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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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와이 태생이자 현앨리스의 아들, 체코에서 거주하며 의사로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웰링턴의 삶을 다룬 소설. 작가가 정병준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을 읽고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정웰링턴의 어머니인 현앨리스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맏딸로, 중국과 미국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해방 뒤 귀국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간첩 혐의로 추방되고, 북으로 올라갔지만 박헌영의 애인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현앨리스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함께 북한에 들어간 이경선 목사, 한흥수는 그들을 북한으로 불러들인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한다.

 

소설에서 정웰링턴의 삶은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삶이 끝에 도달하기 전에 마주했을 특정한 장면들과 그 순간에 그가 했을 법한 생각들을 콜라주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구성된다. 이 형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에 핵심적인 문제가 됐을 법한 고민들을 들여다보고, 삶을 사로잡았던 테마와 이데올로기적 딜레마,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들을 만져보게 된다. 2부라 할 수 있는 미래를 전망함파트에는 에세이 형태로 쓰여진 일종의 취재기가 담겨있다. 이 부분을 읽고나서 앞에 실린 콜라주 형식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 정웰링턴의 삶과 생각들이 또 한 번 새롭게 다가온다.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필사해놓는다.

 

그는 신들의 정원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았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만성적이고 일상적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 그는 카우아페이아 해변 바닥에 가라앉은 레닌의 책을 생각했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선우씨는 말했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그들을 죽인 거라고, 믿음의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는 월북하거나 살해됐고 전향했으며 북한의 공산주의자는 숙청됐고 처형됐고 유배됐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는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됐고 전향하거나 추방됐고 자취를 감췄다.

 

정웰링턴은 체코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다. 그는 1903년 시작된 하와이 이민 1세대 집안의 자식으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였지만 동양인이었고 정신적으로는 조선의용대 계열의 좌익 파르티잔이었지만 체코 비밀경찰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북한에서 스파이로 지목당해 처형당했다. 그의 친구와 가족은 모두 미국인이었다.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선 현재의 공산주의 체제를 부정해야 한다. 정웰링턴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안나는 생각했다. 믿음과 관련 있는 자들은 위험한 자들이다. 그들은 혁명가나 투사, 성인이 아니라 욕망으로 가득 찬 야심가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두 개다. 죽음 또는 출세.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웰링턴의 문제는 자신이 어느 시간대에 존재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그는 현재의 시간에 미래의 시간을 기입했고 미래의 시간을 과거의 시간에 기입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현재는 거듭 후퇴했고 현재를 깨달을 때면 마비 상태가 되었다. 소년 윌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알게 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삭 바벨은 말했다. 나는 새로운 장르를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라는 장르입니다.

 

재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체코를 북한으로 통하는 창구로 활용했다. 정웰링턴과 선우학원도 북한을 위한 길목으로 체코를 선택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당했다. 선우학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코에서 공산주의의 실상을 봤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북한의 동지들은 모두 죽었다. 정웰링턴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을 점차 상실해갔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게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이 있었을까. 정웰링턴은 믿음과 회의, 위선과 위악의 세계를 부유했고 밤이 되면 절망 속으로 도피했다.

 

우리 삶이 뻗어나갈 수많은 줄기 가운데 어둡고 음울하며 비극적인 능력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눈에만 부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는 오랜 세월 회자될 이야기의 재료가 될지도 모르고 그런 점에서 잠재되어 있는 것들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고 무작위적이며 우연적이다.

 

진지한 답은 그를 곤경에 몰아넣었고 실없는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경직되어가는 것을, 위장부터 천천히 딱딱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현상이었다. 피는 더디게 흘렀고 부분적으로 고여 멍울을 이루었다. 곧 완전히 굿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멈출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지만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변화는 불가능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계는 정지했고 꿈은 오로지 과거를 향했다.

 

정치적 해방은 한편으로 인간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공민으로, 도덕적 인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고, 자신의 경험적 삶 안에서, 개별적 노동 안에서, 개별적 관계 안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유적 존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성된다.

