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엉 오늘의 젊은 작가 39
김홍 지음 / 민음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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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 김홍

2023년 3월에 (당시엔 노원에 있던) 책방봄에 난생 처음으로 북토크라는 걸 놀러 갔었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전혀 가지 않았는데, 책방지기님인 영신님이 놀러오시라고 좋아하실 거라고 해서 가게 됨… 그때 북토크는 류진 시인님의 시집 <앙앙앙앙>과 김홍 소설가님의 <엉엉>을 주제로 진행됐고, 나는… 소설가들과 시인들 사이에 꿈많고 열정넘치는 문청처럼 껴 있었다. 그리고 훗날 스승님이 되는 이갑수 소설가님의 <외계 문학 걸작선>과 김쿠만 소설가님의 <레트로 매니아>, 이유리 소설가님의 <브로콜리 펀치>, 서요나 시인님의 <물과 민율>, 서호준 시인님의 <소규모 팬클럽>, 김홍 소설가님의 <엉엉>과 <스모킹 오레오>,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를 샀다…. 이중에 읽은 건… 이제 세 권 뿐… 😂 하지만 차근 차근 읽어나가겠습니다. 다 너무… 좋네요…. 🥹 하지만 전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걸요…. 😂

아무튼 김홍 소설가님의 신작 <프라이스 킹!!!>이 나왔길래, 전작인 <엉엉>을 얼른 읽어봐야겠단 마음으로 읽게 되었다. 소설집 <우리가 당신을…>을 넘 재밌게 읽었어서 이 소설도 기대를 잔뜩 품고 읽었다. 그리고 졸잼이었다….

<엉엉>은 묘한 혼종의 소설이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든가, 쿠팡을 애용한다든가, 그래서 로켓배송의 편리함을 누린다든가, 집합금지 명령이 내려진 풍경을 보여준다든가, 고로쇠물을 시킨다든가 하는 장면 장면들을 보면 리얼리즘의 전통을 따르는 듯 싶다. 하지만 본체가 빠져나간다든지,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든지, 그리고 눈물과 함께 세상에 비가 쏟아진다든지, 고양이가 쿠팡 배달원으로 일한다든지 하는 설정들은 초현실적이다. 주인공의 태도도 초현실적인데, 이를테면 본체가 빠져나간 게 무슨 상황인지, 본체란 건 영혼인 건지, 이를 통합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는 고민을 하진 않는다. 다만 본체가 오랜 시간 연락도 없이 사라져있던 걸 서운해한다.

<엉엉>의 매력은 그 환상성이 현실과 뻔뻔하게 접합될 때 드러난다. 강보원 시인이 발문에 예를 든 것처럼, 이를테면 국어련(국제어린이연합) 같은 세상에 없을 조직이 현실정치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 같은 것에서. 특유의 농담과 능청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본체들이 모인 ‘우리들‘은 다 뭐고 이들이 벌이는 한바탕 소동은 다 뭔지, 모든 지체들의 본체화는 뭔지, 맥도날드에서 실패한 생일 파티는 다시 치뤄질 수 있는지 싶을 때에도 소설은 능청을 멈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백종원인 박종일이 대통령이 된다는 설정도, 그 설정으로 인해 파생되는 일들도 끊임없이 웃음을 준다.

<엉엉>은 일종의 ‘재난물’이지만, 강보원 시인의 말처럼 무엇보다도 우정에 관한 이야기처럼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역시 강보원 시인의 말처럼) 우리 모두가 새롭게 태어날 때에야(혹은 김범석이라도 돼야…) 눈물이 그칠 것임을 암시하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모든 게 흩어져도 우정은 남는 세상, 멈춤없는 눈물이 (김홍처럼) 능청스러운 농담으로 대체되는 세상, 그런 세상은 가능할까. 어떻게? 모르겠지만,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해야지 뭐…

#김홍 #엉엉 #민음사 #소설 #한국소설 #문학 #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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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2판
마크 피셔 지음, 박진철 옮김 / 리시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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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철학자인 마크 피셔의 책. 마크 피셔는 우울증으로 2017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진짜 이런 좋은 책 남기고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추후 <기괴한 것과 오싹한 것>, 그리고 여러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든 중심 기지이자 전설적인 블로그였던 K-PUNK의 글들을 모은 <K-PUNK>도 읽을 생각이다. <K-PUNK>는 이미 사둠.

