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글쓰기 훈련의 중요한 목표 가운데 하나는 자신의 몸과 육체를 믿는 법, 다시 말해 인내심과 공격하지 않는 마음을 키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예술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세계다.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간에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법칙은 없다. 진짜 소중한 것은 작품과 더불어 우리의 삶을 꾸려 나가는 과정이다. 위대한 작품을 남기고도 나중에는 정신병자나 알코올 중독자, 심지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우리에게 올바른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시와 소설을 방편으로 삼아 진정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9)

"당신의 작은 힘으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을 하게 만드는 건 `위대한 결정자`입니다. 당신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당신이, 당신 배후에 존재하는 우주만물 즉 새, 나무, 하늘, 달 그 밖의 무수한 생명의 흐름들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에만 위대한 결정자가 당신을 도와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합니다."
......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인정할 수 있으며 쓸데없는 욕심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그렇지 못한 것은 그저 사람마다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 때를 만날 수도 있고, 죽은 후에야 찾아올 수도 있다. 빠르고 늦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계속 써라. (39)

나는 대학시절 룸메이트를 쫓아내고 싶을 때마다 큰 소리로 읽었던 제랄드 마레이 홉킨스...의 `신의 웅장함...`이란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내가 시를 읽기 무섭게 학생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한 학생이 위대한 흑인 시인인 랭스턴 휴즈...의 시집을 나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읽어 주세요."
그렇게 해서 45분의 수업 시간은 학생들이 듣고 싶어하는 흑인 시인들의 작품을 큰 소리로 읽는 것으로 채워졌다. (61)

예루살렘에는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예드 바쉠...이 있다. 그 옆에는 6백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 이름을 정리한 도서관도 딸려 있다. 도서관에는 희생자 이름뿐 아니라,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비롯해 그들에 대해서 알아 낼 수 있는 모든 기록이 보관되어 있다. 실제로 예드 바쉠은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는 뜻이다. 죽은 이들은 짐승처럼 도살되어도 상관없는 이름 없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이었고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내며 숭고한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침이면 일어나 노란 치즈를 사러 가게로 향했고, 크고 작은 삶의 소망을 품고 있었으며, 동시에 이 지상의 모든 슬픔과 겨울을 겪었고 한때 쿵쿵거리는 장엄한 심장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86)

월급쟁이들은 시간과 돈을 맞바꿔, 일한 시간에 대한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작가들은 자신만의 시간을 지키고 있으며, 그 시간의 중요성과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시간을 팔아 돈을 벌지 않는다. 이들에게 시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과 같은 것이다. 누군가 찾아와 그 땅을 팔라고 하면, 제정신이 있는 작가라면 결코 그 땅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땅을 팔면 자동차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되면 조용히 안식을 하고 꿈을 꾸는 데 필요한 장소는 사라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은 조금 어수룩한 바보가 되어도 괜찮다. 당신 속에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느림보가 들어 있다. (92)

파리에 갔을 때 발길 닿는 곳마다 카페가 많다는 사실에 나는 무척 놀랐다. 그곳의 카페를 보면서 손님을 서두르게 만드는 불친절한 미국 카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아침 여덟 시에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오후 세 시까지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여도 아무런 눈총을 받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움직이는 축제>에서, 자신이 앉은 테이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임스 조이스가 있었다며 카페에서 글을 쓰는 광경이 파리에서는 얼마나 일반적인가에 대해 적고 있다.
지난 6월 파리에 갔을 때도 나는 많은 미국 작가들이 점점 비애국자로 변절해 간 이유를 절감했다. 파리에서는 길 하나마다 카페가 적어도 다섯 개씩은 있었고, 이 카페들은 모두 손님들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글 쓰는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152)

평범한 것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을 배우라. 오래된 커피잔, 참새, 도시버스, 얇은 햄 샌드위치에 존경을 표해 보라.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보라. 계속 그 목록을 늘려가라.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 글의 형태와 장르에 상관없이 이 목록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단 한 번이라도 언급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라. (162)

일본에는 뛰어난 하이쿠를 적은 종이를 병에 담아 강이나 개울에 띄워 보내는 시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이것은 작가란 모름지기 자기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아주 의미심장한 우화다. (195)
......
즉흥 글쓰기 창구는 글을 떠나 보내는 데 더없이 좋은 훈련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 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당신은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198)

가끔 처음부터 문장 구조도 완벽하고 서술력도 좋으며 세부 묘사도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계절마다 불어오는 태풍, 독촉한 겨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들의 글쓰기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잘 쓰는 글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개척지를 개간하고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것을 주저한다. (206)

어느 화요일 저녁에 했던 수업이 생각난다. 그 학생들은 내가 흔들어 보기가 힘들 정도로 모두 글쓰기의 기분이 단단하게 잡혀져 있었다. 나는 그들이 한 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 버린 바보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학생들은 나름대로 내 요구를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는 그들을 흔들고 싶었지만 흔들 수 없었다. ..., 나는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어요! 여러분 중에는 금지된 약물을 먹어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이것은 좋은 작가가 되려면 LSD나 향정신성 의약품을 꼭 경험해봐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 삶에는 반드시 미쳐 버려야 할 시기, 사물을 바라보는 일상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렇게 견고하지도 않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삶은 언젠가는 당도할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며, 이 죽음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206)

모범생이 되기 위한 모범생은 되지 말라. 규첵에 얽매이면 글쓰기에 필요한 `진짜 현실`이라는 반석을 얻지 못한다. 그냥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라.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난 매일 글을 쓰겠어" 따위의 규칙으로 자신을 마비시키는 짓은 하지 말라.
하지만 이것을 기억하라. 글쓰기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인생을 바꾸어야 했던 내 친구처럼, 그 반대 역시 진실이라는 사실이다. 글쓰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면 결국에는 글쓰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214)

이렇듯, 작가가 되려면 아주 깊은 믿음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깊은 진실이다. 그리고 만약 작가가 아니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작가가 되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나머지 인생 동안 가야 할 길이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또 다시 기억할 것이다. (219)

"뉴욕 전시장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는 네브라스카 주로 돌아가는 게 좋아.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야만 해."
나는 우연히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옳은 말이다. 만약 당신이 완전한 작품을 쓰고 싶다면, 당신이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모님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 주말마다 외출 허락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더 깊은 곳을 들여다 보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근원을 명예롭게 여기고 그것을 껴안기 위해서. 아니면 적어도 인정하기 위해서라도. (228)

하지만 그저 머물기 위해서라면 집으로 가지 말라.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 회피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장 글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231)

그러니 집으로 가라. "우리 삼촌은 제 2차 세계대전 때 육군 대령이었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 가족과 친척들 속으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모든 사람들이 인생과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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