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현재 동굴생물 연구자는 손가락으로 꼽고 남을 정도라고 한다. 자신이 직장을 버리고 남궁준 선생 문하로 들어간 격세지감을 느낄만하다.

책은 슬로베니아 한 마을에서 용의 새끼처럼 생긴 '프로테우스 앙구이누스'가 발견되면서부터 눈을 뜬 동굴생물 연구역사를 시작으로 동굴생물의 집인 동굴의 생성과 구조, 우리나라 동굴생물의 세계를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넉넉한 활자크기에 방대한 칼라화보, 그리고 스승인 남궁준 선생의 일화 소개는 그에 대한 '헌정'으로 읽힘으로써 어둠 속에서 인간미를 물씬 풍기게 한다. 내용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부담 없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어렵지 않고 유익하다.

저자는 본문 사이사이에서 우리나라 동굴생물 연구에 맥이 끊어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험로와 어둠만이 반기는 동굴은 분명 3D 연구 분야이기 때문에 젊은 연구자의 '수혈'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저자의 동굴, 동굴생물들에 대한 열정과 남다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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