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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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와이 태생이자 현앨리스의 아들, 체코에서 거주하며 의사로 생활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웰링턴의 삶을 다룬 소설. 작가가 정병준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을 읽고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정웰링턴의 어머니인 현앨리스는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맏딸로, 중국과 미국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해방 뒤 귀국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간첩 혐의로 추방되고, 북으로 올라갔지만 박헌영의 애인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현앨리스와 마찬가지로 그녀와 함께 북한에 들어간 이경선 목사, 한흥수는 그들을 북한으로 불러들인 박헌영과 함께 숙청당한다.

 

소설에서 정웰링턴의 삶은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대신 그의 삶이 끝에 도달하기 전에 마주했을 특정한 장면들과 그 순간에 그가 했을 법한 생각들을 콜라주하는 형식으로 소설은 구성된다. 이 형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에 핵심적인 문제가 됐을 법한 고민들을 들여다보고, 삶을 사로잡았던 테마와 이데올로기적 딜레마,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들을 만져보게 된다. 2부라 할 수 있는 미래를 전망함파트에는 에세이 형태로 쓰여진 일종의 취재기가 담겨있다. 이 부분을 읽고나서 앞에 실린 콜라주 형식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 정웰링턴의 삶과 생각들이 또 한 번 새롭게 다가온다.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서 필사해놓는다.

 

그는 신들의 정원에 대해 생각하는 게 좋았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만성적이고 일상적인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것이다. 그는 카우아페이아 해변 바닥에 가라앉은 레닌의 책을 생각했다.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선우씨는 말했다. 우리의 생각과 행위가 그들을 죽인 거라고, 믿음의 길은 죽음의 길이라고.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었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는 월북하거나 살해됐고 전향했으며 북한의 공산주의자는 숙청됐고 처형됐고 유배됐다. 미국의 공산주의자는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됐고 전향하거나 추방됐고 자취를 감췄다.

 

정웰링턴은 체코 사회에 편입되지 못했다. 그는 1903년 시작된 하와이 이민 1세대 집안의 자식으로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였지만 동양인이었고 정신적으로는 조선의용대 계열의 좌익 파르티잔이었지만 체코 비밀경찰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북한에서 스파이로 지목당해 처형당했다. 그의 친구와 가족은 모두 미국인이었다.

 

진정한 공산주의를 위해선 현재의 공산주의 체제를 부정해야 한다. 정웰링턴은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의 체제를 인정하는 것은 공산주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공산주의? 안나는 생각했다. 믿음과 관련 있는 자들은 위험한 자들이다. 그들은 혁명가나 투사, 성인이 아니라 욕망으로 가득 찬 야심가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두 개다. 죽음 또는 출세.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정웰링턴의 문제는 자신이 어느 시간대에 존재하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그는 현재의 시간에 미래의 시간을 기입했고 미래의 시간을 과거의 시간에 기입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현재는 거듭 후퇴했고 현재를 깨달을 때면 마비 상태가 되었다. 소년 윌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었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알게 되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이삭 바벨은 말했다. 나는 새로운 장르를 발명했습니다. 그것은 침묵이라는 장르입니다.

 

재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체코를 북한으로 통하는 창구로 활용했다. 정웰링턴과 선우학원도 북한을 위한 길목으로 체코를 선택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입국을 거절당했다. 선우학원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코에서 공산주의의 실상을 봤고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북한의 동지들은 모두 죽었다. 정웰링턴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을 점차 상실해갔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게 그런 판단을 할 능력이 있었을까. 정웰링턴은 믿음과 회의, 위선과 위악의 세계를 부유했고 밤이 되면 절망 속으로 도피했다.

 

우리 삶이 뻗어나갈 수많은 줄기 가운데 어둡고 음울하며 비극적인 능력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 눈에만 부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이들에게는 오랜 세월 회자될 이야기의 재료가 될지도 모르고 그런 점에서 잠재되어 있는 것들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고 무작위적이며 우연적이다.

 

진지한 답은 그를 곤경에 몰아넣었고 실없는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경직되어가는 것을, 위장부터 천천히 딱딱해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인 현상이었다. 피는 더디게 흘렀고 부분적으로 고여 멍울을 이루었다. 곧 완전히 굿을 것이다. 나는 완전히 멈출 것이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지만 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변화는 불가능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계는 정지했고 꿈은 오로지 과거를 향했다.

 

정치적 해방은 한편으로 인간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이기적인 독립적 개인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공민으로, 도덕적 인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이 추상적 공민을 자기 안으로 환수하고, 자신의 경험적 삶 안에서, 개별적 노동 안에서, 개별적 관계 안에서 개별적인 인간으로 유적 존재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회적 힘으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 안에서 그자체로 분리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성된다.

