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Children and Death (Paperback, Reprint) - How Children and Their Parents Can and Do Cope With Death
Kubler-Ross, Elisabeth / Scribner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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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본은 번역의 유려함이 아쉽고 편집의 정확성은 심히 의심스럽다. 그래도 너무 중요한 문제라 가치가 있다. 친할아버지 외할머니 사촌오빠가 떠났다. 한 선생님과 한 친구가 암을 앓고 있다. 부모님은 약해만 지신다. 죽음을 이해하고 그것으로써 삶이 잘 완성될 수 있게 하는 일.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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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Children and Death (Paperback, Reprint) - How Children and Their Parents Can and Do Cope With Death
Kubler-Ross, Elisabeth / Scribner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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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죽음>

  • 이 책은 On Children and Death를 번역한 것일 터인데 저본에 대한 설명을 책에서 찾을 수 없고, 책 자체가 알라딘에 등록도 안 되어 있음. 이에 임시로 On Children and Death에 책갈피를 남김.  





인간이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전체의 일부분이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정된 삶을 사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과 분리된 것으로써 경험하는데, 그것은 일종의 시각적 망상...이다. 이 망상은 일종의 감옥...이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가까운 친지 몇 사람만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 아름다운 자연 전체를 포용하기까지 사랑의 폭을 확대함으로써 이 감옥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키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ii)

죽음을 두려워하고 맞서 싸우기보다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으승이 될 수 있다. 죽음에 대해 어른들보다 훨씬 많이 아는 어린이들이 많다. 어른들은 이러한 어린이들의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해버리거나, 아이들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해버릴른지 모른다. 그러나 십년후 그들 자신이 "최후의 적"과 마주할 때 이러한 가르침을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작은 어린이들이야말로 훌륭한 선생님들이고 자신들은 풋내기 학생들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ix)

얼마나 더 지나야 의료진들은 진정제 자체가 암이나 마찬가지로 사람을 해치는 큰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인가? 이해심을 갖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줌으로써 안정제를 대신할 수 있고, 건전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 환자의 고통이나 분노를 표현하도록 돕고, 치유의 과정이 진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줌으로써 그러한 비극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데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가? (37)

이런 집단들은 서로의 고통뿐 아니라 희망도 같이 나눈다. 자기 아이가 임박한 죽음에 대해 내적자각을 하고 있었던 징후를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이와 비슷한 `예감`을 가졌던 다른 사람들과 특수한 면을 함께 나눔으로써 위안을 얻으며,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린이의 즉흥적인 그림, 창작적인 미술작품, 시,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은 아이들의 말 등 그들의 숨겨진 메시지의 뜻을 어른들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된다. 어떤 아버지는 아이가 변사 당한 후에 아버지날 카드를 발견하기도 하고, 부엌 테이블에서 "엄마, 사랑해요"라는 쪽지를 발견하기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무의식적인 그림의 주제나 색깔의 선택에서 임박한 죽음의 내적 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48)

"깊은 계곡에 폭풍우가 치지 못하게 하였다면, 그 아름다운 계곡은 볼 수 없었으리." (66)

"제게는 엄마가 대니가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게하고는 곧 그것을 산산히 부수어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대니가 괜찮다고 말했는지를 저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엄마에게 거기에 대해 한번 물어보였는데, 엄마에게는 대니가 괜찮은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더이상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안받으니 잘 된 것이라고요. 그러나 10살이었던 나에게는, 죽는다는 것은 결코 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101)

"저는 생각했어요, 내가 계속 병원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 손녀를 결코 볼수도 없었을 것이고, 안아주지도,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나의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지만, 머리를 약간 돌려서 건강과 행복의 덩어리인 아기가 내 팔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아기는 자기의 작은 팔롸 손을 들고 손가락을 쳐다보았어요. 아기는 기쁜 얼굴로 신기하다는듯이 작은 손가락들을 모두 움직여보았어요. 나는 속으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나는 이 모든 것들을 55년동안 가졌었다. 이제 그것을 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 때문에 운명을 저주하는 대신에 가진 것들을 축복하려는 작은 노력을 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122)

그들은 재판제도가 너무 관대하고, 느리며, 부당하고, 편견에 차있고, 희생자의 가족에게 너무나 동정심이 없는 데에 화가 난다. 그들은 "서부활극"에서 나오는 얘기를 기억한다. 거기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판결을 내리고, 범인에게 체벌을 주던 이야기들을 기억해내며 그들처럼 어떻게 이 살인자를 벌줄 수 없을까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생이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침내 살인자가 되었을 범인들도 이와 비슷한 반응을 한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테레사 수녀가 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는 반면, 히틀러가 될 잠재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136)

