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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술
정영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인터뷰] 2인칭 단편 소설집 <낮술> 펴낸 소설가 정영희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지서를 받은 가장, 헤어진 첫사랑을 만났지만 이내 죽음을 목도하는 중년, 거래처 술 접대로 만신창이 인생의 사내…. 소설가 정영희의 두 번째 단편집 <낮술>에 등장하는 군상들의 어깨는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과 주변의 경계에 머물면서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의 투영일지도 모른다.
<낮술>은 중년의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겪는 열 가지 ‘서글픔’을 엮은 옴니버스 소설이다. 작가는 ‘너’를 앞세운 ‘2인칭’이라는 다소 낯설고 드문 시점으로 인간군상의 삶을 들춘다. 낯설음은 불편하다. 혹자는 2인칭이 등장인물의 내면을 찬찬히 섬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시선의 깊이를 준다고 하지만, 차라리 ‘그’라는 3인칭 시점이 아쉽다. 그것이 어쩌면 슬픈 우리의 자화상을 조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낮술>에서 2인칭 시점이 선사하는(?) 중년의 삶은 무겁다. 작가의 집요한 들추기, 정밀한 묘사가 주는 지긋한 가슴 누름 역시 주인공 ‘너’와 읽는 ‘나’를 얽어매면서 아득하게 낮술에 취하게 만든다. 독자들을 흥건히 취하게 만든 작가와 인터뷰를 했다. 소설가의 길로 접어든지 20년, 여전히 무명이라는 작가에게 왜 애이불비한지 속내를 물었다.
“하하하...한 마디로 문학상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되돌아오는 답은 명쾌하면서 서늘했다. 그 속에서 우리 문단의 고질적인 병폐를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인칭 시점을 주로 사용하는데 의도된 의미를 설명하라.
독자들은 대개 1인칭 주인공시점과 관찰자시점, 3인칭 관찰자시점과 전지적 작가시점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교과서적 지식일 뿐이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하나의 시점을 택한다 하더라도 문장마다 대화마다 미세한 시점의 변화를 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시점대로만 서술한다면 등장인물의 어법이나 문장이 어색해져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게 된다. 일부러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소설이 아니라면 소설에 있어 자연스러움은 미덕이라 생각한다.
또한 소설에 있어 ‘낯설게 하기 혹은 생소화’야 말로 문학성의 요체라 할 수 있다. 문학이나 예술은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2인칭 소설의 성립여부는 문제제기 될 수 있다. 2인칭 소설의 화자가 실체를 갖춘 ‘너’라는 점에서 1인칭 소설의 화자 ‘나’와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2인칭 소설의 화자나 1인칭 소설의 화자나 자신이 체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서술한다. 2인칭은 타인에 관해, 1인칭은 자기 자신에 관해. 그러나 소설이 주는 효과는 전혀 다르다. 2인칭은 3인칭 전지시점 보다 오히려 ‘너’의 내면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낮술>에 나오는 2인칭 소설의 화자는 ‘너’의 또 다른 분신일 수도 있다.
-단편 ‘낮술’에서 광장, 낮술, 능(陵)이 함축하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광장은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만이 나무하는 ‘현대 사회’를 의미한다. 광장에 나온 너는 ‘줄서기’를 잘못했고 융통성이 부족해 정리해고 된다. 너는 아내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거리를 배회하며 ‘낮술’을 먹는다. 여기서 ‘낮술’은 불안과 우울을 잠재우는 매개로 사용된다. 낮술을 먹으면 ‘세상은 다시 꿈속처럼’ 변한다. 다시 말해 낮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는 현실을 잊을 수가 있다. ‘낮술’의 의미는 우리가 바라는 ‘피안의 세계’쯤 될 것이다.
능은 아버지를 의미한다. 어린시절의 능은 거대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찾아간 능은 몹시 작아져 있다. 이 시대 아버지의 권위도 부권도 이 능처럼 작아져 있다. 그 옛날 아버지는 무능했지만 당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너는 아내에게 실직했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처지다. 단편 ‘낮술’은 얼핏 실직자에 관한 소설 같지만 사실 실직자를 소재로 야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남성에 관한 소설이다.
