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는 아파트 돈 안 되는 아파트 - 부동산 애널리스트가 알려주는
채상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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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신의 부동산 정책이 담뿍 반영된 작품이라 가치 있음! 아파트 4그룹론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고 전체 통계보다 국소 지역 상황이 크게 작용하는 게 부동산이기도 해서 큰 도움은 안 되. 그보다 인상적인 것은 임대시장에서 다주택자의 파워와 노후주택/나홀로아파 재건축 둘러싼 변화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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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되는 아파트 돈 안 되는 아파트 - 부동산 애널리스트가 알려주는
채상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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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임대시장에서 다주택자의 압도적 지위는 전세냐 월세냐 하는 임대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이다. 즉, 다주택자들이 집값 상승을 기대하면서 갭투자를 하기 시작하면 전세 공급이 증가하고, 집값의 보합이나 하락세를 예상하고 월수입을 원하면 월세 공급이 증가한다. 아주 간단한 원리다. (53)

하지만 안타깝게도 월세를 선호하는 투자자들의 요구와 달리, 2017년 이후의 신규 월세 공급은 구조적으로 막히는 상황이어서 앞으로는 월세 공급 절벽이 예상된다. 특히 신규로 월세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다. 물론 이미 월세를 받던 임대인이라면 이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2017년 이후 월세 투자를 계획했다면, 안타깝게도 이미 버스는 떠나버렸다. 그런데도 여전히 ‘은퇴 후 월세로 월급받자‘는 책들이 넘쳐나는 걸 보니 신규 월세 공급이 잠정적으로 막혔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56)

정부는 간주임대료 제도를 통해 갭투자자들에 일종의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세금에 대한 유명한 개념 중 ‘조세 부담‘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공급자와 수요자 중 누가 어느 정도의 조세를 내느냐 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 그런데 우리나라는 만성적으로 집이 부족하기 때문에 공급자가 과세의 부담을 수요자에게 전가시키기가 대단히 유리한 구조다. 조세 부담은 약자에게 더 큰 문제가 된다. 즉, 조세 부담을 강화할수록 주택을 많이 보유한 다주택자들이 임차인들에게 그 부담을 전가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67)

이처럼 어떤 지역에서 최초로 분양하는 단지는 가장 낮은 수준의 분양가로 책정된다. 따라서 뉴타운 같은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아니더라도, 해당 지역의 최초 재건축 재개발 대상 분양권을 매입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투자 전략이다. 이는 2017년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21)

집을 한 채 사고 다시 다른 집을 샀다가, 처음 산 집을 매도하는 한시적 2주택자인 경우, 신규주택을 매입한 후 2년 내에 종전 주택을 매도하면 양도세가 면제된다. 따라서 2주택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이와 같은 투자 수익을 현실화하는 시점에서 세금을 절세하는 방법까지 고민하기 시작해야 한다. (151)

아무 생각 없이 덜컥 갭투자를 했다가 3주택 이상을 소유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텐데, 이는 지양해야 하는 상황이다. 1~2주택 상태를 유지하면서 2년 이내에 종전 주택을 매도하고 양도세를 면제받는 식으로 투자를 하는 것이, 3주택 이상을 유지하면서 양도세 전액 내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따라서 2주택 이상 보유할 예정이라면 무조건 세금부터 공부해야 한다. (152)

부동산 시장이 투자 관점에서 장점이 많은 시장이지만, 그 장점에만 함몰될 것이 아니라 금융 시장의 전문가들과 네트워크를 쌓으면서 리스크를 피하는 데 활용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오프라인 커뮤니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인터뷰할 시간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진짜 금융 경제 전문가들을 만나서 충분히 공부하여 나의 지식으로 만들라.
남의 지식으로 높은 투자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59)

이런 재간접 펀드의 장점은 다양한 부동산 자산으로 분산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른빌딩만 매입하는 게 아니라 이런 펀드에 지분을 투자하는 재간접 펀드에 가입함으로써 다양한 부동산 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 일반적인 부동산 펀드는 수익형 부동산에 투자하고 3개월에 한 번 배당하기 때문에 개인투자자라면 은퇴 후 노후 자금을 부동산 펀드에 투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174)

