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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코
정영희 지음 / 실크로드 / 2011년 6월
평점 :
가정, 부부, 남녀 인간관계에 천착하는 작가 정영희가 5년 만에 장편을 펴냈다. 일본인 현지처의 딸로 태어난 명자 이야기 <아키코>를 출판사 실크로드를 통해 6월 말에 선보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족해체와 부부심리를 심도 있게 다뤘다.
특히 본인의 선택과 관계없이 부계 일본인 피를 담고 사는 명자를 통해 혼혈과 순혈주의, 다문화 가정의 정체성 문제를 들췄다는 점이 또 하나 읽히는 요인이다. 무엇보다 중년들의 가슴을 격하게 요동치게 하는 '첫사랑' 이야기란 점에서 흡인력을 갖는다.
40대 중반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만난 첫사랑 운하와 명자. 이들은 이메일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고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연결시킨다. 동시에 몸은 떨어져 있지만 늘 한 공간에 함께 있음을 자위하는 수단으로 이메일을 이용한다. 이들이 주고받는 이메일은 진지하고 애잔하고 저릿하다. 때로는 사랑의 속삭임이고 고백이면서 첫사랑의 아련함과 나른함을 담은 종합선물세트다.
금융위기로 인해 구조조정을 당하고 사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사라진 남편을 둔 명자와 결혼의 경제학에 충실한 섹스리스 부인을 둔 운하의 운명적 만남과 이별을 그린 이 작품에는 한국 사회와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구조조정에 밀려난 가장, 접대문화와 원치 않는 향응과 성(性)을 사는 남성중심의 사회, 이 때문에 서서히 붕괴되는 가정과 여성의 일탈, 결국 치유와 치료과정 없이 파국과 원위치라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사회 구조를 꼬집고 있다.
내용의 상당 부분이 명자와 운하가 주고받은 이메일로 채워져 있다. 남의 편지를 엿보는 관음을 자극 하고 중년들에겐 때론 첫사랑과 나눴던 연애편지의 아스라함을 전달한다. 태풍 매미에 뿌리 뽑힌 오동나무를 베려하자 아파트 관리소장에게 법정소송을 불사하겠다는 명자에게서 강한 생의 애착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끝내 작가는 그런 그녀를 어깃장 난 현실을 원위치 시키는 '제물'로 삼는다. 한 마리 나비가 돼 하늘로 날아가 버린 그녀가 과연 해체되는 현실을 얼마나 봉합했느냐에 대한 평가는 읽는 자의 몫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사라진 남편을 베트남에서 만난 명자가 남편의 현지 딸 '란'과 동병상련을 느끼는 대목이다. '란을 한번 안아주고 올 걸' 하는 부분에서 혼혈과 다문화에 상처받은 명자의 깊은 상처를 읽게 한다.
이 작품은 5년 전 펴낸 <낮술>에 들어 있던 단편 <억새꽃>을 장편으로 늘려 엮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완성한 것이다. 지난 인터뷰에서 '수국집 아이, 아키코'란 연애소설을 출간한다고 했는데, 5년 만에 약속을 지킨 셈이다. 가락시장 인근에서 작품 활동과 함께 영희역학연구원을 하는 작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남은 궁금증을 풀었다.
- 어디서 모티브를 얻었나?
어릴 때 우리 집이 '아이스케키 공장'을 했다. 가난한 시절의 '아이스케키 공장 집 외동딸'은 질시의 대상이었다. 내가 지나가면 동네 사람들이 '께끼 지나간다. 께끼'라고 수근 거렸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 간 동네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늘 외톨이로 자랐다. 요즘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왕따' 당한다는 뉴스를 보면서 내 어릴 적 생각이 났고, 자연스럽게 혼혈아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발아(發芽)되었다.
- 아키코를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나?
이 소설은 순혈주의에 상처받은 일본 혼혈아, 아키코의 러브스토리다. 아키코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자신을 소중히 추억하며 간직해 줄 사람을 인간은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삶이 아무리 누추하게 바닥으로 떨어져도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견딜 수 있는 것이다.
