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 어둠의 시대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세월을 뛰어 넘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책 읽기 였다.  200년 전에 여기 서울, 그리고 양수리 근처의 그 마을, 또 저 멀리 포항 옆의 장기라는 곳과 전라남도 강진, 玆山이라 이름 지어 불렀던 섬 흑산도...  이 공간 안에 살다간 약용, 약전 두 분의 숨결이 책 읽는 내내 생생하게 따라왔다.

  수 년 전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라는 책을 통해, 학교에선 미처 배우지 못했던, '조선 시대' 사회에 형성된 왕과 사대부의 역학관계에 눈 뜰 수 있었기에,  이 책에 나오는 정약용 형제들이 겪은 세월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인과 노론 벽파, 사도세자, 영조, 정조.....

  그리고 그 시대의 이면에 깔려 있던 西學으로서의 천주교는, 우리 조상들과 참으로 기막힌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벽, 이승훈, 이가환, 권철신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리고 정약용의 셋째 형 정약종이  어떤 길을 갔는지, 천주교 103위의 성인들이 있기까지 그 앞 세대에서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험한 시대, 험한 세상을 참으로 깨끗하고 소신 있게 살다간 조상들의 면면을 대할 때마다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했다.   

  옛날에 정문기 교수가 번역해 一志社가 간행한 정약전의 "자산어보"를 갖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책이 어떤 환경에서 만들어 졌는지, 그 저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여태껏 몰랐다. 그 험난한 인생의 격랑 속에서 그런 책을 내고, 16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정약전이란 분의 마음의 크기와,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았던 눈이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역사에 단연 두드러지는 사람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일 수 밖에 없다. 정조라는 왕과 화답을 하기까지 하며 지근거리에서 군신 관계를 이루어가는  30대를 보낸 이 학자이며 관료였던 실천가는,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겪으면서 자신의 삶을 서서히 완성해 갔다.  그 결과물이 바로 一表二書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대표되는 저술들이었다. 그리고 57세에 유배에서 돌아와서는, 자신과 함께 그 어둡고 아픈 세월을 겪었던 사람들의 행적과 뜻을 '墓誌銘'의  형식으로 정리해 올바르게 후세에 알리려고 했던 그는 영원한 선비이며 실천가였고, 참된 사람이었다.

  특히 科擧를 통해 관료의 길로 들어서는 것 만이 유일한 출세의 길이며 인생의 목표이던 그 시대에, 그 기회가 완전히 좌절되어버린 아들을 향해 멀리 유배지에서 편지를 통해 했던 그의 교육은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편지들을 묶어 놓은 책을 꼭 찾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무럭무럭 일어났다.

  이 책을 통해 정약용이란 이 분의 삶을 좇다 보면 나와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참으로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누구에게든 험한 세파 속에서도 아름답고 힘있는 인생을 사는 모습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아마 정약용 형제들의 모습과 닮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겐 훌륭한 조상들이 계셨고, 그 분들이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위에서, 불과 200년 전에 살다 가셨음을, 머리 만이 아닌 온 마음과 몸으로 알고 느끼게 된 기쁜 책 읽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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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2006-08-2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히 다른 이야기 이지만, 조선시대 선비계급은 정말 놀고 먹는 계급이라고 할 수 있군요. 정약용만 하더라도 그 유배세월 동안 누가 먹을거리며 입을거리를 공급해주었는지 궁금하군요. 모두 노비들이 따라 붙어 다녔을 것 같은데... 그 것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사람이 뼈빠지게 일하고 정작 본인은 놀고 먹으면서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이것이 올바른 것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약용등 선비계급의 정신적 사유의 결과물의 가치 평가는 논외로 합니다) 저는 아니라 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고 나온 그 저작물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재 2006-08-23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두 형제가 동시에 유배를 떠나면서, 나주읍 율정점 초가 주막에서 마지막 밤을 지새고 다음날 두 사람이 쓸쓸히 헤어지는 장면이 이 책에 나옵니다.
그리고, 두 번이나 국청에 선 사람을 만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상의 차가운 인심도 엿보입니다. 실제 정약용은 강진에서 고달픈 몸 하나 누일 방도 구할 수 없어서 동문 밖 주막 노파의 동정으로 간신히 기거할 방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이 책에 나옵니다. 약용이 장기에서 병이 들었을 때 본가에서 약초와 책을 보내온 내용이 있으며, 약전이 자산에 있을 때 본가에서는 아들 결혼식을 치른 탓에 유배지로 보내 줄 식량도 없을 지경이 되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아울러, 약용은 그 고장 사람들을 위해서 '촌병혹치'라는 의서를 지어 약초를 달여 병을 고칠 수 있도록 했으며, 약전은 섬사람들과 격의없이 어울렸을 뿐 아니라 '복성재'라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이 유배지에서 민중들과 어떤 사이였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약전이 동생 약용이 해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진에 가까운 우이도로 이주를 하기 위해 밤에 흑산도를 몰래 떠났을 때, 섬 주민들이 새벽에 그 사실을 알고 즉시 날랜 배로 우이도를 향해 정약전이 탄 배를 빼앗아 되돌아 왔을 정도로 그는 흑산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있었다는 일화입니다.

