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도 제대로 환영을 받고 민망한 채 대기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때 갑자기 어떤 개념이 떠올랐다. 영어로는 `work-sharing`, 한국식으로 말하면 `일감 나누기`였다. 이 개념은 자바 농촌 경제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며 문화인류학자 기어츠가 제기한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구 증가에 따른 노동력 과잉에 직면한 자바 농촌 사회는 다른 곳처럼 잉여 노동력을 도시로 밀어내거나 마을의 최빈곤층으로 전락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들에게 기존 일감을 나누어줌으로써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게 하는 방식,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빈곤의 공유`를 적응 방식으로 선택했고, 덕분에 큰 변혁의 씨앗을 기존 구조의 틀안에서 수용할 수 있었다. (33)
최근 바틱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사이의 심각한 외교 분쟁에 휩싸였다. 인도네시아와 유사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말레이시아가 관광 홍보 과정에서 바틱을 자신의 고유 문화인 양 소개했고, 이 소식이 인도네시아에 전해졌다.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며 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불만, 인도네시아 사람을 사주해서 자국이 아닌 인도네시아에서 테러를 일으켰다는 의혹, 바틱 말고도 다른 문화적 전통의 소유권을 말레이시아가 넘보고 있다는 의구심 등이 합쳐져 바틱은 여론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대중 시위가 일어났고 감정이 격해진 일부 집단은 자카르타의 말레이시아 대사관 앞에 검문소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정부 역시 기민하게 대처해서 이 문제를 유네스커에 제기했고 유레가 없을 정도의 완전한 승리를 얻어냈다. 바틱이 인도네시아의 무형 문화재로 등재된 것이다. (61)
우기와 건기라는 계절의 반복 때문인지, 인도네시아 전통 사회의 시간관은 순환론적 성격을 띤다. 즉 서구에서 확립된 단선적, 직선적 시간관과 달리 동일한 성격을 갖는 시간이 반복적으로 순환된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이런 시간관은 독특한 행동 양식을 낳았다. 하나의 예로, 전통 사회에서 사람들은 특정한 활동을 특정한 시간에 행하려는 경향을 가지는데, 그 일을 정해진 시간에 하지 못하면 동일한 성격의 시간이 다시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행했다. 전통 자바 사회에서 시간은 35일 단위로 순환하는데, 누군가를 방문하려다 하지 못했다면 35일을 기다렸다 방문하는 식이었다. (69)
수마트라의 언어가 공식어로 지정된 사실은 다종족 국가인 인도네시아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무엇보다도 다수 종족의 언어인 자바어 대신 채택됨으로써, 자바인의 정치경제적 지배에 관한 비자바인의 반감이 언어를 매개로 해 표출되지 않았다. 신생 국가에서 때로 다양한 갈등이 공식어를 향한 불만으로 표현되고, 그래서 상당수 아프리카 국가처럼 식민지 종주국의 언어가 공식어로 지정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최소한 인도네시아에서는 전개되지 않을 수 있었다. (81)
자바어 어휘가 풍부한 또 다른 요인은 각각의 현상에 개별적인 어휘를 부여하려는 경향이다. 문화인류학 교과서에 나오는 에스키모의 눈 관련 어휘의 분화에 버금갈 만한 경우를 자바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맨 처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동물과 그 새끼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한국어의 경우 개와 그 새끼, 소와 그 새끼는 다른 용어로 불린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새끼를 지칭하는 단어가 제한적이라면, 또는 내가 아는 어휘가 제한적이라면 마을 사람이 이야기해 준 어휘는 훨씬 많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신체의 털을 지칭하는 어휘도 세분화돼 있어서, `무슨 부위의 털` 같은 식이 아니라 각각을 가리키는 개별 용어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까지 기억나는 것은 엄지발가락 위에 난 털을 가리키는 단어다. (87)
양변제는 혈통적 귀속감의 중요성을 감소시켰고 자유로운 이름 짓기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주요한 구실을 했다. 이름에 사용되는 어휘의 선택에는 문화적 선호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름이 특정한 형식을 취해야 한다거나 특정한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의 관행은 확립되지 않았다. (115)
