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에 걸친 신부 - 그대가 눈을 뜨면
나카하라 히사시.나카하라 마이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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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흔들리지 않은 기다림의 기적


소중한 사람을 병마에게 빼앗긴 아주 슬픈 경험이 있다. 한동안 누가 아프다고 하는 소리도 듣기 싫고, 누가 아파 죽는 글은 더더욱 보기 싫었다. 볼 수가 없었다. 아픈 기억이 겹치면서 다시 아파지는 일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차가운 현실이 생각 이상으로 끔찍했기 때문이다.


거의 20년 정도 지나니 병과 아픔, 죽음에 대해 조금이나마 담담해질 수 있었다. 가끔은 담담함을 넘어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조금씩 주위에 소중한 사람을 잃어가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런 상황이 늘어날수록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사무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1년 후, 10년 후, 내일,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른다.


여기,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 있다.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은 누구 한 사람 덕분에 이뤄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예비신부, 마이가 갑자기 쓰러진다. 원인도 병명도 모른 채 4개월을 보내고 드디어 병명을 알아냈다 싶었는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희귀질환임이 밝혀진다. 항NMDA수용체뇌염. 100만 명 중 0.33명 정도 발병하는 병이 마이에게 찾아온 것이다.


‘왜 그런 숫자 속에 마이가 끼어야 하는데!’

‘왜 마이어야 하냐고?’

그런 생각에 너무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15쪽


히사시와 같은 생각을 아주 오래 전에 했던 적이 있다. 왜 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그런 몹쓸 병이! 왜, 왜, 왜! 어디에도 닿지 않는 외침 같아 더 절망스러웠다. 신에게 빌어도 영 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히사시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마이가 다시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거라는 희망.


마이의 병은 종양에 대한 항체가 생기고 항체가 오인해 뇌를 공격한 것이 원인이라 했다. 난소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고 반년쯤 지나면 개선을 보이기 시작하고, 7년쯤 지나면 거의 쾌유에 가깝게 회복된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 소식에 두 사람(히사시와 마이) 가족들은 충격 받기보다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마이는 살아난다! 는 희망이 생긴 것. 그렇게 8년 간의 긴 기다림이 시작된다.

종양 제거 후, 마이는 의식을 되찾았으나 히사시가 아는 마이로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다시 시작된 마이. 수많은 과정을 견뎌내고 재활에도 필사의 힘을 다한 끝에 마침내 쓰러지기 전 모습에 이르기까지 회복했다. 모두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곁엔 언제나 히사시와 가족들이 함께였다. 그랬기에 찾아올 수 있던 기적이고, 누군가 그토록 원한 내일을 맞이할 수 있던 것이리라.


마이를 기다린 것은 제 뜻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이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의미입니다. -125쪽


이런 사람과 사랑을 한 마이는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인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다는 기다림.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켜낸 사랑이고 사람이기에 더욱 소중할 터. 마이 또한 히사시가 아니면 안 되었던 거 아닐까.


제게는 이제 이 사람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과의 결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139쪽


서로가 서로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애정 어리니 서로 사랑할밖에. 이들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다정하고 애정 어린 사랑을 하고 싶다.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내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들과 보내는 무사하고 평안한 날들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었는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던 아주 고마운 작품이다.


8년에 걸친 결혼식 올리는 영상을 봤을 땐 가슴 깊은 곳부터 뭉클해서 눈시울이 뜨끈해지기까지 했다. 아직 걷는 일이 힘든 마이였지만 버진로드를 제 발로 걷고 싶다 하여 아버지와 어머니께 의지해 기어코 행진까지 해내고 만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새 생명까지 찾아온 그들의 ‘앞으로’가 더욱 평안하고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흔들리지 않고 간절히 원할 때 기적은 곁에 와 있다. 그 기적을 만들어낸 건 신이 아니라 오로지 간절히 바랐던 자들이 만들어낸 희망이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을 때, 조용히 책장에서 꺼내 펼쳐 읽지 않을까 싶다.