- 아키코의 연인 운하의 부부관계가 흥미롭다.
아키코의 연인, 운하를 통해서는 도시 '중산층 가정의 부부관계'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한국사회에서 직장생활이란 사슬의 고리처럼 비슷비슷한 일과로 진행된다. 음주가무와 접대 문화. 그것이 비즈니스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기가 힘든 구조다. 남자는 남자끼리 놀고, 여자는 여자끼리 논다. 이혼율이 세계 2위인 나라다. 부부관계는 이미 붕괴되어 있고, 가족관계만 유지하는 가정이 의외로 많다.
무엇이 문제인지 한번쯤 생각하게 하고 싶었다. 운하 부부의 파탄은 이미 명자를 만나기 전부터 있었다. 물론 사랑한다고 '착각'해서 결혼을 한 운하와 미옥의 책임이 일차적이긴 하지만, 구조적으로 부부생활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음주가무'와 '접대문화' 인 우리 사회의 무감각한 도덕성에 더 책임이 있다고 본다.
- 운하의 부인 미옥의 캐릭터가 아주 파격적인데 모델이 있나?
특정 모델은 없다. 항간에 떠도는 애인이 둘쯤은 돼야 '강남여자'라는 얘기에 상상으로 살을 붙인 거다. 얼굴 되고 돈 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여자지만 붕괴된 가정의 무너진 축을 부여잡고 원죄의식 속에 아파한다. 겉으론 쿨 한 척 하지만 이도저도 못하는 불안한 현대 여성의 캐릭터를 대변한다.
- '결혼은 비즈니스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미옥이 쿨하다.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길 원하나?
전업주부들의 경우, 결혼은 비즈니스고 생존의 한 방법이라 생각하면 아무리 불행하거나 사랑이 식은 결혼생활이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는 아이들이 상처 없이 잘 자라게 하는 것이다. 사랑과 비즈니스 어느 것도 영원할 순 없다.
- 작품집 <낮술>에 실린 <억새꽃>을 장편으로 개작한 이유는?
원래 '수국집 아이, 아키코'로 장편을 쓰고 있었는데, 출판사에서 급하게 청탁을 해 단편으로 줄여준 것이다. 그렇게 '억새꽃'이란 제목의 단편으로 주고 난 후, 이번에 다시 장편으로 쓸 때 매우 힘들었다.
- 40대 중반 남녀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초등학교 동창인 주인공들 대화와 생각이 실감난다. 소재를 어디서 얻나?
재경초등학교 동창들의 산행 모임이 있다. 가끔 산행을 따라가서 듣게 되는 샐러리맨들의 애환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이 시대 남자로 사는 것도 힘들고 일찍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들도 외로움을 견디느라 힘들다. 한 때 '아이러브스쿨'로 연락이 닿은 초등학교 동창들이 첫사랑을 만나 가정을 깨는 일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 이메일 서신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이다. 이메일은 소설을 끌어가는 주동력인데 현실의 대화와 이메일을 통한 '속내 드러냄'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
좋은 질문이다. 대화란 상대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거다. 그러나 이메일을 통한 대화는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글로 말을 하므로, 일기를 쓰는 것과 같이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마치 자신 속의 외로움에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과 같이 더욱 내밀하게 느껴지게 된다.
- 젊어서 사랑의 리비도는 유효기간 1년 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중년 리비도의 실체는 뭔가?
청춘이든 중년이든 '사랑의 리비도'는 1년 반이 맞다. 왜냐하면 사랑의 리비도는 화학작용이니까. 과학적으로 입증된 거다. 그러나 중년의 사랑은 삶의 아픔과 외로움을 아는 나이이므로, 생명 가진 것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나이이므로 더욱 정신적으로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화학작용이 끝나도 '휴먼적인 사랑'은 계속될 것 같다. 노년의 사랑은 더욱 애절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