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전골이라. 교재 속 사진을 보니 우리집은 안 해먹는 음식이다.

궁중요리 느낌이 난다. 모양이 예스럽다. 아니 빛바랜 색동저고리처럼 좀 촌스럽다. 

 

재료 준비하는데 손이 많이 가서 그렇지 어려운 건 아님. 

 

숙주는 끊는 물에 데치고 끝. 찬물로 헹구지 않는다.

고기와 표고는 양념 같이 쓴다. (이 양념에 설탕 넣나?? 모르겠네.)

전골남비에 재료 배열할 때 같은 색끼리 나란히 앉히지 않도록 주의!

 

이해가 안 되는 건 익힌 소고기 위에 반숙 계란을 놓는 것. 이 조합 이상하다. 먹어봐도 좀... 이상하다. 

 

심지어 노른자 위에 잣도 올린다. 잣을 올리니 박물관에서 봤던 먼지 앉은 음식모형 같은 느낌.

 

다음엔 잣을 꽃모양으로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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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북어!

즐거운 마음으로 북어구이 제작에 착수.

 

유장(참기름 多+간장 少) 바르고 애벌구이 (석쇠 달군 뒤 식용유 코팅하고 사용! 안 그러면 북어가 석쇠에 달라붙는 참사 발생)

고추장 양념 바르고 진짜 구이.

 

애벌구이를 어느 정도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진짜로 구울 때는 양념 속 설탕이 지글지글 할 때 칼같이 불에서 떼라고 하는데,

불이 약해서인지 설탕이 타는 조짐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말린 북어는 그대로도 먹으니 다 안 익었어도 탈은 없겠쥐,라고 맘대로 생각하며 접시에 담아 냄.

 

사진으로 보니 고추장 양념이 골고루 발라지지 않았고, 다진마늘도 충분히 다져지지 않아 여기저기 눈에 띔. 

얼른 끝내고 싶어서 서둘렀던 흔적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차분한 마음으로 요리에 집중하지 않으면 이렇게 곧 요리에게 반격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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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후추 집에 있는데도 요리할 때면 습관적으로 갈아져 나온 오뚜기 후추에 손이 갔는데,

오늘 의외의 요리를 하며 의외로 통후추를 쓰게 되었다. 그 요리 이름은 배숙!

 

만드는 방법은 초간단.

 

주의할 것은:  

1) 배의 모양잡기 (가로 세로 비율 신경쓰지 않으면 배가 뒤집어진다)

2) 설탕물 농도 조절 (농도 안 맞으면 배가 가라 앉는 참사가!)

3) 혹시 중간에 꾸물거리다 배가 갈변하면 안 되요. 설탕물에 담가놓기.

 

설탕맛이 싫어서 생강편을 많이 넣어서 끓였다. 그럼 수정과 비슷한 맛이 남.

 

일종의 조선식 후식인데... 이런 음식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음.

만들고 먹어보니 맛이

없거나(왜 굳이 설탕물에 끊여 익혀 먹는 걸까, 그냥 아삭아삭 깨물어 먹으면 제일 맛있는데...),

묘하거나(통후추가 씹힐 때 배와 어우러져 희한한 맛이 난다).

 

아까 부모님 집에 들려서 시든 배가 있길래 뚝딱 해드렸더니 의외로 맛있다고 하심.

예의상 그렇게 말씀하실 분들은 아니니, 어른들 입에는 맞는 맛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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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안 풀리거나 마음이 복잡해지면 살살 꾀가 나서 밖에 나가 사먹게 되는 밥!

바빴던 7월, 심란했던 8월, 되는 일 없는 9월, 벌써 10월. 4개월 째 사무실에도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 있다. 

 

오곡백과 열리는 이 계절.

'내 입에 들어가는 건 내 손으로 해먹자'는 초심이 생각나면서 뜬금없이 한식조리사에 도전하기로 결심.