이들의 삶을 한번 상세히 들여다 보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을 다듬는데 도움이 될 듯 합니다.

oren 2006-08-27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러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 정다산의「매조도」중에서

Jerome님의 훌륭한 서평글 잘 읽었습니다.
마침 제가 며칠 전에 강진의 다산초당을 다녀왔던터라 님의 서평글이 더더욱 반갑군요.

다산 정약용 선생에 관한 책이나 서평글이 느닷없이 반가워지는 건, 적지 않은 비용이 지출된 이번 여름 휴가 뒤끝의 자그마한 과실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다산초당에 직접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귤동마을 산 속으로 하늘을 찌를 듯한 대나무와 거칠게 뿌리를 드러낸 나무숲을 헤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야 만날 수 있을만큼 다소 험난한 길이더군요.

몹시도 누추하리라 짐작하고 힘겹게 올라가보니, 초당을 와당으로 꾸며놓은 모습이 깔끔한데다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 모각한 현판(茶山艸堂)까지 멋지게 걸려있어 찾는 이들에게는 다소 예상밖이라는 느낌도 던져주더군요.

유배생활의 안식처답게 다소 옹색하게 자리잡은 터전은 다산초당을 비롯, 동암, 서암, 다산4경(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등으로 강직하고도 간결한 멋을 지니고 있더군요.

다산초당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곳은「천일각」이라는 곳이더군요.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형(정약전)을 그리며 심회를 달래던 곳이라고 하며, 수십리에 달하는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일품이더군요, 날씨가 좋으면 멀리 완도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고도 합니다. 천일각에서의 전망은 퇴계 선생이 학문을 탐구하던 도산서원 앞마당에서의 까마득할 정도로 훤히 트인 전망과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더군요.

oren 2006-08-27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덧붙이자면, 올 여름 휴가의 당초 목표는 보길도였었습니다. 아이들이 잠시 해외에 나가있는 기회를 틈타 모처럼 아내와 둘이서 머나먼 곳까지 떠나보자는 계획이었죠. 그저 땅끝을 벗어나 저너머 한적한 섬으로 건너가서, 그저 유유자적하면서 해수욕이나 즐기고, 고산의 세연정이나 둘러보고, 섬 끝의 일몰에나 풍덩 빠져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랬던 당초의 계획은 유홍준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초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강진·해남(1),(2),(3),(4)에 의해 여러갈래 길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결국 수천리길에 걸치는 유적과 인물에 대한 답사길이 되고 말더군요.

4박5일의 비교적 짧은 일정이었지만 되돌아보니 결코 만만치 않은 여행길이었네요.

* 여행지(답사지/지취를 남긴 인물)

서울 → 목포(이난영, 김지하, 남농 허건) → 영암(도갑사/도선국사) → 해남(대흥사·표충사/서산대사, 일지암/초의선사, 허준, 김지하) → 보길도(윤선도, 송시열글씨) → 완도(장보고) → 강진(정약용, 김영랑) → 보성/벌교 → 낙안(임경업) → 구례(화엄사, 천은사) → 함양 → 서울

mizuaki 2007-03-11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에겐 훌륭한 조상들이 계셨고, 그 분들이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위에서, 불과 200년 전에 살다 가셨음을, 머리 만이 아닌 온 마음과 몸으로 알고 느끼게 된 기쁜 책 읽기였다"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좋은 서평이라고 고개 끄덕이며 읽다가 이 마지막 문장에서 뭔가가 목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전 이 책 읽으면서 반대파를 발본색원해서 다 죽여버리기 전에는 풀리지 않는 집단적 증오가 끔찍했고, 고문과 테러로 얼룩진 시대의 야만에 치를 떨었거든요.
붕당 정치에는 단점이 있지만 장점도 많았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며 조선 후기의 근대성을 찬양한 기만적인 국사 교육의 목표가 바로 "훌륭한 조상들"을 강조하며 "훌륭한 국가"에 충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의심하면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잔인성을 바로 인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러운 반론을 제기해 봅니다. 제 느낌엔 아무래도 훌륭한 인물보다는 비열한 인물이 훨씬 많이 나오는 책이었던 것 같아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