거의 마지막이 오던 어느날 린지는 칠판을 마구 칠하고는 암이 거기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못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몇일 수에 병원의 검사를 통하여 린지의 말이 옳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적어도 의식적으로는 린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린지는 1년 전에 아주 쉽게 죽을 수도 있었지만, 내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그애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 내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 동안, 그는 나로 하여금 성장하고 이해하도록 서서히 돕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에게 `OK`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올 때까지, 그냥 `떠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런지가 죽고 다시 태어난 그날, 나도 나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경험하였습니다. (153)

이제 아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전화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라는 공허한 제의는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사람의 필요에 꼭 맞는 한 가지 특별한 일을 생각하려고 한다. 그집의 가자용 차를 닦는다든지, 개를 개보관소에 데려다 준다든지, 장례식동안 집을 봐준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만일 그 사람이 `내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이 언젠가 내 신을 닦아 주었기 때문이지요`라고 대답한다. (190)

요즘에는 `전혀 사랑하지 못했던 것보다는 사랑했다가 잃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말이 여자와 남자 사이의 사랑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어린 아들의 죽음에 대한 말로 더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무척 괴롭기는 하지만 6살 반의 크리스챤이 우리에게 준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아직도 어린애 없이 사는 사람들은 평생동안 무슨 재미로 사는지 궁금하다. 어떤 이들은 개나 애완동물을 한 두 마리 키우면서 이런 것에 몰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오랫동안 사람을 만족시키거나 붙잡지 못하지 않는가.
또한 외롭거나 혼자 살거나 어린애가 없는 사람들은 어떤지도 알고 싶다. 이러한 일을 당한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이런 비극을 겪었던 것인지 어쩐지 궁금하다. (212)

나의 오랜 에스키모 친구처럼, 본인이 미리 장례식을 준비한 것이라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친구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왔음을 알고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옛 친구들을 모두 불렀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옷을 입고 친구들을 위해 작은 선물까지 준비해 놓고서 자기 육체를 떠났다. 그럴 때 장례식은 진정한 축하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장례식 참여자들은 죽은자가 자신의 마지막 여행에 대한 준비를 하였고 자기가 마련한 잔치에 친지들이 참석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하였음을 안다. (242)

전에도 말했듯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 그 육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손상된 부위는 헝겊 등으로 가리는 것이 좋으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까운 친구와 함께 가야 한다. 이것을 피하는 것은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놓을 뿐이며, 뒤늦게 불필요하고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겪게 만든다.
소위 문명사회에서는 죽은 사람을 장례식 때까지 집에 둔다는 것은 여러 면으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였을 때 그렇게 하는 것이 보다 더 치료적인 방법이다. 죽은 아이를 시체 공시소에 바로 집어넣었다가 냉동실에서 꺼내어 죽은 아이의 시체를 보게하거나 확인하게 하는 등 차겁고 비인간적인 환경은 유족에게 위로나 도움을 주지못한다. (243)

나는 유럽에서 용감하게 암과 싸우고 있는, 죽음 직전의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죽기전 자신의 장례식에의 초대장을 평소의 독립적인 자기성품에 맞게 준비했다. (자기사진 뒷면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긴 여행을 떠납니다.
와서 작별인사를 해주십시요.
(그 뒤에는 날짜와 장례식 장소가 있었다.) (246)

하루의 일과가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시작될 것이다. 무덤은 막다른 길이 아니라 뚫려진 길이다. 그 길은 석양에 닫혔다가 동 틀 때에 열린다. 죽음을 올바로 이해하자.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앞서 말했듯이 죽음은 멸망과 올가미가 아니므로 열려진 무덤의 어두움 속에서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재발견된다. 무덤은 회복의 장소이다. 거기에서 영혼은 그 충만함을 회복하며 육체와 욕망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부담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죽음은 가장 큰 해방이다. 최선을 다 해 산 사람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오르고, 지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 사람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웠던 사람은 숭고해진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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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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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읽었던 책 읽으며 다시 감동 받는 것은 혹시 내가 제자리 걸음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 책 말하듯 꾸준히 훈련하며 글 속에서 현존해 왔다면 범상히 여길 조언들을, 그렇게 못했으니 한탄하며 줄을 치는 것인가? 우리에겐 위대한 작품 아니라 미증유의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는 자유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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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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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훈련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 다시 말해 인내심과 공격하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세계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간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법칙은 없다. 진짜 소중한 것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가는 과정이다.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도 나중에는 정신병자나 알코올 중독자,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우리에게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와 소설을 방편으로 삼아 진정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9)

"당신의 작은 힘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하게 만드는 건 `위대한 결정자`입니다. 당신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신이, 당신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 즉 새, 나무, 하늘, 달 그 밖의 무수한 생명의 흐름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만 위대한 결정자가 당신을 도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인정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욕심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사람마다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 때를 만날 수도 있고,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고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써라. (39)

