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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ㅣ 아르테 오리지널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평점 :

비녀 한 자락에 깃든 수많은 빛깔의 소리
알고 싶었던 영역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중국을 배경으로 한 글은 어떨까 생각했다. 아주 막연하고 아득해 현실감이 없었다. 크게 마음에 와 닿는 글을 만나지 못 해서였을까. 헌데, 제대로 만났다. 노력해 봤지만 로맨스 장르는 한동안 볼 수 없었다. 역시나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 장르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미스터리와 사극 그리고 로맨스의 조화라니. 생각할 수 없던 조합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케미스트리. 그 어떤 글보다도 진한 인상을 남겼다.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올해의 작품이 바뀌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갑다. 그만큼 좋은 글이 많이 출간되고 있는 거니까!
가족 모두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남자로 위장해 도망치던 황재하. 하필 정체를 들킨 상대가 대당 기왕 이서백. 문무 모두 출중한 이 남자, 냉정하고 지극히 이성적이다. 누추한 복장에 남장까지 한 살인자를 단번에 믿어 줄 만큼 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하긴, 누구라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지명 수배된 자를 뭘 보고 믿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제안된 거래. 열흘. 단 한 번의 기회. 황재하는 타고난 영민함과 사려 깊은 통찰력으로 그 한 번의 기회를 잡아 이서백 곁에 머물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황재하도 가만히 눈을 들어 이서백을 힐끔 보았다. 그 잠깐의 순간에 이서백은 황재하의 더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한 두 눈을 보았다. 속눈썹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한 눈동자는 가을 호수 같은 신비로움을 지닌 채 복숭아꽃 같은 얼굴 위에 박혀 있었다. -56쪽
이서백은 곁에 있는 황재하를 자꾸 본다. 눈앞에 있으면 더 집요하게 본다. 창백한 피부도, 맑은 두 눈도, 환관으로 위장해 하나만 찔러 넣은 비녀도 자꾸만 이서백 눈에 밟힌다. 그게 왜 그렇게도 설레게 다가오는지! 누군가를 마음에 서서히 들이는 모습이 달빛이 스미듯 고요하고 깊어서 보는 내내 심장이 떨렸던 것 같다.
사건 해결을 위해 어느 하나 허투루 듣고 보는 법이 없는 황재하. 같은 여자인데도 반할 만큼 진솔하고 솔직하다. 그 올곧고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심성 때문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게 아닐까. 사건을 정리할 때 습관적으로 머리에 꽂은 비녀를 뽑아 쓰는 버릇 때문에 이서백의 꾸지람도 많이 듣지만 집중하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 절대 가족을 살해했을 리가 없다! 목숨 걸고 진실을 밝히려는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서백이 왜 그렇게 빤히 보는지 알겠다. 열일곱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기백이 나오는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훤칠한 사람 모습이 하나 보였다. 고요한 달과 별을 배경으로 궁에서 걸어 나오는 황재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평온했으나, 그 눈 속에 비친 달과 별 그림자는 물결이 일렁이듯 미세하게 반짝이며 요동쳤다. -463쪽
황재하 눈에도 이서백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듯도 하고.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황재하는 어떻게 하면 촉으로 돌아갈지, 누명을 벗을지만 생각하는 듯도 하니까. 대체 어떤 이가 황재하에게 그런 누명을 씌운 걸까. 괘씸해서 화가 난다.
이서백 또한 대단하지 않은가. 스물 초반의 나이에 당나라 최고라 칭송 받다니. 게다가 외모 또한 어찌나 출중한지. 설정이긴 하나 옛사람들은 하나 같이 다 똑똑하고 잘난 듯도 싶고. 저자가 얼마만큼의 애정으로 이들을 써 내렸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인물 하나하나에 사연을 불어 넣어 생동감 넘치게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나 역사상 실존했던 인물인 기왕을 살려낸 것부터 범상치 않다 생각했다. 이토록 매력적인 기왕 이서백을 누가 구축할 수 있을까. 츤데레의 정석을 달리고 있는 이 남자, 어디까지 그럴지 지켜보고 싶다. 황재하에게 끝까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벌써부터 눈빛이 심상치가 않은데.
한 권당 분량이 500쪽이 넘는데도 미친 듯이 속도 붙여 읽었다. 끝까지 읽지 않으면 궁금해서 자꾸 맴도는 작품은 참 오랜만에 만났다. 사랑이 미스터리를 만나니 혼 빠지게 재미있다. 2권까지 소장 중인데 3, 4권 출간 서둘러 줬으면 좋겠다. 흐름 깨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으니까. 아무리 미친 분량이라도 다 감내할 수 있다. 저들과 함께라면. 헛소리가 자꾸 웃겨서 미워할 수 없는 주자진도 자꾸 눈에 밟힌다. 왜 그 멍청한 것 같으면서도 선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물불 안 가리는 모습이 좋은 건지.
읽기에 흥미 잃은 사람도 《잠중록》을 본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장담한다. 끝 쪽까지 읽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끝까지 함께 하게 된다.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가 아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
*아르테에서 지원 받아 작성하는 서평입니다. 주관적이고 솔직한 생각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