 

나는 삶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빚지지 않았다. 하와이의 한인 사회에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에도 부채가 없었고 어떤 이념과 철학에도 빚지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내게 많은 빚을 졌다. 우리 가족에게도 빚을 졌고 친구들에게도 빚을 졌다. 나는 어떤 것도 돌려받지 않을 것이다. 윌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나의 선택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숫자, 개념 따위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관점에 따라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능력은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결국에는 그의 밖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유명해요? 누구요? 곰브로비치. 유명……한가? 저는 유명한 작가가 좋아요. 맑시스트가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유명한 작가는 1) 민중적이고 2) 설득력 있으며 3) 파급력 있다. 논리적 구성은 아니에요. 셋 모두 셋과 연결되니까. 어쨌든 작가는 유명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유명한 작가가 좋은 작가는 아니지만 유명하지 않은 작가를 좋아하는 건 개인주의거나 엘리트주의예요. 그녀가 말했고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말이 무섭거나 전체주의적이고 극단적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고(민중이라니) 의문이 들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납득이 됐다. 개인주의의 시대에-그녀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장악한 20세기 중후반 이후-자유주의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1) 합리주의 2) 개인주의-개인주의적인 문학이나 예술이 득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유명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한기의 소설을 백만 명이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그 나라에는 문제가 있다. 핵을 떨어뜨려야 할까. 그 작품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게 아니다. 그럼 뭘까?

유명하잖아요. 맑시스트가 말했다.

누가요?

당신.

관점에 따라……

 

동시대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지함이 아닌, 동시대와 내가 멀어지고 있는 감각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동시대와 가깝다고 느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예술과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총체성을 사유할 수 없는 시대, 복잡성의 정도가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지만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할 때조차 알고 있다. 자신의 앎과 행위를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 짓는 흉내를 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정치적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집중을 방해하고 강박적인 자본주의의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뭔가 잘못되고 뭔가 빠져 있고 뭔가 극심하게 불공정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이 생각을 이런저런 맥락 속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이 생각에 대해 잊어버리고, 이메일을 확인할 수도 있다. 혹 다르게 해보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청원에 서명을 한다든지, 블로깅을 한다는지, 투표를 한다든지 개체로서 자기 나름의 몫을 행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개체로서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조ㄷ 딘을 인용하며 젊은 맑시스트가 요청하는 것은 새로운 금욕주의다. 쇼핑을 멈추는 것, 기부를 멈추는 것, 각개전투를 멈추는 것.

 

빅토르 세르주: 나는 자아를 공허하게 주장하는 란 말을 쓰는 게 싫다. ‘란 말에는 착각과 환상은 물론이고, 허영과 오만도 들어 있다. 나는 되도록 우리란 대명사를 쓰겠다. [……] 당연히 사실에 더 가깝고,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가장 사적인 사유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수천 가지 방식으로 연결 돼 있다.

 

우리는 미술관이 가장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데 동의했다. 햇살과 바람이 없지만 어떤 몰보다 좋고 그건 미술관 특유의 엉거주춤함 때문이야. 몰은 구매를 위해 야단법석이고 자연은 특유의 무심함이 있는 반면 미술관은 늘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예술이 너무 예술 같으면 키치고 너무 예술 같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지. 그럼 어떡하라고? 너무 예술 같지 않으면서 너무 예술 같지 않지도 않아야 해. 뭐래…… 그냥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잘 만든 게 뭔데? 몰라, 꺼져. “이라는 걸 보편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 나 진지하게 말해도 돼? ? 너가 읽은 책 다 불태우고 싶어. 아니면 뇌를 꺼내서 클로로포름에 담아 라스푸틴의 성기 옆에 전시하는 거야. 칭찬이야?

