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왜 안 중요해? 난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넌 조류 연구가가 되고 싶잖아. 늪지의 그 미국인 화가처럼 되고 싶잖아. 우리가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다면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방 안에 정적이 감돈다. 프레데리크의 방 창문 너머 바깥 나무들엔 생경한 빛이 걸려 있다. 프레데리크가 말한다. "네 문제는, 베르너, 넌 아직도 너만의 인생이 있다고 믿는 거야." (19)
프레데리크는 일곱 번째 매질까지 버티다가 쓰러진다. 그다음엔 여섯 번. 그 다음엔 세 번이 된다. 우는 법도 없다. 그만둬 달라고 부탁하는 법도 절대 없는데 특히 이 때문에 살해 욕구를 짓밟힌 사령관을 부들부들 떨게 만든다. 프레데리크의 몽상가적 기질, 그의 남다름이 향기처럼 그에게 감돌아서, 누구나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다. (40)
베르너는 늘 집 생각을 한다. 그의 방 지붕창 아연 지붕으로 떨어지던 빗소리가 그립다. 야생동물처럼 기운 넘치던 고아들. 응접실에서 아기를 얼르던 엘레나 아주머니의 깔끄러운 노랫소리. 여명에 잠긴 코크스 공장에서 밀려오던 냄새. 매일 제일 먼저 찾아오던 그 든든한 냄새. 무엇보다 그는 유타가 그립다. 의리 있는 동생, 고집 센 동생, 무엇이 옳은지 늘 간파하는 것 같은 동생의 면모가. 그러나 평소보다 마음이 허해지면, 그는 동생의 다름 아닌 그 면모에 골이 난다. 어쩌면 동생은 학교의 깡패들이 감지할 수 있는 그 안의 불순물, 그의 신호음 속 잡음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동생은 그가 완전히 투항하지 않도록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78)
베르너는 마르틴의 눈빛에서 불안을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 베르너는 점점 더 의심을 품게 된다. 인종적 순수, 정치적 순수....... 바스티안은 종류와 상관없이 부패에 혐오를 표하지만, 그럼에도 베르너는 한밤중이면 회의가 든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부패 아닐까? 한 아이가 태어나고, 세계는 그 아이를 토대로 펼쳐지기 시작한다. 아이에게서 이것저것을 취하고, 아이에게 이것저것을 채워 넣는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빛의 모든 입자....... 몸은 결코 순수해질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로 총통은 그들의 코 길이를 재고, 그들의 머리 색깔을 계측하는 것이라고 사령관은 단언한다. 패쇄계의 엔트로피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99)
그가 이름을 말하자. 그녀가 말한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때 말이에요, 베르너, 사람들이 나더러 용감하다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떠났을 때도 사람들은 내가 용감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에요. 내겐 달리 방법이 없었는걸요. 난 자고 일어나면 그저 내 인생을 사는 거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베르너가 말한다. "몇 년 동안은 그러질 못했어요. 하지만 오늘, 오늘은 그랬던 것 같아요." (371)
달빛이 반짝이며 부풀어 오른다. 찢어진 구름들이 나무 위를 휙휙 질주한다. 나뭇잎들이 사방에서 날아다닌다. 그러나 달빛은 부는 바람에도 동요하지 않고, 베르너가 보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차분하게 구름을 뚫고, 허공을 뚫고 지나간다. 그 빛줄기들은 풀들이 드러누운 들판에 넓게 걸쳐져 있다. 왜 빛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들판 저편에서, 미군 하나가 환자 텐트를 떠나 숲을 등지고 걸어가는 한 소년을 주시한다. 그는 일어나 앉는다. 한 손을 든다. "멈춰." 그가 큰 소리로 말한다. "정지." 그러나 베르너는 이미 들판 끝을 지나, 세 달 전에 독일군이 그 곳에 설치한 지뢰를 밟고, 분수처럼 치솟아 오르는 흙 속으로 사라진다. (392)
아르덴 위로, 라인 강 위로, ...그밖에 우리가 국가라 부르는, 상흔이 남은 채 끊임없이 변하는 풍경 위를 오가는 항의 메일, 예약 알림 서비스, 주식 시장 업데이트, 보석 광고, 커피 광고, 가구 광고. 그런데 영혼도 그와 똑같은 경로로 돌아다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믿는 건 그렇게 어려운 걸까? 아버지와 에티엔 작은할아버지와 마네크 아주머니와 이름이 베르너 페닝이었던 그 독일 소년이 왜가리처럼, 제비갈매기처럼, 찌르레기처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늘을 들쑤실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혼을 실은 그 거대한 셔틀이 주변을 날아다닐지도 모르며, 희미하지만 귀를 바짝 가져다대고 들으면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굴뚝 위를 날아 다니고, 보도를 미끄러지고, 우리 재킷과 셔츠의 흉골과 폐 틈새를 스르르 통과해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도서관과 모든 생명의 기록이 담긴 공기, 내뱉어진 모든 말, 전송된 모든 단어가 여전히 그 안에서 울리고 있다. (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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