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 A - Boy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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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침에 비가 왔었다. 온 몸은 말 그대로 땀과 습기에 푹 절여져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는 빨리 오지 않았고,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나는 발길을 돌려 조금 더 아래로 내려왔다. 씨네큐브로 들어간 것은 이대로 집에 들어가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보이A를 보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 낙인에 관한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눈이 퉁퉁 붓게 울었던 영화들은 모두 낙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들이었다. 일테면 파이란이 그랬고, 몬스터가 그랬다. 한번 깡패로, 살인자로 낙인이 찍힌 이들은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보이 A 또한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힌 한 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에릭은 10살 때 친구와 함께 같은 반 여자 아이를 죽인 죄로 14년 형을 선고 받는다. 영화의 첫 장면을 출소를 앞둔 에릭의 모습을 보여준다. 에릭은 더 이상 10살의 꼬마가 아니다. 20대의 청년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자신이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은 10살 때 까지의 세상이다. 보호감찰원은 그에게 나이키 운동화를 선물했고, 에릭은 자신의 이름을 잭이라고 바꿨다.
잭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직장을 갖게 됐고, 친구들이 생겼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여자친구까지 생겼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부모조차도 자신을 처참하게 버렸는데 잭은 이 모든 상황이 얼떨떨했고 꿈만 같았다.  

내가 처음 눈물을 흘린 장면은 잭과 미쉘의 베드신이었다. 미쉘의 집 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잭은 누워있는 미쉘의 큰 눈을 바라봤고 그 눈이 오로지 자신을 향해 있으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잭은 그만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것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눈빛이었다. 잭은 미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일은 죄책감을 갖게 했다.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것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행복하면 행복할 수록 잭은 괴로워졌고, 불안함은 하룻밤 사이에 현실이 되어 무섭게 달려들었다. 누군가의 밀고로 잭이 살인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잭은 회사와 친구들에게 전화 한 통화로 거부 당했다. 미쉘은 행방조차 알 수 없었다.  

잭은 오열했고 그건 아니라고 부정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잭은 도망쳤다. 마지막 장면에서 잭은 직장 친구였던 크리스에게 음성 메세지를 남겼다. 너를 만나는 동안 나는 항상 잭이었다고.
 
영화는 예상했던대로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잔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결국 해피엔딩은 없었다. 난간을 붙잡고 있던 잭의 부들부들 떨리던 팔과 다리가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이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기에 나는 잭이 수줍게 미소지을 수록, 큰 소리를 내어 친구들과 떠들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 모든 것은 누구보다 먼저 등을 돌릴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잔인하게 만드는걸까? 우리는 죄를 짊어질 보이A를 지목한다. 보이A의 뒤에 숨어있는 우리는 더 악랄할 때가 있다.
 
영화는 예상가능한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빛났던 것은 잭을 연기한 앤드류 가필드 때문이었다. 영국 악센트를 쓰며 지독한 죄책감과 불안함을 놀라울 만큼 지독하게 표현해 낸 그의 연기 덕에 나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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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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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부터 자식과 엄마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는걸까? 언제부터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부모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완벽하게 서로에게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없는걸까?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두 죽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더를 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도대체 왜? 라는 지긋지긋한 물음이었다.

 

스물여덞살의 도준은 아직도 엄마와 잔다. 그날 밤도 그는 엄마와 마주보고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여고생 시체 하나가 동네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형사는 시체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도준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골프공을 찾아내고 도준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엄마는 만만한게 우리 도준이라며 형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이건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결국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엄마는 진짜 범인을 찾기 위해 나선다. 검은 우비를 입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여고생이 죽은 옥상을 뛰어오르기도 하고, 비닐 장갑을 챙겨 들고 누군가의 집에 숨어들기도 한다. 범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엄마의 눈빛은 점점 광기에 휩싸인다.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도준은 교도소에서 바보라는 놀림에 또 싸움박질을 했다. 말그대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서 도준은 엄마에게 맞다보니까 중요한게 생각났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면회실 유리 가까이 다가선 엄마에게 가장 무서운 진실 하나를 들려준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이것은 극한의 모성애를 그린 영화가 아니라 엄마의 죗값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2시간 20분동안 우리는 엄마가 죄의 대가를 치루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형벌임과 동시에 절대 끝나지 않을 이야기다.

 

엄마는 첫 장면에서 비칠비칠 춤을 춘다. 몇명의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그것은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한 춤이었다. 우스운 몸동작이었다. 그러다가 엄마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뗐다. 엄마는 금방이라도 울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엄마는 춤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또 한번 춤을 췄다. 관광버스 안이었다. 엄마는 도준이 건넨 침통에서 침을 하나 빼서 속에 꽉 막힌 것을 풀어주는 침자리에 침을 하나 놓았다. 그리고 일어나 격렬하게 몸을 흔드는 아줌마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팔을 흔들어 댔다. 멀리서 해가 지고 있었고, 버스 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로 뒤엉켜 보였다.

엄마가 춤을 출 때 마다 나는 엄마의 발에 빨간 구두가 신겨져 있을 것만 같았다. 영원히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저주에 걸린 빨간 구두를 신어버린 것 같았다. 엄마는 춤을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자식을 안고 가는 동안, 그 자식을 버리지 않는 한 엄마는 그 춤을 멈출 수가 없다.