 

어떤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쓰냐고 젊은 맑시스트가 질문했다. 열차 안이었고 나는 김석형의 무거운 구술집을 읽으며 졸고 있었다. 체코의 서쪽 들판이 창밖을 지나갔다. ? 생각하는 독자가 있어요? 가끔 받는 질문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날 열차 안에서 처음 생각났다. 나는 말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 한국에 와본 적 없고 자기 나라의 어느 도시에 살며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 읽는 걸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고 책을 출간하고 싶지만 어쩌면 그냥 가까운 사람들 몇몇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 퇴근하면 피곤해 죽을 것 같지만 책과 노트 따위를 챙겨 카페로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읽는 사람. 날씨 좋은 초여름 저녁이나 초가을 저녁, 사람들은 약속을 잡고 술을 마시고 어울려 놀지만 그는 매일 카페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거야. 졸릴 때도 있고 지루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는 거야. 끝장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저녁마다 밤마다 책을 읽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집에 와서 완전 녹초가 되고 출근을 무슨 정신으로 하는지 모르겠는데도 말야. 나는 그런 사람을 상상하고 글을 쓰는 것 같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책의 첫번째 독자는 나라고. 그 말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고 그 이상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독자를 찾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지? 진정한 작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이유나 동력이 되지 않는데 갑자기 열차 안에서 떠오른 것이다. 새로운 독자가 다른 곳에 있지만 나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고 하지만 내가 아닌.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고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써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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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오늘의 젊은 작가 39
김홍 지음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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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김홍

2023년 3월에 (당시엔 노원에 있던) 책방봄에 난생 처음으로 북토크라는 걸 놀러 갔었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전혀 가지 않았는데, 책방지기님인 영신님이 놀러오시라고 좋아하실 거라고 해서 가게 됨… 그때 북토크는 류진 시인님의 시집 <앙앙앙앙>과 김홍 소설가님의 <엉엉>을 주제로 진행됐고, 나는… 소설가들과 시인들 사이에 꿈많고 열정넘치는 문청처럼 껴 있었다. 그리고 훗날 스승님이 되는 이갑수 소설가님의 <외계 문학 걸작선>과 김쿠만 소설가님의 <레트로 매니아>, 이유리 소설가님의 <브로콜리 펀치>, 서요나 시인님의 <물과 민율>, 서호준 시인님의 <소규모 팬클럽>, 김홍 소설가님의 <엉엉>과 <스모킹 오레오>,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를 샀다…. 이중에 읽은 건… 이제 세 권 뿐… 😂 하지만 차근 차근 읽어나가겠습니다. 다 너무… 좋네요…. 🥹 하지만 전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걸요…. 😂

아무튼 김홍 소설가님의 신작 <프라이스 킹!!!>이 나왔길래, 전작인 <엉엉>을 얼른 읽어봐야겠단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소설집 <우리가 당신을…>을 넘 재밌게 읽었어서 이 소설도 기대를 잔뜩 품고 읽었다. 그리고 졸잼이었다….

<엉엉>은 묘한 혼종의 소설이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쿠팡을 애용한다든가, 그래서 로켓배송의 편리함을 누린다든가,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진 풍경을 보여준다든가, 고로쇠물을 시킨다든가 하는 장면 장면들을 보면 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르는 듯 싶다. 하지만 본체가 빠져나간다든지,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든지, 그리고 눈물과 함께 세상에 비가 쏟아진다든지, 고양이가 쿠팡 배달원으로 일한다든지 하는 설정들은 초현실적이다. 주인공의 태도도 초현실적인데, 이를테면 본체가 빠져나간 게 무슨 상황인지, 본체란 건 영혼인 건지, 이를 통합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는 고민을 하진 않는다. 다만 본체가 오랜 시간 연락도 없이 사라져있던 걸 서운해한다.

