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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 - Knowin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는 노잉을 마치 스릴러나, 재난영화처럼 표현했다. 이런 영화에서 언제나 그렇듯 비밀이 많아 보이는 (창백한 피부의) 어린 소녀는 미래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도화지 가득 숫자를 써 나갔다. 그리고 아직 숫자를 다 쓰지 못한 상태로 종이를 빼앗겼다. 그 종이는 타임캡슐에 보관되어 50년이나 묻혀있었고, 50년후 케일럽이라는 소년이 빼곡하게 쓰여진 종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니콜라스 케이지)는 어느 날 그 숫자들이 50년간 있었던 큰 재난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까지다. 노잉을 소개할 때 대부분 여기까지만 소개한다. 물론 그 뒤를 말할 순 없다. 그건 스포일러가 될테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영화의 결말을 보고 분개하거나 허탈해했다. 어떤 방향이든 개운하다고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마지막은 흡사 유한 킴벌리 광고의 '우리 강산 푸르게,푸르게'식의 화면으로 전환되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두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우리에 대한 경고성 메세지였다. 영화는 결국 전인류(Everyone)의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멸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전 인류가 멸망하는 날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쳤고, 물건을 훔쳤고, 싸움을 했다. 그렇게 전 인류가 살기 위해 아둥바둥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인류의 멸망은 장엄했고,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았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재앙의 재현이었다. 또한 홍수로 인류가 말살된 그때의 다른 버전이었다. 결국 선택받은 사람들은 그때 노아의 방주안에 있었고, 현재의 선택받은 이들은 외계에서 온 듯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다. 그들은 외계인이라기보다는 케일럽의 말처럼 메신저(천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지구를 구하지 않아서 좋았다. 천체물리학자로 나오는 그가 태양열의 폭발까지 막아 지구를 구했다! 라는 결말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인류가 멸망하는 날짜를 알았지만 결국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이 많았고, 원인도 알았지만 해결책을 구할 수는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영웅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마지막에 천국을 재현한 듯한 장면보다 지구가 멸망하는 장면을 볼 때 더 깊은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나 또한 선택받지 못할 인간이라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길거리에서 고스란히 전 인류와 함께 멸종 당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어차피 선택받지 못할 것이라면 더 쾌락을 추구하며 살겠다! 라든가, 아니면 이제라도 선택받기 위해 노력하면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냐? 라고 말 한다면...내 생각엔 방법은 없다.
내가 선택받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알 수 없다. 그저 또 하루를 사는 것 뿐. 하지만 경각심. 이 세상이 영원할 것 처럼 살진 말라는 경고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는게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