*소미미디어에서 도서 지원 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주관적이고 솔직한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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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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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소중한, 계속 소중할 가족이라는 이름의 안식처를 찾아서


사랑의 궁극적 극치는 가족이 아닐까. 어릴 때부터 편안한 집이 좋았다. 그건 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 덕분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매일 함께 하는 그들 때문에 밖에 나와 있으면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 나와 같지 않았을까 싶은 남자가 있다. 뤄원. 닝보시 공안국 형기처 처장을 지내고 성 공안청 수사 전문요원으로 그 누구보다 법의학자라는 직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 그에게도 단란한 가족이 있다. 아니,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내와 어린 딸 그리고 강아지 한 마리가 출장 후 돌아온 집에 있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따스하게 맞아 주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다. 뤄원은 8년이 넘도록 가족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고, 그들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 희망을 갖고 생각할 수밖에. 그러다가도 최악의 순간을 떠올리기도 했다는 그. 그의 눈앞이 얼마나 막막하고 까맸을까. 그 긴 시간을 어떤 마음으로 견뎌온 걸까. 헤아릴 수 없는 안타까움에 신음했다.


실마리 하나 찾을 수 없던 연쇄살인사건.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범행도구와 지문, 피해자 입에 물려 있는 리췬 담배 그리고 ‘나를 잡아주십시오’라고 타이핑된 종이 메모. 긴 간격을 두지 않고 또다시 발생하는 살인사건. 그 모든 건 단 하나의 진실로 향하고 있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다……. -421쪽


처음엔 그저 흥미로웠다.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중국 작가가 쓴 글인데도 어렵지 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읽은 《잠중록》과는 또 다른 의미로 눈을 뗄 수 없었다. 사회파 추리소설을 더욱 중점적으로 읽게 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은 이웃한 나라이다. 중국에서의 사회 모습이나 한국에서의 사회 모습이나 일본에서의 사회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게 경악스럽고 충격적이다. 흉악 범죄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더 현재 사회 모습을 반영한 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으니까.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을 둘 생각이다. 다른 나라 소설이라 어려울 것 같아서, 배경 지식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피하지 않겠다. 내 눈과 귀를 가린다고 가려질 현실은 아니기에.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어마어마한 인력이 투입되고, 이미 경찰 일을 그만둔 수학 교수에게까지 도움을 요청하는 손길이 찾아든다. 범죄논리학 전문가인 옌량은 항저우시 형정지대 지대장인 자오톄민의 부탁으로 비밀리에 수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뤄원을 만나면서 풀 수 없는 방정식을 만나고 만다. 그 방정식을 풀 방법은 반증법.


미지수를 유추하는 단계가 끝났으니, 이제는 고차 방정식의 해를 검증할 차례였다. -266쪽


해를 정하자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진실을 향해 질주한다. 끝내 진실은 두 천재를 덮쳤다.


어느 누구도 웃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이런 결말은 생각하지도 못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이었던 걸까. 입이 쓰고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책을 덮고도 한참을 멍하니 희미한 조명 아래 앉아 있었다. 《모래그릇》과 비슷한 뒷맛이 느껴졌다. 정신 차렸을 땐 동틀 무렵의 깊은 새벽이었다.


때로는 투명한 진실이 막연한 희망보다 더 잔인할 때가 있다. 날카롭게 파고든 진실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마 전부 잊을 수는 없으리. 사회파 추리소설 중 단연으로 꼽힐 만하다. 이 작품의 시리즈인 《동트기 힘든 긴 밤》과 《나쁜 아이》 또한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읽어야 할지 망설일 이유조차 없다. 그저 읽고 통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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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 케이스릴러
이종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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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하면서 산다.


한국 작가 중에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는 잘 쓰는 작가는 손에 꼽는다. 다른 나라 작가 중에는 꽤 많은데. 그 점이 살짝 아쉽기도 하면서 안타까웠다. 그러다 케이스릴러 시리즈를 알게 됐다. 처음은 《캐리어》였다. 독특한 소재였고, 흥미가 생겼지만 읽지는 못 했다. 그러다 그 다음으로 출간되는 《현장검증》을 알게 됐다. 타이밍이 매우 기가 막혔다. 마침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소설만 읽고 있을 때, 딱 눈에 걸렸다. 국내 유일 범죄수사 전문 잡지 편집장을 15년이나 지낸 작가의 이력이 단연 시선을 사로잡았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교수가 ‘이렇게 리얼하고 스릴 넘치는 범죄소설은 처음 본다!’고 극찬한 만큼 호기심이 동했다. 좋은 기회에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카피캣을 쫓던 형사가 어느 날, 눈을 뜨는데 시력과 기억을 잃은 채였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 사람들은 그를 ‘이수인 경감’이라고 불렀다. 남자는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몰라 항상 긴장상태였다. 사람들 발소리로 그 신분을 알아채기에 이르렀고, 그 중 발소리가 없어 알아챌 수 없는 그녀, 한지수 경사가 그를 찾아왔다.


