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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 - 빛바랜 물건으로 추적한 한국근현대사
박건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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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로 미시 서지학의 새장을 연 박건호 작가가 후속작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로 다시 찾아왔다. 지난 1월 말 출간된 새 책은 연작의 성격을 띠나 전편보다 분석의 깊이와 역사 추적의 눈초리가 깊고 날카롭다. 책 중 직업이 컬렉터에서 탐정으로 바뀐 이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니 그래서 출판사서 책 제목을 그렇게 정한 듯하다.

저자 말로는 반나절이면 뚝딱 읽힌단다. 그렇게 믿고 책을 들었는데 솔직히 쉽게 읽히진 않는다. 이유는 역사를 들여다보는 폭과 심도가 넓고 깊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서사라고 할 수 있는 데, 역사적 사실이나 개연성에 대해 표현 양식이나 접근 방식이 전편보다 확실히 분석적이고 설득력 있다. 이는 한마디로 읽는 재미로 이어진다.

‘빛바랜 물건으로 추적하는 한국 근현대사’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낡은 사진이나 엽서, 문서 같은 서지류에서 단서를 찾아 역사를 거슬러 추적한다. 이런 물품들은 대부분 국내외 경매를 통해 구입한다. 일부는 주위 지인들을 통해 입수되는 경우도 있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서지류는 저자가 소장하고 있다. 종이 한 장에 몇 천원짜리 부터 몇 백만 원짜리 까지 가치가 다양하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의 무게는 같다. 이것이 저자의 역사에 대한 가치 부여 태도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단순히 개인적 기호 때문에 역사를 추적하진 않는다. ‘영월군수 강봉원 늑탈민장기’(이하 늑탈민장기)는 영월군에서 저자가 발굴한 조선시대 관료에 의한 민중 수탈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이는 그간 우리가 배워왔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보다 어쩌면 더 악랄하고 후안무치하다. 물론 조병갑의 경우 동학혁명의 불씨가 됐다는 점에서 역사에 기록됐지만 강봉원의 수탈은 정확한 기록에 의해서 이번에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박 작가가 2008년 4월 이 기록물을 입수하고 이번 책에 실을 때까지 여정을 잠시 살펴보면서 그의 역사탐구 방법을 들여다보자. 코베이옥션에 늑탈민장기가 경매로 올라왔을 때 심정을 물었더니 “이것 봐라?! 참 흥미로운 자료군!”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록물 내용을 못 봤기 때문에 단순 호기심으로 출발했다. 그래도 그간에 쌓인 내공과 촉이 있었다.

늑탈민장기를 손에 넣은 박 작가는 찬찬히 표지부터 분석해 나갔다. 표지는 세로 한자로 ‘광무구년갑진시월십육일 영월군수강봉원늑탈민장기’라 쓰여있다. 내용을 얼핏 들여다보니 위에서부터 리(里) 단위 마을 이름, 금액, 이름, 수탈당한 금액과 이유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박 작가는 문서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강봉원이 실존인물인지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서 찾았다. 그 결과 승정원일기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했고 1904년경 영월군수 재직 사실이 확인됐다.


기록물 표지의 ‘광무구년갑진’이 잘못된 것까지 밝혀냈다. 갑진년은 광무8년(1904)이고 광무9년은 강봉원이 영월을 떠나 중추관 의관(議官)에 제수된 1905년이다. 박 작가는 “광무8년 갑진년 음력 10월16일은 양력으로 1904년 11월22일이다. 따라서 이 장부는 강봉원이 영월군수 임기를 마치기 대략 두 달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모함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관련 기록을 더 뒤졌고 1900년대 초반에 지역 군수들의 치적평을 실은 신문기사를 발견했다. ‘황성신문’에 따르면 강봉원은 1904년 부임 초기는 긍정적인 평이었다가 1905년 마지막 평가는 전국 유일의 ‘하’ 평가를 받았다. 당시 ‘중’ 평가만 받아도 왕에게 보고가 되는 시절이라서 ‘하’를 받은 강봉원의 수탈 만행은 결코 조작이 아니라는 간접 증거인 셈이다.

