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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아무리 길게 숨을 내쉬어도 가슴이 시원하지 않아.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거야.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 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 60p
채식주의자를 읽는 내내 목 덜미가 뻐근했다. 누군가 내 목을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덩달이 밖에서는 한번도 들리지 않았던 고양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려왔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떤 공포감이 조금씩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생애 한번쯤, 특히 어렸을 때 어떤 대상에 대해 심각한 공포를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것이 주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간절함을. 그건 생존 본능이다.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게 된 것은 어쩌면 아버지 때문이다. 그녀에게 손찌검을 했던 아버지, 평생을 고함치고 무력으로 가족을 다스리려 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폭력을 영혜는 몸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육식은 곧 폭력의 상징이었다. 그것이 폭발했을 때 영혜는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남들은 죽을려고 그려나고 했지만 영혜에게는 그건 살기위한 몸부림이었다. 채식, 식물은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 영혜에게 채식만이 안정감을 주고 평화로움을 주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를 경험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잊혀질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드러나지 않을 뿐 공포라는 감정은 아주 깊이 인이 배겨서 절대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아무리 어른이 되어서 키가 커지고 힘이 세져도 그건 절대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한강은 그 공포를 알고 있는 듯 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는 그 공포를 한강은 정말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