 

나는 삶에도 마르크스주의에도 빚지지 않았다. 하와이의 한인 사회에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에도 부채가 없었고 어떤 이념과 철학에도 빚지지 않았다. 반면 그들은 내게 많은 빚을 졌다. 우리 가족에게도 빚을 졌고 친구들에게도 빚을 졌다. 나는 어떤 것도 돌려받지 않을 것이다. 윌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을 것이고 사람들이 이를 자살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어에 불과하고 나의 선택은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숫자, 개념 따위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했다. 관점에 따라 그것을 무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능력이야말로 가장 과대평가된 덕목이다. 능력은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며 결국에는 그의 밖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사람들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

 

유명해요? 누구요? 곰브로비치. 유명……한가? 저는 유명한 작가가 좋아요. 맑시스트가 말했다. 그녀에 따르면 유명한 작가는 1) 민중적이고 2) 설득력 있으며 3) 파급력 있다. 논리적 구성은 아니에요. 셋 모두 셋과 연결되니까. 어쨌든 작가는 유명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유명한 작가가 좋은 작가는 아니지만 유명하지 않은 작가를 좋아하는 건 개인주의거나 엘리트주의예요. 그녀가 말했고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말이 무섭거나 전체주의적이고 극단적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를 맨 정신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고(민중이라니) 의문이 들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납득이 됐다. 개인주의의 시대에-그녀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장악한 20세기 중후반 이후-자유주의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1) 합리주의 2) 개인주의-개인주의적인 문학이나 예술이 득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이 유명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한기의 소설을 백만 명이 읽는다고 생각해보라. 그 나라에는 문제가 있다. 핵을 떨어뜨려야 할까. 그 작품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게 아니다. 그럼 뭘까?

유명하잖아요. 맑시스트가 말했다.

누가요?

당신.

관점에 따라……

 

동시대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지함이 아닌, 동시대와 내가 멀어지고 있는 감각이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동시대와 가깝다고 느낀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든 예술과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총체성을 사유할 수 없는 시대, 복잡성의 정도가 정신이 파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지만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할 때조차 알고 있다. 자신의 앎과 행위를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 짓는 흉내를 낼 뿐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정치적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적인 것은 무엇인가.

집중을 방해하고 강박적인 자본주의의 여건 속에서 사람들은 충분히 뭔가 잘못되고 뭔가 빠져 있고 뭔가 극심하게 불공정한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이 생각을 이런저런 맥락 속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이 생각에 대해 잊어버리고, 이메일을 확인할 수도 있다. 혹 다르게 해보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청원에 서명을 한다든지, 블로깅을 한다는지, 투표를 한다든지 개체로서 자기 나름의 몫을 행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개체로서만 사고하고 행동한다. 조ㄷ 딘을 인용하며 젊은 맑시스트가 요청하는 것은 새로운 금욕주의다. 쇼핑을 멈추는 것, 기부를 멈추는 것, 각개전투를 멈추는 것.

 

빅토르 세르주: 나는 자아를 공허하게 주장하는 란 말을 쓰는 게 싫다. ‘란 말에는 착각과 환상은 물론이고, 허영과 오만도 들어 있다. 나는 되도록 우리란 대명사를 쓰겠다. [……] 당연히 사실에 더 가깝고,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가장 사적인 사유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수천 가지 방식으로 연결 돼 있다.

 

우리는 미술관이 가장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데 동의했다. 햇살과 바람이 없지만 어떤 몰보다 좋고 그건 미술관 특유의 엉거주춤함 때문이야. 몰은 구매를 위해 야단법석이고 자연은 특유의 무심함이 있는 반면 미술관은 늘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 예술이 너무 예술 같으면 키치고 너무 예술 같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지. 그럼 어떡하라고? 너무 예술 같지 않으면서 너무 예술 같지 않지도 않아야 해. 뭐래…… 그냥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잘 만든 게 뭔데? 몰라, 꺼져. “이라는 걸 보편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 나 진지하게 말해도 돼? ? 너가 읽은 책 다 불태우고 싶어. 아니면 뇌를 꺼내서 클로로포름에 담아 라스푸틴의 성기 옆에 전시하는 거야. 칭찬이야?

 

어떤 독자를 생각하고 글을 쓰냐고 젊은 맑시스트가 질문했다. 열차 안이었고 나는 김석형의 무거운 구술집을 읽으며 졸고 있었다. 체코의 서쪽 들판이 창밖을 지나갔다. ? 생각하는 독자가 있어요? 가끔 받는 질문이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날 열차 안에서 처음 생각났다. 나는 말했다.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 한국에 와본 적 없고 자기 나라의 어느 도시에 살며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는 사람. 읽는 걸 좋아하고 쓰는 것도 좋아하고 책을 출간하고 싶지만 어쩌면 그냥 가까운 사람들 몇몇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사람. 퇴근하면 피곤해 죽을 것 같지만 책과 노트 따위를 챙겨 카페로 가서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읽는 사람. 날씨 좋은 초여름 저녁이나 초가을 저녁, 사람들은 약속을 잡고 술을 마시고 어울려 놀지만 그는 매일 카페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거야. 졸릴 때도 있고 지루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고 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드는 거야. 끝장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도 저녁마다 밤마다 책을 읽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집에 와서 완전 녹초가 되고 출근을 무슨 정신으로 하는지 모르겠는데도 말야. 나는 그런 사람을 상상하고 글을 쓰는 것 같다고 그녀에게 말했다.

 

내 책의 첫번째 독자는 나라고. 그 말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변함이 없으며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이상을 원하게 되었고 그 이상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독자를 찾을 수 없다.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지? 진정한 작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 그러나 그건 더 이상 이유나 동력이 되지 않는데 갑자기 열차 안에서 떠오른 것이다. 새로운 독자가 다른 곳에 있지만 나와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고 하지만 내가 아닌. 그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고 나는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써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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