 

필기 시험은 어떤가 한번 가서 보자고 신청해서 봤더니 패쓰. 그 자리에서 점수가 나오는 시스템, 좋아!

 

- 평소에 어떻게든 장 보고 밥 해먹고, 농협 잡지 구독하고, 이런저런 요리책 보며 언젠가는 해먹으리라는 마음으로 레시피 메모 해온 것이 많은 도움 되었음.

- 옛날 가정시간과 과학시간에 배운 것들도 시험 문제에 여럿 나왔음. 

- 전혀 모르겠던 것은 법령 관련 문제들. 일말의 고민 없이 3번이나 4번으로 찍었음.

 

얼렁뚱땅 필기가 붙었으니 이제는 한식조리사 실기 준비 시작할 차례.

슬슬 하다가 내년 상반기에 실기 한 번 쳐보자꾸나!

 

2016년 하반기의 마지막 연휴. 조리사 첫 요리는 칼국수.

 

밀가루 씹는 맛 밖에 안나서 거의 먹지 않는 칼국수.

생전 내 손으로 해 먹을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매도 먼저 맞기로 하고 조리사 준비를 위한 첫 요리로 삼았다.

 

반죽이 관건. 절대 질지 않아야 하고 면을 가늘면서도 붙지 않게 썰어야 한다.

면은 물이 끓을 때 투척하고, 부르르 4번이면 충분히 익은 것이니 바로 꺼내라. 

(안 그러면 면이 바로 불어서 더 먹기 싫어짐.)

 

1인분 밖에 안 했는데도 면 만드느라 손이 아리다.

 

국물은 멸치와 간장 소금으로만 하니 어려울 것은 없고,

고명은 호박 껍질과 표고버섯, 그리고 실고추.

고명 양념 조금만 하기. 너는 양념을 너무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면 만드는 데 한 세월인데, 먹는 것은 금방이라 허무함.

 

영양을 따지면 굳이 해먹지 않아도 되는 음식이 아닌지.

집에 밀가루 밖에 없을 때만 해먹을 음식일세.

 

참, 덧가루 많이 쳤다면 면을 끊는 물에 한번 샤워시켜서 국물에 넣으면 국물을 맑게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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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이런 일은 부잣집 거자에게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죄악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음...이며, 음은 특히 거자가 삼가야 할 것으로 인식되었다. 공원 안에서 망령과 만나 원한을 조정하는 재판이 이루어진다는 스토리는 너무나도 중국적인 이야기지만, 이는 그만큼 공원의 분위기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97)

거자의 노고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답안을 심사하는 고관들의 고생도 엄청났다. 이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붉은 글씨의 답안지를 앞에 두고 그 가운데서 우수한 답안지를 골라내야만 한다. 매일매일 비슷한 답안 무더기를 파헤치며 계속 읽어 나가기 때문에 담당관들도 약간 정신이 나간다. 그 답안지에는 수험생의 온 정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끔은 실비한 힘을 발휘하여 고관의 심리를 교란시킨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신비한 힘을 발휘하려면 역시 인간의 행동을 늘 감독하고 있는 신이 조력해주어야만 한다.
어느 정고관이 한 장의 답장을 보고 있는데 쓸 만해 보이는 부분이 아무 데도 없었다. 낙제점을 매기려고 붓을 들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된다!..." (105)

사제 관계란 예전에는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과거가 유행하고부터 오로지 시험관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변하였다. 반면에, 학문을 손수 가르쳐준 선생은 단순히 수업을 해주는 스승이라고 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을 해주는 스승에게는 꼬박꼬박 수업료를 납부하기 때문에 이미 금전으로 거래가 끝났다고 보는, 지극히 냉정한 구분 방식이다. 그러나 시험관은 조정으로부터 임명되어 누구를 합격시키든 자유이지만 특별히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알아주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히 지기...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시험관은 그저 한 번 답안을 심사해주었을 뿐이지만,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관료 사회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자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천자 쪽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 즉 당파를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금지령을 내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112)