수탈 명목을 보면 집요하고 악랄했다. 불효, 불화한다고 세금을 징수했고 매관매직은 다반사였다. 음행과 잡기(놀음), 승려의 정사와 중이 흰쌀밥 먹은 것도 죄를 물어 돈을 뜯었다. 외손자가 손자 대신 제사를 모신 것도 벌했고 곰 사냥으로 마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이 아닌 마을단위에서 수탈을 했다. 산에서 죽은 노루 사체에서 먹을 것을 취하고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잡아 비치면서 수염 몇 가닥 뽑았다고 벌금을 부과했다. 이현령비현령 무고하게 수탈한 사례를 보면 가히 조병갑의 뺨을 때리고 남을 형국이다.

코미디 같은 수탈 사례도 있다. 한글로 쓴 축문을 읽었다는 이유, 30세 된 소년(?)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장수첩을 팔았다는 이유, 물고기를 잘 잡는 이들에게 ‘토끼전’에 나오는 원참군과 별주부를 잡아 오라는 명을 받들지 못한 이유 등으로 반강제로 돈을 뜯어갔다. 우화 속 주인공을 잡아오란 명은 아마도 현생의 남생이와 자라를 잡아다 바치란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작가와 달리 추측해 본다.

박 작가는 마지막으로 강봉원의 송덕비를 추적했다. 그의 행실로 보아 송덕비는 만무한 일이지만 선정 유무에 관계없이 당시 관행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마음과 관련 역사 추적의 마무리를 위해서다. 그 결과 송덕비는 없었고 창절서원에서 흔적을 발견했다. 창절서원은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서원으로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죽임을 당한 사육신과 절개를 지키던 생육신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04년 이른 봄 제사를 위해 창절서원을 찾은 강봉원은 영월의 자연을 찬양하고 임금에게 감사하는 한시 한 수를 지었다. 그 시가 판각되어 창절서원에 걸려있다. 박 작가는 현장을 방문해 이를 직접 확인하면서 기나긴 역사 추적을 매조지하고 강봉원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기록의 힘으로 ‘응징’했다.

이 밖에도 이번 책에는 크리스마스 실(seal)과 관련한 눈물겨운 푸른 눈의 외국인들의 한국 사랑과 헌신이 담겨 있다. 박 작가는 이를 위해 수백만 원을 호가하던 크리스마스 실을 손에 넣으려고 거금을 투자했고 마침내 감동적인 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책 출간과 관련 11일 열린 문화지평의 문지인문아카데미 북토크에서 수집 철학에 대해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는 마음으로 역사의 기록물을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100% 확실한 논증보다는 추리와 상상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개연성을 살피는 형식으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역사 추적은 묘하게 독자를 동참시키는 매력이 있다. 필자도 몇 번 그가 보내 준 사진과 유인물 등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의견을 주고받은 기억이 있고 몸빼와 관련해서는 알만한 분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또 이번 책에 실린 창씨개명과 관련해서는 ‘옥천신문’ 황민호 기자와도 인연이 닿았다. 이렇듯 그의 추리 여정에는 역사를 사랑하는 수많은 독자들이 함께 한다.


그는 오늘도 옥션을 들락거리며 저녁이면 책상 앞에서 묻힐 뻔한 소중한 역사의 한 조각을 파내기 위해 조심스레 붓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마치 그가 서울대 국사학과 1학년 답사 때 우연히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웠을 때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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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카르마
정영희 지음 / 북인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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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 세 번째 산문집…섬세한 언어로 사변(思辨) 제시


중견 여류 소설가이면서 완성도 높은 지성 에세이를 선보이고 있는 정영희 작가가 세 번째 수필집 ‘굿모닝, 카르마’를 출간했다. ‘석복수행 중입니다’, ‘콤플렉스 사용설명서’에 이은 연작 형식의 작품이다. 앞선 수필집과 마찬가지로 찰나(刹那)로 스칠 수 있는 일상을 불러 세워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을 특유의 섬세한 언어로 되짚고 있다.