독특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을 쫓던 형사가 사고로 기억과 시력을 잃었다. 범인을 쫓을 단서라고는 단 하나도 없고 오직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너머의 무언가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 막막하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이수인은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사건의 흐름을 꿰뚫는다. 한지수는 그의 본능적인 수사 감각을 점점 신뢰하고 그에게 의지하기 시작한다.


‘카피캣’은 보통의 모방살인마와는 달랐다. 살해하는 방식이나 살인범의 독특한 특징을 단순히 흉내 내는 수준의 모방범이 아니었다. 오 과장의 말에 따르면, 카피캣은 증거를 남기지 않아 무죄로 석방된 용의자만을 살해한다고 했다. 그것도 용의자가 법망을 빠져나간 범행수법을 그대로 카피해 살해하는 방식이었다. -12쪽


예사롭지 않은 무시무시한 놈이 등장한다. 보통의 카피캣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연쇄살인마. 놈이 노리는 건 누구이고, 왜, 어째서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일까. 범인이 앞서 밝혀지지 않은 채 마지막에 그 정체가 밝혀짐으로써 스릴 넘치는 긴장감을 고조시켜 나간다. 현장검증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게 리얼하고 디테일하게 밟아 나간 작품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것이다. 국내 작품 중에는 유일했던 것 같다(국내 범죄소설을 몇 편 읽진 않았지만 읽은 작품 중에).


카피캣의 정체를 추리해 나가는 것 또한 묘미 중 하나였다. 이 사람인가 싶었더니 아니고 이 사람인가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의심의 의심을 하게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내밀한 심리까지 파고들어 마음을 쥐락펴락했다. 악마 같고 간교해서 진심으로 무서웠다.


쉽게 단정하지 마라.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라고 확정하지 마라.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을 읽기 전까지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며칠 전 읽은 《보기왕이 온다》와는 또 다른 의미로 무서운 느낌이었다. 한국 작가가 쓴 제대로 된 범죄소설을 보고 싶다면 망설임은 금물. 바로 그대가 찾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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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의사는 비 갠 하늘을 보며 그대에게 기도한다 - 상 마지막 의사 시리즈
니노미야 아츠토 지음, 이희정 옮김 / ㈜소미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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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생명이라는 씨앗을, 절망은 죽음이라는 열매를, 증오는 연민으로


작년 봄, 벚꽃 하면 생각나는 작품 중 단연 첫 번째로 떠올랐던 《마지막 의사는 벚꽃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리워한다》 후속 작품이 올 봄 출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레고 반갑고 감사했다.


환자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상반된 신념을 가진 두 의사가 있다. 환자에게 무조건 치료를 권하기보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키리코 슈지. ‘사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든 최선을 다해 병을 치료하려는 열정 넘치는 후쿠하라 마사카즈. 무사시노 시치주지 병원 부원장을 맡고 있다.

서로 닿을 수 없는 수평선상에 있는 두 사람을 이어 주던 유일한 친구 오토야마가 떠난 뒤, 무사시노 시치주지 병원을 나와 작은 의원을 꾸리는 키리코. 부원장이지만 병원장 눈 밖에 나 잡일 정도만 맡고 있는 후쿠하라. 이 두 의사에게 한 연인이 찾아온다. HIV에 감염된 연인 말이다. 여자 하라 미호는 후쿠하라에게, 남자 미조구치 슌타는 키리코에게.


하나의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삶을 대하는 자세부터 다르다. 한쪽은 희망을 갖고 살고자하고, 한쪽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억울한 마음에 위험한 일까지 벌이려 한다. 한쪽은 생명, 한쪽은 죽음. 생과 사가 명확하게 대비되고 있다.


“선생님, 들어주세요. 전 꿈이 있어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지만 꿈이 있어요.”

“꿈이오?”

“엄마가 되고 싶어요.”