도시정비법과 소규모 재정비법 신설을 통해서, 노후 단독주택을 신축으로 리모델링할 때 인센티브를 주는 법 시행도 임박했다. 이제 정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개축...되는 길이 열렸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러한 단독주택 시장의 변화는 꽤나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179)

소규모정비법은 태생부터 크게 태어나지 못한 군소 노후 주택 지대를 정비할 목적, 그리고 대규모 주택재개발 사업의 정비구역에서 지정 해제된 지역을 별도로 정비하기 위해 필요하다. ... 이런 소유주들이 정비구역 지정 해제를 요청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주택의 노후도는 급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비해야 할 필요성은 있기에 소유주들이 알아서 정비사업을 할 수 있도록 자율주택정비사업 모델이 탄생했다. 아파트라면 소규모 재건축이 될 것이다.
따라서 정비구역이 해제된 일부 지역에서 노후빌라를 매입하여 자율주택정비사업을 한다거나 나 홀로 아파트를 매입해서 소규모 재건축을 진행하는 것이 괜찮은 투자 방법이 되고 있다. (183)

더 큰 문제는 일반가구만 포함한 가구추계에 기반하여 정부나 정책기관이 주택공급계획이나 토지공급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198, 음, 설마 전문가들이 그런 실수를? 아니면 외국인 가구 수가 120만이라고 해도 여전히 전체 2200여 가구에 비해서는 작은 포션이니까 빼고 가는 것은 아니고?)

임차제도의 문제도 주택노후화의 주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전세제도는 주택 가격의 70%에 이르는 큰 목돈을 두고, 기존 임차인의 퇴거와 신규 임차인의 입주가 같은 날짜에 이뤄지도록 한다. 살던 사람이 이사하는 날에 동시에 나도 입주하게 된다는 의미다. 서로 수리할 틈이 없이 입주해야 하고, 거주 중에 겨우 도배를 하거나 인테리어를 하는 불편을 겪는다. ...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전세제도는 적정 시기에 유지 보수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216)

이처럼 제주도는 이사가 연초의 특정 기간인 7~8일 사이에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집을 도저히 수리를 할 수 없는 체제가 정착되어 있다. 그러니 해풍이라는 물리적 환경은 물론 동시다발적인 이사로 제주 주택의 노후화는 다른 지역보다 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집은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늙어간다. (217)

실제 정비사업 이후의 주거비용을 지불하기 못하는 소유주는 전용면적 59m2의 경우 약 57%, 전용면적 84m2의 경우 약 78% 수준으로 그 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 정도 비율이면 재개발 이후 빌라 임차인뿐 아니라 소유주도 거의 손 바뀜이 된다고 봐야 한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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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식민지 대만에서의 일본 식민주의와 문학/언어 개혁들

[2] 향토문학 운동과 대만어 표기법(모두 1930년대) 운동

ü  1920년대에서 30년대로 바뀌면서 전세계적인, 그리고 동아시아의, 사회-경제 불안정이 두드러지면서 일본 내 군국주의가 다시 세력 잡고 반-식민 운동 억압해서, 대만 내 급진적 반-식민운동 세력은 다 타도되고 개량주의자들은 그나마 1937(중일전쟁 발발)까지는 연명함.

ü  일본은 대만 식민 시작하자마자 일본어 전파했으나 1920년대까지 그 성과는 좋지 않았어 (전체 인구의 2.8프로만이 일본어 이해하는 것으로 잡힘).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은 일본어 전파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결과(공공장소에서 대만어 못 쓰고 일본어 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취직할 수 있게 하고 학교 밖에도 수많은 언어 교육 기관 세우고 등등), 1930년대에는 대만인구의 38%가 일본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통계 잡혀. 그러나 이 수치 과대평가하면 안 됨. 38% 중에서도 일본어를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유학파 빼면 잘 없었고, 38%의 사람들도 일상에서는 대만어를 이용했어. 38%는 바이링구얼 가능한 인구를 뜻하는 것이지 절대 일본어가 대만어 제치고 제1언어가 된 것을 의미하진 않아.