사형된 사람 가운데 정고관 백준은 1품 대관, 지금으로 따지면 국무 총리급의 거물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전국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과거 관계자들이 숙연하게 몸가짐을 바로 함으로써 한동안 시험을 둘러싼 폐해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서는 시험장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이처럼 큰 희생을 치른 대숙청도 그 기억이 시간과 함께 희미해지자 다시금 기존의 폐해가 반복되어 19세기 말에 이르면 이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부패한 공기가 시험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초에 과거제도 자체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123)

수만 장에 달하는 향시 답안지 가운데 합격자의 것은 엄중히 포장하여 북경으로 보내지만, 더 많은 다수의 낙제 답안지는 대체 어떻게 될까? 본인이 희망할 경우에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 시험장에 가서 받아 올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일거양득으로, 특히 거자는 필사한 주권에 적힌 고관의 평가를 보고 자신의 문장에서 어디를 고쳐야 할지 배우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123)

일단 이 같은 사적인 당파 결합이 이루어지면 천자의 권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로까지 치달아버린다. 그래서 송의 초대 천자인 태조...는 공거 뒤에 또 한 차례의 시험을 추가했다. 태조는 스스로 시험관이 되어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은혜를 베푸는 형식으로 합격자들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삼고 직접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관료의 대단결을 꾀하려 했다. 이 시험이 전시의 기원으로, 역대 천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청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148)

청 대 초기에 독권대신은 그 명칭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실제로 답안지를 읽어서 천자에게 들려주었다. 이는 오래된 연원을 갖고 있는데, 송대에도 고관이 전시의 답안 가운데 우수한 것을 골라 천자 앞에서 번갈아가며 읽었다. 송 대 인종...의 긴 치세 중에 왕면...이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여러 차례 전시 고관으로 뽑혔다. 그는 음성이 청아하여 문장을 읽을 때 억양이 매우 듣지 좋았으므로 왕면이 읽는 답안지는 언제나 천자의 마음에 들어 최고점을 받았다. 그 때문에 공사들은 제발 자신의 답안지가 왕면에게 읽혀지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정도라고 한다. (165)

장원이 이렇듯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장원에게 지워진 책임 또한 무거워졌다. 원래 천자가 진사에게 더없는 영예를 주는 것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조정을 위한 기둥이 되어서 일해달라는 뜻이었다. 특히 장원은 다른 진사와 달리 파격적인 은전을 받은 이상 스스로도 이러한 은혜에 감사하면서 천자 앞에 아낌없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해야만 했다. 남송이 몽골족의 원나라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고 망했을 때 이미 대세는 만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원 출신의 재상인 문천상...은 얼마 안 되는 수하 병사들을 이끌고 각지를 돌면서 한족...을 위해, 아니 송의 천자를 위해 엄청난 기염을 토했다. 그가 패전 중에 부른 양정양...의 시...는 장원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181)

이런 도교 사상은 지나치게 현실을 긍정한 나머지 불만이 생겨날 여지가 없고, 이 때문에 그로부터 혁신 사상도 생겨나기 어렵다. 그러나 철저한 현실 긍정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또 그 가운데서 배울 점이 없지도 않다. ... 그와 마찬가지로 도교의 도덕률에도 과거에 관해서는 그 특유의 적용법이 있어 학문의 길에 대해 특히 엄격함을 요구한다. ... 그러므로 위에 선 사람은 결코 힘을 앞세워 아래에 놓인 사람의 생활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도교는 원래 지극히 평민적인 종교다. 선한 것을 좋다고 하고 못된 것을 나쁘다고 하며, 갖고 싶은 것은 솔직하게 그 욕심나는 마음을 인정함으로써 부끄러워하며 숨기거나 까다로운 이치를 늘어놓지 않는다. 여기에는 매우 소박한 윤리관이 담겨 있으며, 그 점이 강력하게 민종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는 단순히 하층민만이 아니라 상류 지식계급에게도 받아들여져 그들의 과거관...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197)