정 작가는 스스로 ‘가톨릭계 부디스트’라 칭할 정도로 생각은 탈 종교적이면서도 글은 종교적, 철학적 사유를 묵직하게 담고 있다. 특히 삶에 있어서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작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경험의 오류를 줄이는 사변(思辨)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이 수필집의 매력이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불환’(不環)을 말한다. 욕망이 존재하는 세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부연했다.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다. 3초마다 번뇌에 멱살 잡히는 마음을 끄고, 적멸의 강에 이르러야 가능하리라. 눈먼 거북이가 백 년에 한 번 물 위로 올라와, 떠다니는 관자에 머리가 끼일 확률보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더 어렵다는데, 이 귀하고 귀한 생을 탕진하고 있다니. 아, 난 얼마나 더 억겁의 생을 태어나고 태어나서, 이 카르마(karma) 다 갚은 공덕으로 그 강에 닿을까.”


작가의 말 제목조차 ‘마침내 평화롭고 조용하기를’이다. 매화꽃 떨어진 자리에서 썼다는 서문은 ‘간신히, 외롭지도 않고 간신히, 부럽지도 않고 간신히 평화롭고 자유롭다’고 시작했다. 몇 개의 문장 속에 작가가 정서적 ‘해탈’로 성큼 다가선 것을 느낀다. 이면에는 수많은 번민의 날을 보냈다는 것이 읽힌다. 작가의 말 전체가 한 편의 운문이다. 산문을 여는 운문의 함축이 다음 장을 넘기게 하는 힘이다.


두 번째 산문집 ‘콤플렉스 사용설명서’에서 작가는 ‘내 말의 무기는 문장이며 내 말의 방패 또한 문장이다. 이쪽과 저쪽을 강요하는 삶과의 투쟁으로 상처투성이인 내 영혼을 지켜주는 창과 방패, 내 속의 문장에게 무릎 꿇어 인사한다, 고맙다고. 오래 걸어온 나는 아직도, 이렇게, 문장으로 내 운명과 조금씩 화해하며 살아내고 있다.’고 문장과 화해했다면 이번 산문집에서는 마침내 ‘내 안의 나’를 만나고 있다.


정 작가는 20년 가까이 명리학 연구를 하면서 상담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글 속에서 생활 역학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이번 산문집에도 사주팔자 고치는 법, 신생아 작명의 숭고함 등 명리학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산문집 세 권을 놓고 보면 그의 글쓰기가 공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음을 느낀다. 글쓰기는 생각의 표현이므로 그의 철학과 사고 역시 많은 변화가 감지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황혼이 돼야 철이 나는 자신의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많이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필자와의 인연도 한 꼭지 담겼다. 경남 통영 통제영 12공방에서 나전칠기 체험 때 만든 젓가락을 SNS에 올렸더니 정 작가는 ‘필우 선생’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남겼다. 갑자기 호가 부르고 싶어 졌다고 했다. 필우(苾旴)는 정 작가가 지어준 호이기에 친숙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필자의 잔재주를 칭찬하면서 이쪽 길(나전공예)로 강추한다는 농반진반 글을 이어갔다.


갑자기 정 작가의 호가 궁금해졌다. 남들에게 호를 지어 줄 정도면 분명 작가 본인도 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작가는 ‘남의 호는 많이 지어주면서 정작 나는 호가 없다. 호를 가진다는 게 어찌 사치스런 혹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깔려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다만 사주 간명지나 작명증에 두인으로 사용하는 호는 있다고 밝혔다.


그가 쓰고 있는 호는 가현이다. 서예와 서각을 하는 지인 전시회에 갔다가 만난 어느 교수가 볼 때마다 아름다워진다면 아름다울 가(佳) 자를 줬고 그러자 옆에 있는 서예가가 늘 현재가 아름답다며 현재 현(現) 자를 줘서 만들어진 호다. 십여 년을 두인으로 썼지만 누구에게도 기원(起源)을 말하지 않았다. 이류는 늘 매화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매산리로 이사를 했고 어느 순간 ‘매은’(梅隱)이란 단어가 머릿속에 싹트고 있었다.