ü  언어에 대한 관심은 도쿄에서 공부하는 대만 유학생 조직에서 일찌감치 나타났어. 1919년 중국의 5.4운동과 뒤이어 번진 신문화운동, 그리고 1921년에 백화를 초등교육 교과서에 적용한 것(백화를 국어로)은 동시기(1920년대 일본이 그나마 조금 리버럴한 분위기로 갈 때) 대만 유학생들에게도 큰 계시를 주었는데, 대만인들에게 문제는 더 복잡했지. 문어와 구어를 일치,시키기 또는 쓰여진 구어 만들기라는 과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대만에서 다수 언어는 호클로인데 그것은 표기법이 없었고 중국 한자로는 그 언어를 다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

ü  이 당시에는 중국어를 쓰되 로컬 사정에 맞추어 조금 변형해 쓰자는 파이들은 중국 문화에 동질감 느끼면서 일본의 문화 동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부분 개량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진 편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대라고 한다면 이런 변형된 중국어는 전통 중국어와 전통 중국 문화에 손상을 가할 것이라는 의견 정도.

ü  1920년대 후반에는 더욱 가혹해진 통치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정치를 포기하고 문화 활동에 뛰어들었고, 또한 반-식민주의로서의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문학 이라는 관점이 더욱 강하게 이들을 사로잡았음.

ü  세월이 또 흘려 1930년이 되었을 때 풍경은 1920년대와는 싹 바뀌었어. 이미 말했듯이 개량주의자와 급진주의자 모두 큰 좌절을 맞보고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난다는 희망은 아예 버리게 되. 개량주의자는 중국인 정체성 가지고 일본을 벗어나 중국과 다시 결합한다는 희망이었는데 물 건너 갔고, 대만이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서 바로 서야한다는 급진주의자의 희망도 망상이 되어 버렸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만도 엄청 버거운 일이 되어 버려. 이 대만인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자는 것, 대만의 문학과 대만어의 스피릿을 갖자는 것(비록 대만어라는 것이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았더라도)1930년 향토문학론을 감싸고 있던 정신.

ü  바로 이 시기에, 1930년에 황이 향토문학론을 꺼내 들었고 1년 뒤에 그 논쟁이 엄청 크게 되. 1920년대에는 구어와 일치하는 문어를 만들어 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데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그리고 그 문어는 중국 백화)였는데, 이제는 향토문학, 즉 대만의 현실을 내용 삼는 문학을 써야 하며, 그 내용의 전달 역시 중국의 구어가 아니라 대만의 구어로써 해야 한다는 것이 황의 주장. 즉 대만어를 써야 한다는 주장.

ü  이에 대한 반대론자들은 1) 대만어는 아직 거칠고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2) 대만어에는 호클로어와 학카어가 있는데, 호클로어를 쓰면 학카가 반발할 껄?; 3) 대만어를 쓰면 중국과의 끈이 끓어져 버린다(는 주장으로 자신들의 중국 편향 문화정체성을 드러냄).  

ü  주목할 것은 대만문학과 대만어가 서로를 세워주는 존재로서 주창되면서 대만어 표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대만어를 로마자화하는(이미 그렇게 한 선교사 있었음) 데는 대부분이 반대함. 그들은 한자를 가지고 대만의 언어를 표기하기를 원해. 대만의 언어를 표현하기 위해 몇몇 한자를 더 만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한자로 표기하는 걸 원해. 그러니 그들 저변에 있는 중국/한족 정체성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거지. 또 이런 현상은 사실 너무 당연한 것도 있고. 대만 사람들은 로마자로 표기된, 즉 서양의 기원을 가진, 글자에 거부감 느껴서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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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식민지 대만에서의 일본 식민주의와 문학/언어 개혁들

 

[1] 향토문학 운동과 대만어 표기법(모두 1930년대) 운동의 전사정치적으로

ü  이 두 운동은 정치영역에서의 좌절로부터 비롯된 것. 개량주의자도 급진주의자도 모두 좌절.

