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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의 정원
리앙 지음, 김양수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대만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리앙(李昻, Li Ang)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미로의 정원(迷園)』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전에 대만 출신 작가의 글을 읽어 본 적도 거의 없는 데다 리앙의 소설도 처음인데, 이 작품은 출간 이래로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소설이라고 하여 더욱 기대가 컸다.
작가의 조국인 대만의 역사와 한국의 역사는 닮은꼴이다. 둘 다 일본 식민지배를 받았고 한국이 그러했듯 대만도 오랜 기간 동안 국민당의 군사 독재를 겪은 후에야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이어진 계엄령 하에서는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금지되었다고 하는데 작가, 리앙은 바로 이 시기에 『미로의 정원』을 집필했다고 하니 대만 민족의 역사와 관련된 민감한 이슈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얼마나 많은 검열을 받았을 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가가 1991년에 쓴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것은 『미로의 정원』은 <중국시보>에 연재되는 동안 일부 내용을 삭제당했으며, 출판된 단행본이야말로 진정한 원본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인국이 등장하는 동화로만 알고 있던 『걸리버 여행기』를 무삭제 완역판으로 읽었을 때의 충격을 떠올리며 나는 소설, 『미로의 정원』의 첫 장을 넘겼다.
주잉홍이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얼핏보면 (출간 당시로는 상당히 파격적이었을 장면이 다수 등장하는) 단순 연애소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대만 사회의 역사, 바로 그 자체가 아닐까.
각종 금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쓴 글이기에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많은 주제나 메세지들을 은밀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령, 처음부터 끝까지 매우 중요한 장소로서 계속 등장하는 대만의 명문 세가 루청 주씨 집안의 정원인 함원은 실은 대만이라는 나라 자체이며 주잉홍이 이끄는 주씨 집안이 거쳐온 세월은 대만 민족의 역사를 의미하는 식으로 말이다. 주잉홍은 힘을 잃은 지식인이었던 아버지, 주주옌이 집에서만 칩거하며 소중하게 가꿔온, 그러나 아버지 사후에 황폐해져버린 함원을 다시금 일으켜 세운다. 주잉홍의 이런 노력은 어린 시절부터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그 곳에서 계속 살아가며서 이제는 대만인이라기보다는 외국인에 더 가깝게 되어버린-그래서 아버지의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다시 대만을 떠나야만 했던- 주잉홍의 남자 형제들의 삶과 대조를 보인다.
주잉홍은 대만의 부동산붐을 따고 일약 거물로 떠오른 건축업의 대가이자 그녀의 남편인 린시겅의 도움으로 함원을 재건한다. 그리고 이공간을 정부에 헌납하는 대신 대만 사람들을 위한 공공의 장소로 기증을 하며 이야기를 맺는다.
"나는 이 정원이 타이완의 것, 2천 타이완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인민을 억압한 정부의 것이 아니라."
일면, 박경리의 『토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짧게 나마 대만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여행을 한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