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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적들에 맞서 - 이라크 전쟁의 숨겨진 진실
리처드 A.클라크 지음, 황해선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참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저자는 9.11 사태 발생시 백악관 상황실을 지휘했던 내부자(insider)로서, 레이건 행정부에서부터 부시 행정부 초반까지 안보 분야에 뼈가 굵은 사람이었기에, 모든 얘기가 아주 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한가지 일을 한 30년쯤 하다 보면 그 분야에서 세계를 보는 시각이 뚜렷이 생기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을 읽고 저자로부터 세가지 면에서 강한 느낌을 받았다.
가장 우선으로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하고 있는 전쟁의 뿌리는 냉전의 종식 바로 그 무렵에 두고 있다는 저자의 시각이다. 레이건 때 소련과의 대결에서, 승리만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과정에, 미국이 중동과 중앙 아시아에 잘못 뿌린 씨가 그 이후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전후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간접 지원'한 까닭에 냉전 종식 후 빚어진 일들을 들고 있고, 마찬가지로 79년 이란 혁명 후 일어난 레바논 사태에서, 미군이 어설프게 철수를 결정한 것이 중동의 테러분자들에게 나중에 미친 심리적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이어진 '아버지 부시' 때에도, 90년 걸프전을 치른 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바로 교체되리라 쉽게 낙관하고 뒷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미군을 사우디에 계속 주둔시키게 됨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반미정서를 급속히 키우고 알-카에다와 같은 조직을 태어나게 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현재 이라크에서 미국이 치르고 있는 이 전쟁은, 그 시작이 사실 테러리즘이나 알-카에다의 제거와는 거리가 있다는 저자의 증언이다. 부시 행정부에서 9.11 사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였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 얘기는 부시 행정부에서도 고위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던 저자의 입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충격적인 것이다.
그리고, 2001년 부시가 정권을 잡고서는 9.11 사태가 발생할 때까진, 사실상 알-카에다나 테러리즘에는 제대로 된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방치했음이 드러나고 있어서 참 흥미롭다. 럼즈펠드(국방장관)이나 울포위츠(국방차관)은 집권 초반부터 이라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던 대목들도 나오고 있다. 그리고, 부시가 9.11 직후에 저자에게 직접, 사담 후세인과 이번 사태가 연결된다는 단서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찾아보라고 강하게 주문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마지막으론, 저자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미 행정부 내의 의사결정 과정의 장면들이다. 첫 장에 나오는 9.11 사태 당시의 백악관과 상황실 모습도 새롭고 인상적이지만, 테러리즘이란 문제를 놓고 백악관, CIA, FBI, 국방부, 국무부, 군이 서로 갈등하며 벌이는 일련의 모습이 다른 곳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이 책을 흥미롭게 읽히게 한다. 우리가 귀에 익은 조직과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담긴 의제(agenda)에 따라 내보이는 반응들이 드러남으로써 이 책을 살아나게 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이번엔 부시 행정부 편에 서서 이 전쟁과 테러리즘을 읽어낸 시각을 참조하고 싶다. 분명 다른 쪽에도 나름대로의 관점이 서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편으론, 이런 내부자의 적나라한 얘기가 출간되어 나오고 또 널리 읽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가진 어떤 저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