이처럼 제과의 규모가 오히려 축소된 것은 제과 출신자와 과거 출신 관료의 암투로 인한 결과다. 과거를 통해 진사에 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오랫동안 연속적으로 치러지는 시험을 뚫고 올라와 겨우 진사의 영광을 획득했는데, 제과 출신들은 연습도 없이 불쑥 한 차례 치른 시험에 통과한 것만으로 자신들보다 더 높은 명예를 낚아챘으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실 강희제 때 제과 출신 한림관들은 기존의 과거 출신 한림관들의 텃세 때문에 시집살이를 당하다가 하나둘씩 도망쳐버렸다. 결국 마지막까지 굴복하지 않고 제과 출신의 체면을 세웠던 사람은 주죽타 한 명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제과의 시험 심사원은 한림원 관리가 맡았으므로 건륭제 때 실시된 박학홍사과에서는 일부러 점수를 박하게 매겨 급제자 수를 줄였을 것이다. (215)

송 대 이후에는 이상의 두 가지 폐해에 관해서만은 완전히 일신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첫째로 과거 급제자의 수가 송 대 들어 급격히 늘어났다. 이는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도 많아졌음을 말해준다. 중국 사회는 당 대에서 송 대로 바뀌는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구태를 완전히 벗어버렸는데, 그 근저에 있던 것은 무엇보다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그에 따른 부의 축적이다. 마치 유럽의 근세 초기 부르주아와 같은 계급이 중국에서는 이미 송 대에 성립한 것이다. (222)

이같이 학교제도가 모처럼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과거제도를 압도하여 이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사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은 원래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정부는 대개 교육처럼 바로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후 중국의 역사는 교육에 관한 한 시대의 진보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 학교제도는 오히려 과거제도 속에 흡수되어 학교시는 과거의 예비시험으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실제로는 학교가 없어지고 과거만으로 환원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를 실시하는 데 돈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학교교육에 비하면 훨씬 싸게 먹힌다. 안일한 정치가 북송시대에 기껏 싹을 틔운 학교교육제도를 짓밟아버린 것이다. (226)

낙담해도 다시 재기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권토중래...를 꾀하는 사람은 그나마 괜찮다. 자신의 무력함과 불운을 깨닫고 그대로 체념하는 사람도 잘 매듭을 지은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재능을 갖췄을 뿐 아니라 활동적이고 야심이 있음에도 불운 때문에 매번 낙제라는 쓰라린 경험을 겪는 사람은 실망에서 자포자기로, 자포자기에서 반항의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왕조 말기 사회가 혼란에 빠졌을 때, 그들은 지금이 기회라면서 반란군에 가담하고 나아가 그 지도자가 되어 현 정권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쌓였던 울분을 해소하려 했다. 한 왕조가 멸망하는 이면에는 항상 이처럼 지식계급 불평분자의 책동 흔적이 보인다. 지금 역사상 눈에 띄는 예만 들어봐도 다음과 같은 사람들의 행적을 열거할 수 있다.
황소 ......
이진 ......
장원호 ......
우금성 ......
홍수전 ......

중국의 과거제도는 그 이전에 존재했던 귀족 제도의 대안으로 고안되었고, 일본의 학교제도는 봉건제도가 붕괴된 직후에 주로 관리 양성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무언가 공통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회 저변에 근대적인 조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일본 사회는 여전히 매우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 특히 노동시장이 좁아 종신고용제가 사회 곳곳에서 시행되고 있다는 점이 입시 지옥을 만들어 내는 하나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253)

회사는 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 사원을 채용할 때 앞으로 그들의 평생 고용을 보장해주는 대신 충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성실함이 아니라 봉건적이고 몰아적인 충성이다. 만약 자기 일신상의 문제로 그 회사를 그만둔다면 배신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또 만약 더 유리한 조건으로 고용하겠다는 고용주가 나타나면 의리를 내세우면서 극구 만류하려 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노동력을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인격까지 산 것을 의미한다.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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