ü  개량주의자들의 반-식민주의: 일본과 중국의 유학생들로부터 시작. 원래는 일본에 잘 적응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인데 한국 중국의 반-식민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반-식민주의에 눈뜸. 1920년대 초 신민계(한자는??) 설립으로부터 시작. 대만인에 대한 차별을 법에 새겨 넣은 법63조 철회 및 대만에 대만인에 의한 국회 설립(à 자치 운동)을 위한 탄원을 일정부에 총 15번 제출하였으나 아무 성과 없었고, 대만의 반식민주의를 지지하는 중국인들과의 연대도 큰 성과 없었고.

ü  개량주의자들과 중국의 관계: 일본은 대만과 중국을 서로 절연시키기 위해 노력함. 이런 상황에서 대만 개량주의자들은 중국과의 연대를 꾀함. 대만섬 인구의 80프로 이상이 대륙 한족이었으므로 자기 정체성을 중국인이라고 생각 했고. 그러나 중국인과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대만이 중국이면서도 후진적인 중국이라고 생각한 것. 이 후진성은 보존해야 할 것인 아니라 벗어나야 하는 것이야. 그래서 이 후진성을 벗어나 선진적인중국인이 되는 것을 원했고, 그 방법으로 (정치적 좌절이 명백해지면서) 학교, 강연, 세미나 등 통해 대만인들 계몽 교육하는 데 힘을 기울임. 그러나 중국과의 결합을 정말 원했나 하면 그것도 아님. 그런 당당한 중국인이 됨으로써 정말 중국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기 보다는 문화적 후진성을 극복함으로써 일본인과 차별받지 않는 상태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보아야 함. 개량주의자들의 반-식민활동 많이 알려져 있는 이유는 이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했기 때문. 이들의 활동은 일-제국주의에 직접적으로 도전한 것이 아니라서 공식적 활동이 가능했어. 반면 급진적 반-식민주의자들의 경험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왜냐하면 이들은 정치적으로 도전했고 그렇기 때문에 비밀리에 활동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야.

ü  급진적 반-식민주의: 이들은 개량주의자들의 자치 운동에 절대 반대했어. 그건 식민상태를 영속화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 1920년대 초 도쿄에 있었던 대만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바람이 불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대만 학생들의 사회주의 운동 조직이 생겨남 (정식 조직은 1927년에 도쿄에서). 이들이 사회주의에 끌린 이유는 사회주의가 약소민족의 해방을 주장했기 때문이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도 당시 큰 영향 미쳤고.) 이들이 보기에 일본은 중국과 대만의 공통의 적. 대만은 중국, 한국, 필리핀, 인도와 같이 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는 약소민족국가. 그니까 이들은 이미 대만을 정치적으로 하나의 구별되는 민족으로서 본 것인데, 사실 이 견해는 당시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만에 대한 시각과 다르지 않았어. 중국이 대만을 자신들에게 귀속해야 할 자신들의 일부라고 천명한 것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야.  

ü  대만의 정치적 정체성에 대한 시각은 양측이 완전히 달랐지만 양측 다 대만 문화의 고유함을 두드러지게 주장하지는 않았고 또 그 문화적 고유함을 정치적 행동의 이유로서 제시하지도 않았어. 대만 문화의 특수함이 문제가 된 것은 이런 양측의 정치 운동이 모두 철벽 탄압당하고 난 뒤인 1930년대에 일어난 문화 논쟁에서야. 이 두 논쟁은 하나의 동전의 양면. 하나는 문학을 대만 문화의 특수성을 재현하는 지적 활동으로 보았고, 다른 하나는 이 문학적 재현의 툴로써 언어를 본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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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시골생활은 처음입니다
바바 미오리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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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상 밖의 흡인력! 누구나 하는 가족 생활인데 그 질은 천차만별. 조각난 개인으로 흩어질 수도 있는 무른 단체인 가족이 하나의 새로운 취미를 공유하고 사랑하게 됨으로써 얼마나 단단하고 풍성하고 드넓은 존재가 되어가는지 보면 부러울 지경. 결혼 앞 둔 사람들은 같이 읽고 이야기해봐도 좋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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