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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야마다 에이미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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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야마다 에이미는 쿨한 모습으로 쿨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한동안 에이미의 책을 보고나선 한참 동안 혼란스러웠을 정도로..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반여자에게 다가가 사귀게 되고 이윽고 그녀의 소중한것 '리스트'에 자신이 올려지고 난 후 어김없이 이별해 버리는...그런 쿨한 사랑. 쿨한 사랑엔 쿨한 가슴이 요구된다.아니 어쩌면 자신의 방어체계가 작동하여 상처받지 않기위한 쿨한 방어벽이 요구된다. 실제의 사랑이 이처럼 유지 될수 있을까? '가지고 논다' 라는 말로밖에 이것들이 한국사회, 이 바닥에선 그렇게 표현되지 않을까? 작가는 그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의 가능하다고 믿는걸까?

글쎄...끝에 친구를 간하고 마는 첫번째 이야기에서 처럼 쿨한 관계를 끝내는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자신의 쿨한 사랑을 지키고 그것을 부정해버린다. 작가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다. 그리고 그만큼 또 혼란스러운 소소설이다. 뭐..그렇다구 그녀의 연혁을 걸고넘어 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단지 여러갈래의 방향성을 지닌 그녀가 부럽고 그리고 그녀의 방어기재가 안타까울뿐... 절대로 이 세상에선 쿨한 사랑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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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사이 - Rosso 냉정과 열정 사이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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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년전에 헤어진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해서 여전히 남아 안정된 미국인 남자와의 삶도 마다하고 아오이는 쥰세이 한테 다시 갈수 있었을까? 그건 아오이의 사랑이 커서일까 아님 쥰세이의 사랑이 커서 일까? 아오니는 우울해하며 그리고 조금은 음울한 성격이면서도 주위에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끊을 놓지 않으며 자신의 그런 성격을 냉정이라는 단어 한마디로 표현되게 만든것 같다. 쉴새없이 이는 감정의 물결을 목욕이라는 행위로 환기시키거나 혹은 다시 떠올리거나...

마치 기억이라는 물에 들어가서 목욕하듯, 아오이는 늘 혼자가 되려는 자신의 탕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사랑에 대한 냉정과 열정..어느것하나 치우치치 않는게 좋은 걸까? 남녀사이에 밀고 당기기 뿐만 아니라 감정에 대한 냉정과 열정의 조절도 필요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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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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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사회를 대표하는 랠프. 그는 상당히 정치성을 띄고 있었다. 문명 사회는 결국 정치의 수준으로 짐작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사회주의 인가? 민주주의인가? 작가는 그 대답을 이내 던지고 있다. 랠프는 아이들을 모으자 마자 지도자를 뽑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다. 즉, 민주주의를 대변하는 문명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그 문명도 곳곳에서 헛점을 드러내고 있다. 잭과의 투쟁 속에서, 랠프를 지도자로 인정한 그 집단에서 탈출한 잭의 집단이 사냥에 성공하여 멧돼지 고기롤 파티를 여는 날, 랠프는 많은 고민 끝에 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약간은 굽실거리며 그 고기를 얻어 먹는다. 즉, 그들의 이익이 필요한 것 앞에서는 문명이나 지성도 야만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야만과 같이 공존하던 모습을 보이던 문명은 곧 그 한계를 느끼고(아니 그것은 문명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다.) 야만과 분리된 후 그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다가 다시 야만이 필요한때에 야만에 기생하여 산다. 야만은 마치 히든 카드처럼 쓰인다. 역사속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인간의 그 야만적인 못 모습들.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 처럼. 이렇게 작가는 비판을 하지만 결국은 시대의 대안으로 그 문명을 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랠프가 그렇게 강조했던 봉화는 마침내 그들 소년들에게 무인도에서의 구출을 낳았다. 즉, 상황의 종결, 그것도 해피 엔딩을 낳은 것이다. 비록 그것을 잭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인간의 본성은 개인차는 있지만 짐승의 그것처럼 야만적이란 것이 생각이 든다. 어린시절 길을 가다가 우연히 수풀속에 숨은 꿩을 본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주변에 있는 적당한 돌멩이를 들어 꿩을 향하여 던진 적이 있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지금도 산에서 노루를 만났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무리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고 한들 본성이 바뀌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의 야만적인 본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깝게는 가족부터 넓게는 사회의 각 구성원이나 구조장치로부터 끊임없이 통제되고 교육을 받아 밖으로 표출이 되지 않는다.

무인도는 문명이라곤 존재하지 않은 곳이고 어린애들은 문명의 교육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문명세계로의 복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면서 얘들은 야만적으로 변하여 간다. 어차피 그 곳은 야만적인 곳이고 동물처럼 행동해도 비난할 어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문명의 세계에 살면서 몽둥이로 개를 잡는다고 야만이라고 비난을 하지만 무대가 바뀌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인상적인 장면 하나. 집이 중요하다는 랠프와 멧돼지 사냥을 우선시하는 잭의 대화는 겉돈다. 서로 상대방을 설득시키려 하지만 진지한 대화나 타협은 없이 계속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우선 비를 피하고 잠을 자야 할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랠프의 눈에 멧돼지 사냥한다고 돌아다니는 잭의 행동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잭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있으나 마나한 집보다는 먹고 살아야 하므로 사냥을 하고 몰이꾼으로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자신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 잭은 살인도 서슴지 않은다. 항상 파국은 대화의 단절에서 오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왜 장소를 고립된 무인도로 정하였을까? 인간은 어떤 상황 속에서 그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그 자신이 스스로 자유 로울수 있는 상황 속에서만 비로서 자신이 되는 것이다. 그 상황을 만들었지만, 결론은 영국으로 귀환하는 모습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인 사람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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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통신
손석춘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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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대통령 선거에 대한 추억과 그리고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이 얼굴도 깔끔하게 생기고 분위기도 좋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당선되면 좋겠다”라는 멋모르던 어릴 때의 추억과 그리고 2002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이 안되고 이회장이 당선이 되면 이민 가 버리고 싶을 꺼야” 라는 생각이다.