정 작가는 야심한 밤 요가 가부좌를 튼 채 초은, 다은, 매은 등 어떤 것을 호로 사용할까 고민하는 자신을 보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고 했다. 초은은 예쁘긴 하지만 풀 뒤에 사람이 숨는 건 아닌 듯해서 매화꽃 떨어진 자리에 은거한다는 의미를 담은 매은으로 정하고 필자에게 답글을 달았다.


‘현재는 가현을 쓰고 있지만 노년에는 매은을 쓸까 합니다.’ 그는 적요한 밤, 가부좌 틀고 요가를 하며 들숨, 날숨에는 관심도 없이 숯불 위 고기 뒤집듯 혼자 호를 되작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필우 선생, 제 호는 ’매은‘입니다,’라고 글을 맺었다. 정 작가는 노년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그의 글은 여전히 명징(明澄)하고 설득력이 있다. 소설 필력이 산문과 만나 명리학적 글쓰기가 가미되면서 우리 삶을 웅숭깊게 통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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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작가는 대구 생으로 영남대 미대와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 ‘시문학’에 단편소설 ‘아내에게 들킨 생’을 발표했고 1986년 중편 ‘무무당의 새’로 동서문학상 신인상을 받고 등단했다. 현재 가락시장 근처에서 영희역학연구원을 운영하며 꾸준히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유성호 문화평론가․문화지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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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근현대사
박건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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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의 삶을 모으고, 역사의 흔적들과 대화하는 일에 빠져 있다.”

자칭 역사 수집 컬렉터가 책을 내면서 내건 슬로건 같은 말이다. 책은 앞선 사람들의 삶이 담긴 흔적에서 그들이 가졌을법한 생각을 읽어 내고 때론 묻고 추리하는 형식이다. 이름 하여 ‘컬렉터, 歷史를 蒐集하다’란 책이다. 작가는 이를 ‘역사를 수집하는 컬렉터의 특별하고 가슴 뛰는 수집 일기’라고 명했다.

예서 잠시 한자 공부 시간을 갖는다. 수집이란 한자어가 비슷한 게 네 종류나 된다. 흔히 ①과 ②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책에서는 첫 번째 수집을 썼다. 그냥 모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연구를 위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책 제목도 어렵지만 한자로 쓰지 않았을까 한다.

①蒐集 : 취미나 연구를 위해 여러 가지 물건이나 재료를 찾아 모음. 또는 그 물건이나 재료. 우표수집.
②收集 : 거두어 모음. 재활용품수집.
③蒐輯 :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 모아서 편집함.
④粹集 :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만 골라 모음.

책은 엽서, 편지, 일기, 사진(뒷면 기록), 책자, 공문, 수첩 등 14가지 기록물에 대한 시대적 배경과 해석, 그리고 파생되는 역사적 사실을 ‘적절’하게 인용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이해하기 적당한 폭의 역사적 사실을 끌고 온 흔적이 엿보여서 적절하단 표현을 했다.

예를 들어 이렇다. 1907년 청주 군수 윤태흥이 산내이상 면장 송영수에게 실종자 조용익을 찾으라는 훈령 문서에 대한 챕터인 ‘정미의병과 사라진 통역관’에서는 문서에 적힌 내용을 먼저 해석한다. 다음엔 1907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역사의 퍼즐을 찾아 한 귀퉁이를 짜 맞춘다.

자연히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강제퇴위와 뒤이은 군대해산,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발발한 정미의병 이야기. 을미의병, 을사의병에 이은 구한말 국권에 대한 마지막 저항인 정미의병은 충북 제천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란 사실을 언급한다. 1907년 8월 제천 천남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며칠 뒤 보복으로 이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그래서 오늘날 의병전시관, 의병도서관, 의병기념탑, 의병광장 등이 제천에 들어선 근거가 된다는 퍼즐 한쪽을 끼운다.