<엉엉>의 매력은 그 환상성이 현실과 뻔뻔하게 접합될 때 드러난다. 강보원 시인이 발문에 예를 든 것처럼, 이를테면 국어련(국제어린이연합) 같은 세상에 없을 조직이 현실정치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같은 것에서. 특유의 농담과 능청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본체들이 모인 ‘우리들‘은 다 뭐고 이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은 다 뭔지, 모든 지체들의 본체화는 뭔지, 맥도날드에서 실패한 생일 파티는 다시 치뤄질 수 있는지 싶을 때에도 소설은 능청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백종원인 박종일이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도, 그 설정으로 인해 파생되는 일들도 끊임없이 웃음을 준다.

<엉엉>은 일종의 ‘재난물’이지만, 강보원 시인의 말처럼 무엇보다도 우정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역시 강보원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새롭게 태어날 때에야(혹은 김범석이라도 돼야…) 눈물이 그칠 것임을 암시하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모든 게 흩어져도 우정은 남는 세상, 멈춤없는 눈물이 (김홍처럼) 능청스러운 농담으로 대체되는 세상, 그런 세상은 가능할까. 어떻게? 모르겠지만,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해야지 뭐…

#김홍 #엉엉 #민음사 #소설 #한국소설 #문학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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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2판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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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마크 피셔의 책. 마크 피셔는 우울증으로 2017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이런 좋은 책 남기고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추후 <기괴한 것과 오싹한 것>, 그리고 여러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든 중심 기지이자 전설적인 블로그였던 K-PUNK의 글들을 모은 <K-PUNK>도 읽을 생각이다. <K-PUNK>는 이미 사둠.

 

이 책은 자본주의 바깥을 아예 상상하지 못 하는,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정치철학 에세이다. 마크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과 관점을 토대로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규정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신자유주의와 겹치는 면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면적인 규제의 철폐로 시장의 효율성이 극대화됨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형태의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적 비전이 신자유주의였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가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어떤 체제를 갖고 오든, 그것들은 모두 최악이라는 생각 혹은 태도를 의미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 이상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야만적이고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 모든 존재가 오직 돈으로 평가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미 확립된 질서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이 질서가 이상적이라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나머지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반자본주의까지 식민화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이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실제로는 강화한다.” -E 같은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반자본주의를 상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세계를 잠식한 상황, 심지어 반자본주의까지 그 안에 끌고 들어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크 피셔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가 고통을 안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도덕적 비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할 뿐이다. 빈곤, 기아, 전쟁 등이 현실의 불가피한 일부로 제시되는 한 이런 고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쉽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보여 줄 때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 지난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으며, 이 존재론은 건강관리와 교육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영역이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했다.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자본주의는 결코 자연 상태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틀이고 룰일 뿐. 리얼리즘이 균열되는 순간, 이 사실, 즉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설정한 룰이라는 것이 실재와 함께 드러난다.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실재다. 이를 드러내고 폭로해야 한다.

 

이외에도 교육자와 학생의 입장에서 청년층이 겪는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많은 청년들이 반성적 무기력/우울증적 쾌락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설명되는 우울증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에서 비롯한 우울증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무언가 빠져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 원칙 너머에서만 이 불가사의한 향락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 한다.”, 마크 피셔는 대담에서 이렇게 보충 설명한다. “오락과 쾌락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우울증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쾌락주의적 우울증을 논의하며 주목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가령 쾌락 원칙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은 끊임없는 쾌락이 아니라 영구적인 불면증을 산출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클릭하며 밤을 보내는 우리의 경험은 정확히 쾌락과 권태의 동시성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그런 권태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간극을 매웁니다. 그러나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고자 하는 불면증적인 욕구가 곧바로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관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어째서 시장스탈린주의적 신관료주의를 불러일으키는지도 설명한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내용이 아니라, 숫자나 기록, 즉 성적이나 성과로 표현되는 상징이 중요해지면서, 시장이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와 꼭 닮아진다는 것이다. 보수적/자본친화적 언론에서 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사실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데, 이 지점을 지적한 것도 굉장히 날카로웠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큰 정부는 사실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작동한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위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들을 보며, 당연히 포스트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됐다. 그 내용으로 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사실 뭐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총체적으로 갖다 쓸 수 있는 건 다 갖다 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시장의 병폐를 어느 정도 막는 역할을 했다면 그런 부분을 되살리는 것도 해법의 일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주장처럼, 에너지 생산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도 필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케티의 부유세 같은 제도가 됐든지, 칼 폴라니의 것이든,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든, 기본소득이든 뭐든 갖다써야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병폐들을 폐기하고 포스트자본주의를 도래시킬 수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는 경제 체제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정신과 의식, 욕망의 내용과 미학적 대안을 채우는 데에도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태동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마크 피셔가 죽기 전까지 꾸준히 문화 비평을 한 이유도 이것일 테다. 책의 종반부 아래 두 문단이 인상깊다.