 

이 책은 자본주의 바깥을 아예 상상하지 못 하는, 현재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날카롭게 통찰하는 정치철학 에세이다. 마크 피셔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슬라보예 지젝의 이론과 관점을 토대로 지금의 이데올로기적 교착 상태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규정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신자유주의와 겹치는 면이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면적인 규제의 철폐로 시장의 효율성이 극대화됨으로써 우리에게 가장 좋은 형태의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허황된) 유토피아적 비전이 신자유주의였다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가 최고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어떤 체제를 갖고 오든, 그것들은 모두 최악이라는 생각 혹은 태도를 의미한다. 알랭 바디우의 말이 이상황을 아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야만적이고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 모든 존재가 오직 돈으로 평가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미 확립된 질서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이 질서가 이상적이라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나머지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심지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반자본주의까지 식민화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이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실제로는 강화한다.” -E 같은 애니메이션은 우리의 반자본주의를 상연하고, 그리하여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소비를 계속 이어 갈 수 있다.” 자본주의를 일종의 자연상태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세계를 잠식한 상황, 심지어 반자본주의까지 그 안에 끌고 들어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마크 피셔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가 고통을 안기는 방식을 강조하는 도덕적 비판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강화할 뿐이다. 빈곤, 기아, 전쟁 등이 현실의 불가피한 일부로 제시되는 한 이런 고통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쉽게 순진한 유토피아주의로 치부될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비일관적이고 방어될 수 없음을 보여 줄 때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표면적인 리얼리즘에 리얼리즘 같은 것은 없음을 드러낼 때만 그것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 지난 30여 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성공적으로 비즈니스 존재론을 확립해 왔으며, 이 존재론은 건강관리와 교육을 포함해 사회의 모든 영역이 비즈니스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단순히 자명한 사실로 간주했다. 브레히트부터 푸코와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급진 이론가가 주장해왔듯이 해방의 정치는 언제나 자연적 질서의 외양을 파괴해야 하며 필연적이고 불가피하다고 제시되는 것이 그저 우연적일 뿐임을 폭로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자본주의는 결코 자연 상태의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만든 틀이고 룰일 뿐. 리얼리즘이 균열되는 순간, 이 사실, 즉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설정한 룰이라는 것이 실재와 함께 드러난다. 기후 변화와 생태 위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실재다. 이를 드러내고 폭로해야 한다.

 

이외에도 교육자와 학생의 입장에서 청년층이 겪는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많은 청년들이 반성적 무기력/우울증적 쾌락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설명되는 우울증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즉 쾌락을 얻지 못하는 무능에서 비롯한 우울증이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능의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무언가 빠져있다고 느끼지만 오직 쾌락 원칙 너머에서만 이 불가사의한 향락에 접근할 수 있음을 감지하지는 못 한다.”, 마크 피셔는 대담에서 이렇게 보충 설명한다. “오락과 쾌락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우울증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쾌락주의적 우울증을 논의하며 주목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가령 쾌락 원칙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은 끊임없는 쾌락이 아니라 영구적인 불면증을 산출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클릭하며 밤을 보내는 우리의 경험은 정확히 쾌락과 권태의 동시성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그런 권태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간극을 매웁니다. 그러나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고자 하는 불면증적인 욕구가 곧바로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관료주의를 타파하겠다는 신자유주의가 어째서 시장스탈린주의적 신관료주의를 불러일으키는지도 설명한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의 내용이 아니라, 숫자나 기록, 즉 성적이나 성과로 표현되는 상징이 중요해지면서, 시장이 스탈린주의적 관료주의와 꼭 닮아진다는 것이다. 보수적/자본친화적 언론에서 큰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도 사실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데, 이 지점을 지적한 것도 굉장히 날카로웠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큰 정부는 사실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작동한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비난받기 위해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 날카롭고 정확한 통찰들을 보며, 당연히 포스트 자본주의를 생각하게 됐다. 그 내용으로 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사실 뭐든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총체적으로 갖다 쓸 수 있는 건 다 갖다 써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케인즈주의가 시장의 병폐를 어느 정도 막는 역할을 했다면 그런 부분을 되살리는 것도 해법의 일부는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주장처럼, 에너지 생산 방식의 전면적인 전환도 필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케티의 부유세 같은 제도가 됐든지, 칼 폴라니의 것이든, 새로운 형태의 마르크스주의든, 기본소득이든 뭐든 갖다써야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병폐들을 폐기하고 포스트자본주의를 도래시킬 수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는 경제 체제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정신과 의식, 욕망의 내용과 미학적 대안을 채우는 데에도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태동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됐다. 마크 피셔가 죽기 전까지 꾸준히 문화 비평을 한 이유도 이것일 테다. 책의 종반부 아래 두 문단이 인상깊다.