생각해 보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당선이 김대중의 로비 때문이라고 노르웨이 노벨상 위원회에 제기하는 당과 그 당수가, 그리고 자기 아들은 군대에서 교묘히 빼돌려 병역 의무를 기피하게 해 놓구선, 모든 국민에게 국방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않을 것이라고 자부하고, 북한에 대한 힘의 논리를 적용하는 냉전사고를 가진 사람이 당선 된다면, 게다가 그 뒤에는 60%에 육박하는 영향률을 가지는 조선일보가(그 조차도 친일행각과 온갖 탈세, 언론인이 아니라 경제인 같은 모습을 보이는) 지원 사격을 한다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주장하는 오태양이나, 서해대전 때 합리적인 종결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손석춘은 말한다. 그게 희망이라구. 나의 어릴 적 그 소망(?)대로 노태우가 당선이 되었을 때 어느 지식인은 대한민국이 싫어서 이민을 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나이가 들고 그 이민사회에 정착하면 할수록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현재 일고 있는 노풍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손석춘은 그게 곧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묻는다.

청년들에게 월드컵이 있었다. 월드컵 4강이라는 초유적인 일을 기록하고, 모두가 붉은 옷을 입고,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나와 같은 지역에 관계 없이 같은 노래, 같은 옷을 입고 응원하는 통일(?)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박노자는 인물과 사상에서 아직 한국사회에 남아 있는 전근대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고 또 그에 대해 응원하는 것(그것은 마치 각 축구 팀 서포터즈가 그 팀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거)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난 전혀 그의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까? 두 여중생이 미군탱크에 의해 압사당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손석춘은 말한다. 소외된 자들의 모습과 그리고 그렇게 국민을 분열하려 해쓰던 조선일보가 의도적으로 월드컵을 찬양(?)하는 모습을. 그렇다. 그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해 하루종일 앉아서 축구공을 만들던 인도의 어린 소녀와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여중생의 죽음을. 그는 계속해서 말하는 게 있다. 청년들의 맑은 눈빛과 그리고 그 열정을 강조한다. 마치 그 글을 읽고 그렇지 못한 청년들을 질책하는 것처럼.

대학 강연회를 많이 나가는 그는 학생 임원들의 눈빛을 볼 때 마다 그 순수함에 다시 한번 자신을 뒤돌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인상 깊었던 것은 학생 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솔직히 ‘운동권’(-이건 학생 운동하는 사람을 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 한다.)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분열되어서 그 힘을 전혀 쓰지 못하고 또 우리 부모님이 물려주신 생각처럼 무조건 나쁜걸 로만 인식이 되어 있다. 한총련과 전학련으로 구성된 것들에서 그는 단호히 그것들의 통합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 상황에서 난 기독교 대학 연합을 생각한다. 일명 그 “운동권”에서 벗어나 다른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자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도피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는 상황에서 같은 나이의 같은 대학생들이 단지 한총련이라는 이유로 구속대상이 되어서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경찰의 눈을 피해 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다. 학생회의 존재가 무엇인가? 대학생, 학원 구성내의 회원들이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단체로 행동하고(사실 이말 자체에서 기실 “운동권”의 냄새가 난다) 그리고 사회악에 대해서는 청년들이 저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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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쳐서 보습을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와 기독교 평화주의
김두식 지음 / 뉴스앤조이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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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본적인 생명에 대한, 자신의 의지에 대한 기본적인 선택권마저 우리는 국가에 양도된 상태다. 특히 대한민국의 20대 건장한 남자라면 20대 이전의 인생계획에서 군대라는 문제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제다.(디스라거나 혹은 돈많은 집 면제자 아들빼구) 왜 군대를 가냐구 조심스럽게 되뇌여 보기에는 그동안 초등학교 조례시간에 온몸이 뻣뻣해 지도록 훈계받은, 그 훈화가 가슴을 너무나 쳐서 사실 겁이 나기도 하지만 이 책은 너무나 자신감을 준다..

난 죽기 싫다. 그리고 남들도 죽이기 싫다. 남이 내 가족을 죽이기 전에 먼저 방어를 해야 된다지만 난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앞뒤 관계없이 '가정' 이라는 극단의 상황에 나 자신을 몰아 넣는 고통을 겪고 싶지도 않다. 보면볼수록 한국 기독교의 참담함을 느낀다. 평안을 말로 되뇌이지만, 사랑을 말로 되뇌이지만, 이번 반전집회에서 외친 광성교회 신도들의 말에서, 그리고 아직 탄생하지 않은 기독교 양심거부자 속에서, 또 그속에 포함되지 못한 나 자신의 모습에서.. 난 죽기 싫다. 그리고 또 남을 죽여야 되는 상황은 더욱 싫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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