 

다시 영년year zero이다.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좌파의 악습 중 하나는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 자신이 정말로 믿고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조직하기보다는 크론슈타트 봉기나 신경제정책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자본주의 정치조직화 형태의 실패가 절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의 정치를 향한,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희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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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경일일 1~2 세트 - 전2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이주향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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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는 자신이 만들던 잡지가 폐간하자, 그 책임을 지겠다며 잡지사를 퇴사한다. 그 후 필사적으로 만화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불가능했고… 그는 새로운 만화잡지를 독립출판하기 위해 여러 만화가들을 만난다.

이 만화에는 만화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주인공 뿐만 아니라, 가능성과 재능은 있지만 감정기복이 심한 작가와 그와 새로운 파트너가 된 편집자, 그리고 젊은 시절엔 뛰어난 작품을 그려냈지만 어느덧 퇴물이 되어버린 작가, 야간 경비원 일을 하며 창작을 접은 작가, 마트에서 일하며 자녀 교육에 신경쓰는 평범한 워킹맘이되었지만 시오자와와의 만남으로 잠들어있던 열정이 깨어나는 작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게 아니라 잘 팔릴 만화를 그리게 된 작가, 자기가 그리고 싶은 만화만 그리겠다고 다짐하고 점점 더 작품이 안 팔리게 된 작가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이 나온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항상 그 이야기가 담긴 도시의 풍경을 한 컷에 담아 그린다. 감동과 여운 때문에 거의 울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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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의 시 284
강보원 지음 / 민음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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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책방봄에서 류진 시인님께 소개 받고 읽게 됐다. 류진 시인님은 내게 “100% 좋아하실 거”라고 하셨다. 해설도 류진 시인님의 시집 <앙앙앙앙>의 해설을 쓰신 조재룡 평론가님이 쓰셨다. 그래서 뭔가 같은 계열인가 생각했다. 시알못이라 잘은 모름….

시인님 말씀대로 이 시집은 100% 좋았다. 약간 어렵기도 했지만… 시 하나당 두 번 세 번씩은 읽은 듯. 그렇게 읽으니 시어들과 시의 구조가 좀 더 잘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읽으면 되겠지? 😅 시를 다 읽고서는 해설을 통해 이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해설이 더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하 원래 안 어려울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 하지만 그건 시알못인 저의 탓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해가 안 가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천천히 읽으면서 혼자 조용히 탄복하고 기뻐하고 감탄했다. “언어의 쓰임새를 이런 식으로 탐구하고 실험하는구나”, “그래 잘 모르겠지만, 시라는 게 이런 걸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유머가 있어서, 읽으면서 종종 소리내 웃기도 했다. 허버트씨와 나무인간과 호빵 누나는 나올 때마다 반갑더라. 개인적으로는 ‘클라리넷 연주법‘과 ’완벽한 개업 축하 시‘, ’파란 코끼리‘, ‘훔쳐 쓰기로 결심하는 시’가 가장 좋았다.

강보원 시인님이 민음사 블로그에 연재했던 에세이 ‘에세이의 준비’를 정말 재밌게 읽었었는데, 출판되면 살 생각이다. 아무쪼록 좋아하는 시인이 한 명 생겨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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