 

다시 영년year zero이다. 새로운 반자본주의가 출현할 하나의 공간이 마련되었고 여기서는 반드시 옛 언어나 전통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좌파의 악습 중 하나는 역사적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한다는 것, 자신이 정말로 믿고 있는 미래를 계획하고 조직하기보다는 크론슈타트 봉기나 신경제정책을 계속해서 검토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전의 반자본주의 정치조직화 형태의 실패가 절망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패의 정치를 향한, 패배한 주변성이라는 편리한 입장을 향한 낭만적 애착을 버릴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억압적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은 대안적인 정치적, 경제적 가능성의 희미한 기미만 보여도 뜻밖의 거대한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가장 사소한 사건들도 자본주의 리얼리즘 아래서 가능성의 지평을 표지해 온 그 반동의 회색장막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다시 한 번 무엇이든 가능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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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경일일 1~2 세트 - 전2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이주향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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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는 자신이 만들던 잡지가 폐간하자, 그 책임을 지겠다며 잡지사를 퇴사한다. 그 후 필사적으로 만화로부터 멀어지려 하지만, 불가능했고… 그는 새로운 만화잡지를 독립출판하기 위해 여러 만화가들을 만난다.

이 만화에는 만화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주인공 뿐만 아니라, 가능성과 재능은 있지만 감정기복이 심한 작가와 그와 새로운 파트너가 된 편집자, 그리고 젊은 시절엔 뛰어난 작품을 그려냈지만 어느덧 퇴물이 되어버린 작가, 야간 경비원 일을 하며 창작을 접은 작가, 마트에서 일하며 자녀 교육에 신경쓰는 평범한 워킹맘이되었지만 시오자와와의 만남으로 잠들어있던 열정이 깨어나는 작가,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게 아니라 잘 팔릴 만화를 그리게 된 작가, 자기가 그리고 싶은 만화만 그리겠다고 다짐하고 점점 더 작품이 안 팔리게 된 작가 등 다양한 인물 군상이 나온다.

한 에피소드가 끝나면 항상 그 이야기가 담긴 도시의 풍경을 한 컷에 담아 그린다. 감동과 여운 때문에 거의 울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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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개업 축하 시 민음의 시 284
강보원 지음 / 민음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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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책방봄에서 류진 시인님께 소개 받고 읽게 됐다. 류진 시인님은 내게 “100% 좋아하실 거”라고 하셨다. 해설도 류진 시인님의 시집 <앙앙앙앙>의 해설을 쓰신 조재룡 평론가님이 쓰셨다. 그래서 뭔가 같은 계열인가 생각했다. 시알못이라 잘은 모름….

시인님 말씀대로 이 시집은 100% 좋았다. 약간 어렵기도 했지만… 시 하나당 두 번 세 번씩은 읽은 듯. 그렇게 읽으니 시어들과 시의 구조가 좀 더 잘 보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이렇게 읽으면 되겠지? 😅 시를 다 읽고서는 해설을 통해 이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해설이 더 어려웠던 것 같기도… 하하 원래 안 어려울 거란 기대는 없었지만. 😅 하지만 그건 시알못인 저의 탓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이해가 안 가거나 그랬던 건 아니었다. 천천히 읽으면서 혼자 조용히 탄복하고 기뻐하고 감탄했다. “언어의 쓰임새를 이런 식으로 탐구하고 실험하는구나”, “그래 잘 모르겠지만, 시라는 게 이런 걸 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다.

잔잔한 유머가 있어서, 읽으면서 종종 소리내 웃기도 했다. 허버트씨와 나무인간과 호빵 누나는 나올 때마다 반갑더라. 개인적으로는 ‘클라리넷 연주법‘과 ’완벽한 개업 축하 시‘, ’파란 코끼리‘, ‘훔쳐 쓰기로 결심하는 시’가 가장 좋았다.

강보원 시인님이 민음사 블로그에 연재했던 에세이 ‘에세이의 준비’를 정말 재밌게 읽었었는데, 출판되면 살 생각이다. 아무쪼록 좋아하는 시인이 한 명 생겨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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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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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5편과 에세이 2편이 담긴 책. 이것도 좀심하게 좋았다.