나는 대학시절 룸메이트를 쫓아내고 싶을 때마다 큰 소리로 읽었던 제랄드 마레이 홉킨스...의 `신의 웅장함...`이란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를 읽기 무섭게 학생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 학생이 위대한 흑인 시인인 랭스턴 휴즈...의 시집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읽어 주세요."
그렇게 해서 45분의 수업 시간은 학생들이 듣고 싶어하는 흑인 시인들의 작품을 큰 소리로 읽는 것으로 채워졌다. (61)

예루살렘에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예드 바쉠...이 있다. 그 옆에는 6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 이름을 정리한 도서관도 딸려 있다. 도서관에는 희생자 이름뿐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 그들에 대해서 알아 낼 수 있는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실제로 예드 바쉠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이다. 죽은 이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어도 상관없는 이름 없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고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침이면 일어나 노란 치즈를 사러 가게로 향했고, 크고 작은 삶의 소망을 품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 지상의 모든 슬픔과 겨울을 겪었고 한때 쿵쿵거리는 장엄한 심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86)

월급쟁이들은 시간과 돈을 맞바꿔, 일한 시간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 그 땅을 팔라고 하면, 제정신이 있는 작가라면 결코 그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땅을 팔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조용히 안식을 하고 꿈을 꾸는 데 필요한 장소는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 있다. (92)

파리에 갔을 때 발길 닿는 곳마다 카페가 많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그곳의 카페를 보면서 손님을 서두르게 만드는 불친절한 미국 카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아침 여덟 시에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오후 세 시까지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여도 아무런 눈총을 받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움직이는 축제>에서, 자신이 앉은 테이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임스 조이스가 있었다며 카페에서 글을 쓰는 광경이 파리에서는 얼마나 일반적인가에 대해 적고 있다.
지난 6월 파리에 갔을 때도 나는 많은 미국 작가들이 점점 비애국자로 변절해 간 이유를 절감했다. 파리에서는 길 하나마다 카페가 적어도 다섯 개씩은 있었고, 이 카페들은 모두 손님들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글 쓰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152)

평범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 오래된 커피잔, 참새, 도시버스, 얇은 햄 샌드위치에 존경을 표해 보라.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계속 그 목록을 늘려가라.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글의 형태와 장르에 상관없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단 한 번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162)

일본에는 뛰어난 하이쿠를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강이나 개울에 띄워 보내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작가란 모름지기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아주 의미심장한 우화다. (195)
......
즉흥 글쓰기 창구는 글을 떠나 보내는 데 더없이 좋은 훈련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 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당신은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198)

가끔 처음부터 문장 구조도 완벽하고 서술력도 좋으며 세부 묘사도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계절마다 불어오는 태풍, 독촉한 겨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들의 글쓰기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개척지를 개간하고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한다. (206)

어느 화요일 저녁에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그 학생들은 내가 흔들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모두 글쓰기의 기분이 단단하게 잡혀져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 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 버린 바보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름대로 내 요구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흔들고 싶었지만 흔들 수 없었다. ..., 나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금지된 약물을 먹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이것은 좋은 작가가 되려면 LSD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꼭 경험해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당도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며, 이 죽음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6)

모범생이 되기 위한 모범생은 되지 말라. 규첵에 얽매이면 글쓰기에 필요한 `진짜 현실`이라는 반석을 얻지 못한다. 그냥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라.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난 매일 글을 쓰겠어" 따위의 규칙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짓은 하지 말라.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라. 글쓰기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인생을 바꾸어야 했던 내 친구처럼, 그 반대 역시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글쓰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면 결국에는 글쓰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214)

이렇듯,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믿음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또 다시 기억할 것이다. (219)

"뉴욕 전시장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네브라스카 주로 돌아가는 게 좋아.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야만 해."
나는 우연히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옳은 말이다. 만약 당신이 완전한 작품을 쓰고 싶다면, 당신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 주말마다 외출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근원을 명예롭게 여기고 그것을 껴안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228)

하지만 그저 머물기 위해서라면 집으로 가지 말라.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장 글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231)

그러니 집으로 가라. "우리 삼촌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육군 대령이었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 가족과 친척들 속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인생과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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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배신 - 질병을 키우는 식품첨가물과 죽음의 온도 120도
윌리엄 레이몽 지음, 이희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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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크푸드`는 가리키는 바가 한계 있으며 각성시키는 효과도 다했다는 판단 아래 제시하는 새 말이 독소식품(toxic food). 대규모 공업화된 현대 식품산업의 존재를 더욱 드러내며, 그렇게 생산된 식품은 21세기 담배로서 은유 아니고 실제로 독이라는 주장. 그 밖에 새로운 건 없고, 글솜씨도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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