-39쪽


후쿠하라는 미호에게 HIV에 걸렸어도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함께 잘해나가자고, 병을 이겨내자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마냥 무섭고 엄청나게 큰 병인 줄 알았는데 본인 의지만 있다면, 의사의 올바른 판단과 의학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건강하게 누리고 싶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걸 미호를 통해 배웠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병을 얻었지만 절망에서 금세 벗어나 살고자 했다. 희망은 또 다른 의지를 낳고 반짝거리는 생명을 잉태한다.


“의사 선생, 당신이 그랬지?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자유라고. 안 그래? 분명히 말했잖아? 이제 와서 내 행동을 부정하진 않겠지?”

“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죽기 전에 남김없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권리예요.”

-139쪽


키리코는 슌타에게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말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 없던 거라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온 것이라고. 병에 걸려 병원에 가지 않는 것도, 치료를 받지 않는 것도 바라는 게 그런 거라면 그래도 좋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매정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의사로서 소명 의식이 부족한 게 아니냐고도 할지 모르겠다.


선택은 환자가 할 수 있다. 그래야만 한다. 병을 이겨낼지 병에 먹힐지는 환자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 키리코는 줄곧 그런 마음으로 환자를 대했을까. 그 마음에 한 점 의심도 후회도 없는 걸까.


두 의사 중에 누가 더 훌륭하고 누가 더 옳은지는 모르겠다. 의사는 환자가 아프다 찾아오면 치료해 주는 사람이다. 키리코도 후쿠하라도 본인이 옳다 생각하는 방식으로 처방을 내렸을 뿐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 결과에 대한 무게는 오로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비가 갠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며 각자 다른 생각을 하는 두 사람. 그만큼 외모도 다른 두 사람. 어떤 때는 앙숙 같아 보이고 어떤 때는 절친한 친구처럼 보인다. 그런 두 사람에게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깊은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는 사연에 가끔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아-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놀랍고 서글픈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키리코는 어릴 때부터 병원과 친했다. 퇴원하면 곧 입원하고 곧 퇴원하면 다시 입원. 지겹도록 이어지는 현실에 아이임에도 키리코는 아이 같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키리코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절대 꺼지지 않을 불꽃을 품은 여인.


“나랑 너 중에 누가 더 먼저 낫는지 대결하자. 하긴, 넌 이미 완전히 포기한 것 같으니까 사실상 내가 나은 시점에서 내가 이기게 되지만. 키리코의 말이 맞다면 난 언젠가 포기하게 되잖아? 내가 포기하면 질 걸로 해도 돼.”

“왜 포기하지 않아요?”

“나을 거라고 믿으니까.”

-220~221쪽


간절하게 바라는 삶도 언젠가는 끝나게 되어 있다. 사람은 하나의 생명이 꺼질 때까지 살 수 있다. 그 생명이 꺼지기 전에 소중한 걸 지키고 싶어 한다. 눈앞에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에리. 세 남자의 기억 속에서 절대 잊히지 않을 존재. 나 또한 절대 잊지 못할 사람. 그녀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배운 것 같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랑. 사람의 인연이 교차되고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인해 살아가게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의 생명과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 준다. 마음이 동하고 그리움이 인다. 지금은 곁에 없는 이들에 대한 기억이 사무쳐 힘들기도 했다. 이 따스한 봄날,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 무척이나 보고 싶다. 두 권을 다 읽고 나니 그리움은 더욱 짙어졌다.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또 한 번 떠올리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줬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알려 준 고마운 작품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그래도 사실이 그렇다.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도 그 생명이 남긴 소중한 생명은 또 다른 희망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렇게 나도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 의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을 바라고 있다면 욕심인 걸까. 이대로 두 의사를 보내고 싶지 않은데. 부디 내년 봄, 벚꽃 흩날리고 촉촉한 봄비 내릴 적에 다시 설렐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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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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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 한 자락에 깃든 수많은 빛깔의 소리


알고 싶었던 영역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중국을 배경으로 한 글은 어떨까 생각했다. 아주 막연하고 아득해 현실감이 없었다. 크게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지 못 해서였을까. 헌데, 제대로 만났다. 노력해 봤지만 로맨스 장르는 한동안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장르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미스터리와 사극 그리고 로맨스의 조화라니. 생각할 수 없던 조합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케미스트리. 그 어떤 글보다도 진한 인상을 남겼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올해의 작품이 바뀌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갑다. 그만큼 좋은 글이 많이 출간되고 있는 거니까!