 

이건 진짜 이야기다. 진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가족이라는 것이 사실은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공동체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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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 - Know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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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는 노잉을 마치 스릴러나, 재난영화처럼 표현했다. 이런 영화에서 언제나 그렇듯 비밀이 많아 보이는 (창백한 피부의) 어린 소녀는 미래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도화지 가득 숫자를 써 나갔다. 그리고 아직 숫자를 다 쓰지 못한 상태로 종이를 빼앗겼다. 그 종이는 타임캡슐에 보관되어 50년이나 묻혀있었고, 50년후 케일럽이라는 소년이 빼곡하게 쓰여진 종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니콜라스 케이지)는 어느 날 그 숫자들이 50년간 있었던 큰 재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다. 노잉을 소개할 때 대부분 여기까지만 소개한다. 물론 그 뒤를 말할 순 없다. 그건 스포일러가 될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영화의 결말을 보고 분개하거나 허탈해했다. 어떤 방향이든 개운하다고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은 흡사 유한 킴벌리 광고의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식의 화면으로 전환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우리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였다. 영화는 결국 전인류(Everyone)의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멸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전 인류가 멸망하는 날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쳤고, 물건을 훔쳤고, 싸움을 했다. 그렇게 전 인류가 살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인류의 멸망은 장엄했고,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재앙의 재현이었다. 또한 홍수로 인류가 말살된 그때의 다른 버전이었다. 결국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때 노아의 방주안에 있었고, 현재의 선택받은 이들은 외계에서 온 듯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다. 그들은 외계인이라기보다는 케일럽의 말처럼 메신저(천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지구를 구하지 않아서 좋았다. 천체물리학자로 나오는 그가 태양열의 폭발까지 막아 지구를 구했다! 라는 결말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류가 멸망하는 날짜를 알았지만 결국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이 많았고, 원인도 알았지만 해결책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영웅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마지막에 천국을 재현한 듯한 장면보다 지구가 멸망하는 장면을 볼 때 더 깊은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나 또한 선택받지 못할 인간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길거리에서 고스란히 전 인류와 함께 멸종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어차피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면 더 쾌락을 추구하며 살겠다! 라든가, 아니면 이제라도 선택받기 위해 노력하면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냐? 라고 말 한다면...내 생각엔 방법은 없다.  

내가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다. 그저 또 하루를 사는 것 뿐. 하지만 경각심. 이 세상이 영원할 것 처럼 살진 말라는 경고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게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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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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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불면의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의 성격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고, 지적인 동시에 겸손하며, 사려깊은 동시에 냉철하고, 일도 잘하지만 옷도 잘 입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냉철하지도 지적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항상 거절을 두려워하며 오해에 쩔쩔맸다. 그녀는 누군가 화가 나 있으면 '혹시 나 때문인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어느새 그 사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혹은 요구하지도 않은 해명을 하고 다니며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람 앞에서 " 그게 아니고........." 라며 더 많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녀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런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 알아차렸으며, 속으로 경멸하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바꿔보려 했다. 그녀는 변명만 하고 사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오해를 견디고 사는 일이란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만 가능한 것인지, 그녀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뭔가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때마다 곤혹을 치르곤 했다. 누군가와 통화할 때, 그녀는 저쪽의 숨소리, 머뭇거림, 말투와 어조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이 사람이 지금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인지, 미안해서인지, 내가 만나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인지, 진짜로 그렇게 하자고는 못하겠지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것인지, 예의상 그렇게 하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녀는 "그쪽이 편한 곳에서" 나 "그쪽 편한 시간에" 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려하고 있지만 자신이 배려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해야만 했던 말들은 잘 못하면서, 하지 않아도 좋을 말들은 잘 한다. 만약 누군가와 밤새 술을 마셨을 경우, 그녀는 먼저 일어나겠다는 말을 못한다. 반대로 상대방이 그만 일어나자고 할 경우, 그녀는 속으로 '이 사람 여지껏 지겨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이 한없이 눈치없는 인간처럼 생각 되고, 그러면 예의바른 인간이라도 되어보자 싶은 마음에 "제가 괜히 오래 붙잡아둔 것 같아요" 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녀는 결정하거나 선택하는 일만큼 거절하는 일도 능숙하지 못하다. 그녀는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사람 앞에서 끊임없이 '안된다고 해. 싫다고 해' 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번번이 "네" 라든가 "제가 할게요" 라고 말해버린다. 가끔 용기를 내어 거절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 상처받았으면 어쩌지?' '나를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고민하느라 잠 못 이룬다. 그녀는 자신을 바꾸기로 결심한 날이면 사람들로부터 "어디 아프냐?" 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잠들기 전 다시 떠오른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녀가 잠 못 드는 진짜 이유는 아닐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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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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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 60p

 

채식주의자를 읽는 내내 목 덜미가 뻐근했다. 누군가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덩달이 밖에서는 한번도 들리지 않았던 고양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떤 공포감이 조금씩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생애 한번쯤, 특히 어렸을 때 어떤 대상에 대해 심각한 공포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주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간절함을. 그건 생존 본능이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 때문이다.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던 아버지, 평생을 고함치고 무력으로 가족을 다스리려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폭력을 영혜는 몸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육식은 곧 폭력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폭발했을 때 영혜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들은 죽을려고 그려나고 했지만 영혜에게는 그건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채식, 식물은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 영혜에게 채식만이 안정감을 주고 평화로움을 주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잊혀질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드러나지 않을 뿐 공포라는 감정은 아주 깊이 인이 배겨서 절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아무리 어른이 되어서 키가 커지고 힘이 세져도 그건 절대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한강은 그 공포를 알고 있는 듯 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는 그 공포를 한강은 정말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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