-도시인의 비극적인 삶을 유년과 결식시켜 풀어간 글이 많은데, 그 이유는. 유년은 현재의 운명론적인 연장인가 아니면 삶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뜻인가.
아마 상처받은 영혼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설들 이야기인 것 같다. 유년, 다시 말해 세상과 처음으로 만날 때의 ‘첫 인식’이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첫 사랑’이 우리의 평생을 따라 다니듯이. 그러므로 유년은 현재의 운명론적인 연장일 수도 있다.
삶에 있어 태생적 한계란 없다. 지금은 계급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랑받지 못한 혹은 상처 받은 영혼은 습자지처럼 얇아져 있어 조그마한 빗방울에도 구멍이 ‘펑펑’ 뚫린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하는데 ‘성격장애아’처럼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도시에서의 삶에 이음새 없이 합류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상처 받지 않도록 잘 키워야 한다.
-글 속에서 현대인의 삶의 고단함 속에 포기 되어지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나 어린시절 혹은 청소년 시절에 꿈을 가진다. 그 꿈이란 매우 비현실적일 경우가 많다. 그런 꿈을 실현시키기엔 현대사회는 너무나 척박하다. 유명 화가가 되기까지 호구지책이 막연하며, 유명 작가(시인)가 된다 해도 직업으로 하기엔 불가능하다. 직업이란 밥이 해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모두들 꿈을 가슴에 안은 채 묵묵히 거대한 사회의 톱니바퀴의 한 나사못이 되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못은 녹이 슬고 급기야 바닥에 버려지게 된다. 그 순간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돌아본다. 그때서야 잃어버린 꿈에 대해 가슴 아파할 수 있다.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근원적인 것은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그 내면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우리를 그렇게 진정으로 살아가도록 구조적으로 잘 돼 있지 않다.
-이번 단편집에 대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현대 사회는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가정은 이미 증발하고 없고, 가족관계만 유지 되고 있다. 언젠가는 서로 사랑하는 남녀끼리 살고, 아이들은 사회가 키우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다. 이 단편집에는 현재 한국 가정의 균열이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서서히 진행되는 대화 단절과 섹스리스 가정이 늘어나고, 여자들에게 애인이 생긴다. 아내에게 애인이 있다는 걸 알지만 가정을 깨지 않기 위해 남편들은 모르는 척 한다. 모르는 척 못하면 이혼한다. 이혼율 세계 2위인 나라다. 한국 사회의 이 비인간화 현상은 정치, 경제, 사회 체제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의 뒷모습에 초점을 맞춰봤다.
-좋은 작품을 내고도 ‘무명 20년’이라고 했는데, 우리 문단의 문제점과 대안은.
어느 집단이든 인간이 모이는 곳은 똑 같은 문제점이 있다. 현시욕과 공명심이 강한 이들끼리 ‘장’ 자리를 놓고 이전투구를 하기도 한다. 패거리문학이 성행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것만이라도 문학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곧 문학이 동호인 모임으로 전락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대안이란 없다. 그냥 그렇게 가는 거다.
중요한 것은 문학인들이 ‘재미있는 글’을 써서 외국 작가들과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 또한 유명세를 한번 타면 계속 언론에서 그 소수의 작가만 확대재생산하고, 출판사가 또 거기에 춤을 추니, 신인들의 우수한 작품이 사장되는 것이 안타깝다.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해 줬으면 하는 것은 일정한 심사를 거쳐 작품집에 한해서는 전국의 도서관에 배포한 책을 사 주면 좋겠다.
-작품 활동 계획에 대해 알려 달라.
실직자, 분단,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들은 내 문학의 수단이나 배경일 뿐이다. 진정 내가 다루고자하는 것은 인간의 외로움, 그리움, 사랑, 희망 에 관한 것들이다. 생명 가진 것들에 관한 측은지심이라든가, 인간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 다음 작품은 장편 소설 <수국집 아이, 아키코>라는 연애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