훈령 등장인물인 조용익은 당시 재정고문 충주지부 제천출장소 통역이었다. 조용익이 제천을 찾은 때는 이미 초토화된 이후인 9월이었다. 의병들이 조용익을 납치한 것은 자신들의 건재함을 알리는 동시에 죽이지 않고 납치한 것은 그로부터 정보를 빼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면서 퍼즐 한 조각을 조심스레 끼워 넣는다.

▲ 청주군수 윤태흥이 이상면장 송영수에게 내린 훈령으로 한지에 등사한 문서로 군수이름과 면 이름, 면장 이름은 직접 붓으로 적었다.(가로 34cm, 세로 28cm, 박건호 소장) [사진=박건호 제공]


이어 글로 된 훈령으로 어떻게 조용익을 특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당시 쓰던 호패에 담긴 개인 신체정보 상황을 연계시킨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호패에 대한 상식을 짧게나마 소개하고 훈령에 담신 조용익의 특징을 풀었다.

납치된 조용익의 생사 여부와 그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적 근거를 더 이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질문으로 작가 자신과 독자에게 물음을 던지면서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식이다.

작가는 “그날을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면서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시간은 희열과 감동을 안겨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의 역사퍼즐 맞추기 방식이 유연하고 흥미롭다. 무엇보다 확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예단이나 종결보다는 상상의 여지를 줌으로써 역사에 대한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전 국민이 다 아는 고 손기정 옹의 베를린 마라톤 우승 3일 후에 써준 손바닥만 한 사인부터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한 정읍 청년의 생사가 달린 절절한 엽서까지, 작지만 그 속에 담긴 텍스트에서 필자의 심정과 심리를 읽어낸다는 것, 이것은 분명 가슴 뛰는 일이다. 단지 글자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서 그와 대화를 나눠야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작가에 따르면 33년 전인 서울대 국사학과 1학년 때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선사유적지 학술 답사에서 우연히 발밑에 빗살무늬 토기 파편을 주운 것이 컬렉터 활동의 시발이 됐다. 그동안 사진 한 장에서부터 생활문서, 잡지, 팸플릿, 신문, 일기장, 편지, 영수증, 사인, 사직서, 온갖 증명서까지 크기가 재질에 관계없이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은 본인도 정확히 모른다고.

작가의 말대로 책은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근현대사’(부제)다.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라 기억이 겹치는 재미도 있고 몰랐던 사실에 대해 알게 되는 지적 유희도 있다. 무엇보다 집집마다 서랍이나 장롱 깊숙이 있을 법한 소품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끌어낸 천착이란 점이 좋다. 장마철 비를 피해 시간여행 하기 적당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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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 젊은 의사가 고백하는
베르너 바르텐스 지음, 박정아 옮김 / 알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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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독일의사협회 외르크 디트리히 호페 회장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자비가 아닌 이윤'으로 규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 말 속에는 이 시대 올바른 의사상(像)에 대한 고민이 숨어 있다.
 
자본의 논리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인술을 베푸는 의사는 과연 소수일까 아니면 다수일까? 의료정보는 법률정보보다 더 비대칭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환자는 '을'(乙)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다.

이 같은 불평등을 해소하고자 의료계는 끊임없이 내부 고발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번엔 임상현장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책이 나와 의료계의 자기성찰에 또다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어느 젊은 의사의 고백
 

독일의 의사 출신 신문사 의학 편집자가 쓴 <읽기 두려운 메디컬 스캔들>. 저자는 "의사들의 '무능력과 미숙함'을 다룬 책"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은 제목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환자 입장에서 두렵기 짝이 없는 의사들의 오만과 냉혈, 무능과 실수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부인의 골반저는 해먹처럼 축 처졌네요.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니에요."
"세상에, 부인의 다리는 압축기(다리에 불거진 정맥류가 압축기 노즐처럼 보기 흉하다는 의미)처럼 생겼네요!"