 

<>은 슬픔의 초상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미국인 짐이 넋놓고 불쇼를 바라보는 장면을 꽤 강렬하게 담아냈다. <참을 수 없는 가우초>는 은퇴한 변호사가 팜파스 지대의 농장으로 가서 가우초들(말하자면, 라틴 아메리카의 카우보이들)을 고용하고 토끼들과 뛰노는(?) 이야기다(아님). 역자의 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보르헤스의 <남부> <마가복음>을 패러디했다고 한다. 또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떠올리게도 하며, 여러 아르헨티나 작가들의 작품들을 따왔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상호 텍스트 놀이의 방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라는 것. 다른 건 안 읽어봐서 이런 건 몰랐음. <경찰 쥐>는 카프카의 <여가수 요지피네 혹은 쥐 족속>과 연결되는 작품이다. 카프카의 소설 속 쥐이자 가수인 요제피네의 조카가 쥐이자 경찰로 나온다. 탐정소설의 형식으로 현대의 병폐와 악의 욕망을 그려낸다. 되게 재밌게 읽음. <알바로 루셀로트의 여행>은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루셀로트가 프랑스의 영화감독 모리니가 자신의 소설을 자꾸 표절하는 것에 아무 대응도 안 하다가, 오히려 그가 자신의 최고의 독자라고 느끼며, 파리에 있는 그를 만나는 이야기다. 사실 나는 예술의 표절 문제에 좀 관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인가 역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두 편의 가톨릭 이야기>는 신성함과 폭력이, 선과 악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한 이야기다. 눈 내리는 어느날, 성직자가 되려는 한 소년은 신비한 수도승을 마주치고 이를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날, 갓 정신병원에서 나온 한 사람이, 수도사와 아이를 살해하고 수도복을 입으며 집에서 나온다. 라쇼몽처럼 관점을 달리하는 이야기인데, 이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아이러니를 잘 담아냈다.

 

에세이 <문학+=>진짜최고였다. “나 책 왜 읽지?”, “문학은 다 무슨 소용이지?”에 대한 최고의 답변과 생각이 담긴 에세이 중 하나가 아닐까. 그래 문학+=병이지. 어쩌라고. 에세이 <크툴루 신화>에는사실 잘 모르는 작가들 얘기가 많이 담겨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스페인어권 문학의 베스트셀러들이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여튼 그럼에도 볼라뇨의 비꼬는 솜씨는 기가 막히다고 느꼈다. 루이스 하이드가 <선물>에서 이야기한 부분과 맞닿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것, 예술()은 선물인 동시에 상품일 수 있다. 이때 예술은 선물의 속성은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선물이 아니라 상품으로만 존재하는 예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술을 선물 받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선물을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

 

다음은 <문학+=>에서 인상적이었던 구절들.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어둠의 인간, 잔학한 인간은 어둠의 환희, 잔학한 행복을 시도할 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중략) 잔학한 인간의 행복은 잔학합니다.”

 

권태의 사막 한가운데 있는 공포의 오아시스. 근대인의 병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명확한 진단이 있을까요. 그 권태를 벗어나는 데, 그 죽음의 상태를 탈출하는 데 우리 손에 주어진 유일한 것, 그렇다고 그다지 우리가 손에 쥐고 있지도 않은 그것은 바로 공포입니다. 다시 말해 악이란 말입니다.”

 

“<그 미지의 세계 깊은 곳으로, 새로운 것을 찾아>라는 마지막 시구는 무한에 무한이 더해지더라도 무한은 여전히 무한이듯, 본질적인 변화 없이 공포로 수렴되는 공포에 맞서 싸우는 예술의 초라한 깃발입니다. 그것은 시인들의 전투가 대부분 그렇듯, 이미 패퇴가 자명한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말라르메는 여행과 여행자의 운명이 어떤지 알면서도 그 여행을 다시 시작하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이지튀르>의 저자는 우리의 행위만 병든 게 아니라 언어 또한 병들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치료를 위해 해독제나 약을 찾을 때, 새로운 것, 오직 미지의 곳에서 발견되는 그것을 찾으려면 섹스와 책과 여행을 탐험해야 합니다. 비록 이것들이 우리를 심연으로 이끌지라도 말입니다. 어쩌면 그 심연이 해독제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카네티는 그의 저술에서 20세기 최고의 작가 카프카가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처음 피를 토한 날 이후로 그 무엇도 자신과 글쓰기를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글쓰기와 떨어질 수 없다는 말로 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는 카프카가 여행과 섹스, 책은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이며, 그럼에도 뭔가를 찾아서 그 길에 들어서고 길을 잃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뭔가가 책이든 몸짓이든, 잃어버린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그 어떤 것이 됐든, 그걸 찾아서 말입니다. 운이 따르면 늘 거기에 있었던 것, 바로 새로운 것을 찾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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