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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 허풍담 1 - 차가운 처녀
요른 릴 지음, 백선희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5678서울도시철도에서 만든 '지하철 안전하게 이용하기'류의 광고를 보면 스마트폰을 보며 걷다가 지하철 기둥에 꽝-하고 부딪히는 남자가 등장한다. 나도 가끔 지하철역사에서 스마트 폰을 보거나 책을 읽으며 걷다가 기둥에 부딪힐 뻔한 경험이 더러 있었기에(다행히 아직까지 내 이마와 지하철 벽, 혹은 기둥이 갑작스럽고도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다. 휴우~)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출근 길, 나는 다시 한 번 지하철 기둥에 부딪힐 뻔한 경험을 했다. 그 때 난, 『북극 허풍담』을 읽고 있었고, 작가, 요른 릴이 풀어놓은 북극 사냥꾼들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흥미진진해서 책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른 릴(Jørn Riel), 그는 어떻게 허풍담(skrøner)을 쓰게 되었나.
1931년 덴마크의 오덴세(널리 알려진 덴마크 작가인 안데르센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태어난 요른 릴은 대자연, 그 중에서도 주로 북극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써온 작가 겸 탐험가다. 10대 후반 그린란드 북동부 탐사에 참여했다가 북극의 매력에 빠진 요른 릴은 그곳에서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끝없는 낮과 끝없는 밤이 교차하는 그린란드. 문명의 이기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미지의 땅이지만, 북극의 주민들에게는 오히려 우리가 '저 아랫 것들'이다. 단지 위도 상으로만 저 아래에 사는 것들이 아니라 삶의 가치적 측면에서도 '저 아래'에 사는 것들이라는 의미다.
혼자, 혹은 둘 셋씩 짝을 지어 광활한 대지에 흩어져 지내는 이들은 사실, 유럽에서 태어나 사냥회사에 고용되어 극지로 파견된 전문 사냥꾼들이다. 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추위와 어둠, 그리고 고독에 익숙해진터라 이제는 북극식으로 살아가는 법이 몸에 배어버렸다. 이들과 함께하는(이라고는 하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썰매로 몇 날 몇 일을 달려야만 사람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서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다) 북극에서의 삶을 선택한 작가는 극지의 자연환경과 그 곳에 둥지를 튼 사냥꾼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유머와 메세지를 찾아낸 요른 릴은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적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북극 사냥꾼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책장수가 요른 릴의 원고를 몰래 가져가 출판업자에게 넘겼고, 그 출판업자는 이 보물같은 원고를 덥썩 물었으니 그것이 바로 요른 릴의 이야기가 북극을 벗어나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계기라는 말씀!
『북극 허풍담(Den kolde jomfru og andre skrøner)』
허풍담. 이는 말 그대로 '실제보다 과장을 해서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라는 의미다. 요른 릴은 북극에서 본인이 직접 듣고 보고 겪은 이야기들에 양념을 가미해 실제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북극 허풍담』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소개된 이 이야기들은 10권의 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작가 요른 릴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한국어로는 1권부터 3권까지가 이번에 번역, 출간된 것 같은데 4권부터의 출간 여부는 독자들의 반응에 달렸다고 한다(친절하게도(?) 책에는 출간 촉구 메세지를 보낼 메일 주소까지 적혀있다).
내가 이번에 읽은 책은 시리즈의 첫 권으로, '차가운 처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책에는 북극에 사는 사냥꾼들과 일 년에 한 번 보급품을 배달하기 위해 북극을 방문하는 수송선을 타고 나타난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0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단편보다는 오히려 콩트에 가까운 짧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독자는, 겉으로 보면 고독하고 우직하고 자칫 험악해 보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순박하고 귀여운데다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엉뚱한 행동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북극 사냥꾼들의 일상과 만나게 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이란 없다. 북극의 사냥꾼들마저도!
일본의 오지 탐험가, 우에무라 나오미의 『안나여, 저게 코츠뷰의 불빛이다』는 그린란드의 야콥스하운을 출발해 두 번의 생일을 북극의 눈보라 속에서 오직 썰매개들과 함께 보내고 알래스카의 코츠뷰에 닿은 한 탐험가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북극이라는 공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피가 돌고 숨을 쉬고 생각을 하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따뜻한 공간으로서의 북극을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었다. 우에무라 나오미의 책에도 그 척박한 땅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등장한다. 우에무라 나오미와 안나를 필두로 한 그의 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였던지라 사냥꾼들의 이야기까지 자세히 그려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언뜻 등장하는 북극의 사냥꾼들은 마치 겉은 거칠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그 맛이 진국인 호밀빵과 닮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북극 허풍담』에 등장하는 사냥꾼들은 어떠한가? 요른 릴이 그리는 사냥꾼들은 독특하고 재기발랄하다. 그리고 (특히) 긴긴 겨울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삶이 요른 릴의 언어를 거치면서 유머러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잔한 감정을 몰고오는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부족하면 부족한 가운데에서 만족을 찾고 자연을 거스르는 분수에 넘치는 짓은 하지 않으며 몇 명 되지 않는 북극의 이웃사촌들과의 관계를 유쾌하게 조율해 나가며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솔직히 첫 번째 수록된 「남동풍」을 읽을때까지만해도 '엥? 이건 뭐지?'라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문신 예술가」 같은 이야기는 유머러스하고 「알렉산더」 같은 이야기는 감동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수록된 「오스카 왕」이 중간까지는 매우 감동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다 마지막엔 호러(?)로 끝을 맺어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덕분에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인생이란 없구나. 북극의 사냥꾼들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