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2판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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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마크 피셔의 책. 마크 피셔는 우울증으로 2017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이런 좋은 책 남기고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추후 <기괴한 것과 오싹한 것>, 그리고 여러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든 중심 기지이자 전설적인 블로그였던 K-PUNK의 글들을 모은 <K-PUNK>도 읽을 생각이다. <K-PUNK>는 이미 사둠.

 

이 책은 자본주의 바깥을 아예 상상하지 못 하는,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정치철학 에세이다. 마크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과 관점을 토대로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규정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신자유주의와 겹치는 면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면적인 규제의 철폐로 시장의 효율성이 극대화됨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형태의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적 비전이 신자유주의였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가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어떤 체제를 갖고 오든, 그것들은 모두 최악이라는 생각 혹은 태도를 의미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 이상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야만적이고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 모든 존재가 오직 돈으로 평가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미 확립된 질서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이 질서가 이상적이라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나머지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반자본주의까지 식민화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이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실제로는 강화한다.” -E 같은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반자본주의를 상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세계를 잠식한 상황, 심지어 반자본주의까지 그 안에 끌고 들어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크 피셔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가 고통을 안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도덕적 비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할 뿐이다. 빈곤, 기아, 전쟁 등이 현실의 불가피한 일부로 제시되는 한 이런 고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쉽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보여 줄 때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 지난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으며, 이 존재론은 건강관리와 교육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영역이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했다.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자본주의는 결코 자연 상태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틀이고 룰일 뿐. 리얼리즘이 균열되는 순간, 이 사실, 즉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설정한 룰이라는 것이 실재와 함께 드러난다.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실재다. 이를 드러내고 폭로해야 한다.

 

이외에도 교육자와 학생의 입장에서 청년층이 겪는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많은 청년들이 반성적 무기력/우울증적 쾌락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설명되는 우울증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에서 비롯한 우울증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무언가 빠져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 원칙 너머에서만 이 불가사의한 향락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 한다.”, 마크 피셔는 대담에서 이렇게 보충 설명한다. “오락과 쾌락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우울증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쾌락주의적 우울증을 논의하며 주목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가령 쾌락 원칙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은 끊임없는 쾌락이 아니라 영구적인 불면증을 산출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클릭하며 밤을 보내는 우리의 경험은 정확히 쾌락과 권태의 동시성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그런 권태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간극을 매웁니다. 그러나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고자 하는 불면증적인 욕구가 곧바로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관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어째서 시장스탈린주의적 신관료주의를 불러일으키는지도 설명한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내용이 아니라, 숫자나 기록, 즉 성적이나 성과로 표현되는 상징이 중요해지면서, 시장이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와 꼭 닮아진다는 것이다. 보수적/자본친화적 언론에서 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사실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데, 이 지점을 지적한 것도 굉장히 날카로웠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큰 정부는 사실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작동한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위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들을 보며, 당연히 포스트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됐다. 그 내용으로 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사실 뭐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총체적으로 갖다 쓸 수 있는 건 다 갖다 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시장의 병폐를 어느 정도 막는 역할을 했다면 그런 부분을 되살리는 것도 해법의 일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주장처럼, 에너지 생산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도 필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케티의 부유세 같은 제도가 됐든지, 칼 폴라니의 것이든,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든, 기본소득이든 뭐든 갖다써야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병폐들을 폐기하고 포스트자본주의를 도래시킬 수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는 경제 체제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정신과 의식, 욕망의 내용과 미학적 대안을 채우는 데에도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태동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마크 피셔가 죽기 전까지 꾸준히 문화 비평을 한 이유도 이것일 테다. 책의 종반부 아래 두 문단이 인상깊다.

 

다시 영년year zero이다.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좌파의 악습 중 하나는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 자신이 정말로 믿고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조직하기보다는 크론슈타트 봉기나 신경제정책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자본주의 정치조직화 형태의 실패가 절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의 정치를 향한,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희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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