가족 모두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남자로 위장해 도망치던 황재하. 하필 정체를 들킨 상대가 대당 기왕 이서백. 문무 모두 출중한 이 남자, 냉정하고 지극히 이성적이다. 누추한 복장에 남장까지 한 살인자를 단번에 믿어 줄 만큼 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하긴, 누구라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명 수배된 자를 뭘 보고 믿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제안된 거래. 열흘. 단 한 번의 기회. 황재하는 타고난 영민함과 사려 깊은 통찰력으로 그 한 번의 기회를 잡아 이서백 곁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황재하도 가만히 눈을 들어 이서백을 힐끔 보았다. 그 잠깐의 순간에 이서백은 황재하의 더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한 두 눈을 보았다. 속눈썹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한 눈동자는 가을 호수 같은 신비로움을 지닌 채 복숭아꽃 같은 얼굴 위에 박혀 있었다. -56쪽


이서백은 곁에 있는 황재하를 자꾸 본다. 눈앞에 있으면 더 집요하게 본다. 창백한 피부도, 맑은 두 눈도, 환관으로 위장해 하나만 찔러 넣은 비녀도 자꾸만 이서백 눈에 밟힌다. 그게 왜 그렇게도 설레게 다가오는지! 누군가를 마음에 서서히 들이는 모습이 달빛이 스미듯 고요하고 깊어서 보는 내내 심장이 떨렸던 것 같다.


사건 해결을 위해 어느 하나 허투루 듣고 보는 법이 없는 황재하. 같은 여자인데도 반할 만큼 진솔하고 솔직하다. 그 올곧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심성 때문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게 아닐까. 사건을 정리할 때 습관적으로 머리에 꽂은 비녀를 뽑아 쓰는 버릇 때문에 이서백의 꾸지람도 많이 듣지만 집중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 절대 가족을 살해했을 리가 없다! 목숨 걸고 진실을 밝히려는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서백이 왜 그렇게 빤히 보는지 알겠다. 열일곱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기백이 나오는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훤칠한 사람 모습이 하나 보였다. 고요한 달과 별을 배경으로 궁에서 걸어 나오는 황재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평온했으나, 그 눈 속에 비친 달과 별 그림자는 물결이 일렁이듯 미세하게 반짝이며 요동쳤다. -463쪽


황재하 눈에도 이서백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듯도 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황재하는 어떻게 하면 촉으로 돌아갈지, 누명을 벗을지만 생각하는 듯도 하니까. 대체 어떤 이가 황재하에게 그런 누명을 씌운 걸까. 괘씸해서 화가 난다.


이서백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스물 초반의 나이에 당나라 최고라 칭송 받다니. 게다가 외모 또한 어찌나 출중한지. 설정이긴 하나 옛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똑똑하고 잘난 듯도 싶고. 저자가 얼마만큼의 애정으로 이들을 써 내렸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인물 하나하나에 사연을 불어 넣어 생동감 넘치게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나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 기왕을 살려낸 것부터 범상치 않다 생각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기왕 이서백을 누가 구축할 수 있을까. 츤데레의 정석을 달리고 있는 이 남자, 어디까지 그럴지 지켜보고 싶다. 황재하에게 끝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한 권당 분량이 500쪽이 넘는데도 미친 듯이 속도 붙여 읽었다. 끝까지 읽지 않으면 궁금해서 자꾸 맴도는 작품은 참 오랜만에 만났다. 사랑이 미스터리를 만나니 혼 빠지게 재미있다. 2권까지 소장 중인데 3, 4권 출간 서둘러 줬으면 좋겠다. 흐름 깨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으니까. 아무리 미친 분량이라도 다 감내할 수 있다. 저들과 함께라면. 헛소리가 자꾸 웃겨서 미워할 수 없는 주자진도 자꾸 눈에 밟힌다. 왜 그 멍청한 것 같으면서도 선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물불 안 가리는 모습이 좋은 건지.


읽기에 흥미 잃은 사람도 《잠중록》을 본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한다. 끝 쪽까지 읽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끝까지 함께 하게 된다.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가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아르테에서 지원 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주관적이고 솔직한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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