사실상 자바의 사회관계에서 중요한 측면은 ... 행동의 진실성이 아니라 관계에 있어 모든 불협화음의 성공적인 은폐다. ...... 표리부동이 일상적인 모습으로 정착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과 나누는 상호작용에서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게 된다. 타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외적인 모습이 내면적 상태의 표현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갭이 가져올 갈등 역시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132)
네 번째는 느리모nerimo, 있는 그대로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다. ... 그러려먼 확고한 의지가 있어야 하고, 자바 문화에는 이런 태도를 뒷받침해줄 방식이 존재하는데 `내 탓 하기`식 책임론이다. 나에게 적용하자면, 목요일에 도착한 것, 자카르타 외곽에 숙소를 잡아 관공서를 방문하기 힘들게 만든 것, 나아가 이곳으로 연구년을 오겠다고 결심한 것 모두 내 잘못이었다. (161)
예전부터 느꼈지만 쉽게 정리할 수 없던 인도네시아 사람의 행동 양식 중 하나는 정보 제공 방식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첫 번째 특징은 확실치 않은 답변이라도 말해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경험상 길을 묻는 내게 모른다고 답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190) ......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대답해주려는 이유로는 `마음이 편치 않아서`라는 표현이 주로 거론됐다. ...... 한 번에 많은 정보를 주지 않는 이유로는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라는 답이 나왔다. (191)
그 다음 날에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고, 야간 작업을 해야 하던 내게 마이크 소리는 점점 더 큰 소음으로 느껴졌다. 이제 독경을 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 찬송가를 전통 악기에 맞춰 귀청이 떨어져라 부르고 있었다. 동이 터올 때까지 잠들지 못했다. 몇 시간을 뒤척이자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필드노트에 쓰여 있는 표현은 당시의 내 상태를 잘 보여준다. `저 원수 같은 놈들.` (236)
자카르타에서 한 경험은 손님으로, 객체로 경험하는 현실이 주인으로, 주체로 경험하는 현실과 동일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줬다. 탁비란의 주체로 행렬의 중간에 끼어 마을을 돌아다닐 때, 밤 늦도록 목청이 터져라 `알라후 악바르`를 외치는 모스크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우리 마을 인구의 30퍼센트를 차지하는 기독교도에 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들에게는 알라를 찬미하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수 있으며, 밤새 마이크를 통해 방송되는 탁비란이 소수를 향한 다수의 폭력으로 이해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했다. (242)
시대를 뛰언머는 구스 두르의 성향을 보여주는 좋은 예는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을 향한 차별 철폐다. 구스 두르 정권 아래에서 이들의 종족 전통은 인도네시아 사회를 구성하는 정당한 요소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수파르토 체제 아래서 계속된 이들을 향한 강한 정치사회적 탄압, 그리고 일반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강한 반화교 정서를 고려해보면, 구스 두르가 없었다면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감조차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유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한 일 역시 구스 두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변화였다. 유교의 공식화는 이슬람화가 시작될 기미도 보이지 않던 50년대에 이미 제기됐지만 줄곧 언급조차 쉽지 않던 문제였는데, 구스 두르는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버렸다. 이런 혁신적 정책은 그 뒤 정치적, 사회문화적 영역으로 확산돼서 인도네시아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자유로움을 누리게 됐다. (248)
수련은 힘들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다시는 할 수 없을 과정을 거쳐야 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마음을 정화하는 것 정도는 초보적 수준에 속했다. 지금까지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방법은 논 한가운데서 정오의 햇볕을 응시하며 양 손을 프로펠러처럼 돌리는 수련이었다.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했지만 조금 지난 뒤 눈앞이 시커메졌고, 곧이어 나는 오토바이 뒤에 실려 누구하도고 대화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와 물을 마셔야 했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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