의사들의 말 한마디가 환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막중하다. 병을 이기게 하는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하는 의사가 있는 반면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로 환자의 투병의지를 꺾어버리는 나쁜 의사가 있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의사는 오직 자신의 의학적 진단과 충고를 위해 목청을 높이다가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유린하기도 한다. 

"이건 위생상의 문제예요. 환자 분께서 국부를 좀 더 깨끗이 관리하신다면 병은 깨끗이…"

커튼을 뚫고 들리는 의사의 목소리와 너풀거리는 그 사이로 보이는 반라의 여자 환자. 그리고 그녀의 절망적이고 수치스러운 눈빛. 저자는 이 같은 의사들의 언어에 대해 직업적인 대화지만 좀 더 세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보호자 없이 일반병동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 환자를 다용도실로 옮기거나 뇌졸중 환자를 구급헬기로 이송했지만 환자 수용을 거부하는 병원의 사례 뒤에는 냉혈한 의사들이 도사리고 있다. 

수술 부위를 지혈하는 복대를 채우지 않은 경우, 어깨 수술을 하다가 수술용 드릴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이를 빼내기 위해 거짓 핑계를 대고 재수술을 하는 경우, 사진연장 수술용 고정 장치를 잘못 박아 넣는 등 의료사고의 전후에는 무능과 실수투성이 의사들이 망령처럼 도열해 있다.           

저자는 환자를 진심으로 대하고 맡은 바 직무를 충실히 하는 의사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환자에게 안부편지를 보내거나 "당신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당신은 병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는 말로 환자를 격려하는 의사가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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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의 의사들 - 의사와 기업의 유착관계를 밝힌다
제롬 캐시러 지음, 최보문 옮김 / 양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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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신장학회 학술대회장. 후원 제약사의 회사명이 인쇄된 이름표를 목에 걸고 다니는 움직이는 광고판 의사들이 커다란 가망을 둘러매고 학회장을 휘젓고 있다. 그들의 가방 속에는 인체 모형, 부채, 약 샘플, 사탕, 볼펜, 야구모자, 마우스패드, 손전등 등이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다.

2001년 3월 뉴욕 버펄로의 알레르기 전문의 로버트 라이스만 박사는 총 13개 제약사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아스트라제네카, 아벤티스, 쉐링, 노바티스, 3M 등이 학회기간 중 박사에게 저녁식사를 초대한 것이다. 돌아갈 때 현찰 1000달러를 얹어주는 곳도 있다.

세계적인 의학저널 <뉴잉글랜드의학저널> 편집장 출신인 제롬 캐시러의 <더러운 손의 의사들>은 의사들이 제약사와의 결탁이 얼마나 은밀하고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는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식사대접은 가장 일반적인 제약사의 판촉 방법. 부부동반 여행권, 스포츠 경기 입장권, 수련의나 전문의의 식사, 현금 등 제약사는 여러 형태로 의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이러한 행위는 자사제품을 처방하고 홍보해 달라는 암묵적인 로비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제약사의 이러한 편의제공과 관계없이 소신 있는 처방을 내린다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수많은 의사들은 제약사의 자문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별다른 활동 없이도 정기적으로 제약사 명의의 입금액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의사와 제약사 간의 현실이다. 심지어 환자와 의사 간의 소송에서 자사 제품이 들어 있을 경우 소송지원까지 서슴없이 행하는 제약사가 있을 정도다 보니 소비자는 암울하기만 하다.        

의사들은 제약사가 순수한 동기로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의사들은 '뇌물'은 받지만 자기는 성실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저자는 매수되고 있다는 인식과 매수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은 욕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 앞에서 의사들은 자기기만을 한다고 지적했다. 부정을 부정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환자치료에 전념하지 못하는 상황이 야기되는 순간이다.

이 책은 가톨릭의대 북클럽 회원들에 의해 국내에 소개됐다. 의사로서의 자기성찰과 미래에 대한 약속이 담겨 있는 책인 셈이다. 옮긴이 최보문 교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핵심을 가르치는 데 반면교사의 역할을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 책의 출판을 결정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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