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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3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장경룡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장경룡 역, 문예출판사, 1999
"끝까지 읽게 만들어라.” 소설작법 책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기본명제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그것이 짧은 詩 일지라도, 어떤 뛰어난 글이라 할지라도, 독자 없는 글은 사멸한다. 혼자 읽는 비밀 일기 될지라도 내가 쓰고도 다시 읽지 않는다면, 단 한 명의 독자가 끝까지 읽고 중간 중간 읽고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글을 한 귀퉁이만이라도 기억한다면 좋은 글이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할 수도 없고 전문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책을 읽을 때마다 가끔 글을 쓸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말이다. “왜 끝까지 읽지 못할까?” 소설처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야 하는 책은 더욱이 독자가 끝까지 읽게 만들어야 한다.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 기법을 써서 독자의 호기심만 자극할 수도 있고, 너무나 독자와 비슷한 인물을 등장시켜 끝까지 읽게 만들 수도 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만족시키는 소설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것이다. 며칠 전 트윗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카프카의 팬의 많은데 왜 포크너의 팬은 없을까?’동화처럼 재미있는 ‘변신’은 많이 읽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음향과 분노’를 즐기는 독자는 드물다. 물론 글께나 쓴다는 작가들은 가끔 말하지만 대가들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일반 작가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대가라고 불리는 선생들은 자신의 작품과 비교되는 것이 두려워서일까. 카프카보다는 헤밍웨이와 포크너를 비교해보면 조금은 명확해진다. 동시대를 살았고 노벨문학상(힘 있는 나라들끼리 나누어 먹는 것 같지만)을 받은 두 작가의 문체는 상당히 다르다. 일상어와 단문을 주로 사용하는 헤밍웨이와 장문에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지 않으려 했던 포크너. 헤밍웨이의 소설은 국내에도 수없이 번역되었지만, 포크너의 소설은 당대 살았던 평론가들조차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이라고 악평을 했다고 한다. 문학사적 의미를 접어둔다면, 소수의 전문가들만 읽는 소설보다는 쉽게 읽히고 즐길 수 있는 소설이 더 좋은 것 아닌가.
[설국]은 [음향과 분노]와 [노인과 바다] 중간 정도에 서 있는 것 같다. “13년간 꾸준하고 끈질기게 깎고 다듬”은 것은 [노인과 바다]와 비교할 수 있고, “사건 소설이 아니라 심리 소설이요, 분위기 소설”이라고 하는 점은 [음향과 분노]를 닮았지만, “구미 각국에서 번역되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 10년 전부터 널리 소개”되었으니 번역하기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단편 소설을 엮어놓은 것이니 중간부터 읽어도 된다. 美文도 많지 않고 뚜렷한 사건의 흐름도 없지만, 미묘한 감정의 변화는 독자를 끌어당긴다.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의 나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볼이 예쁜 헬레네”처럼, “새빨간 볼”을 가진 코마코를 쉽게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묘하고 심오한 美文도 좋지만,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는 문장이 더 좋지 않은가.
소설은 쉬워야 한다. 쉽기만 할 뿐 형식적 완결성도 없고 필요 없는 단어와 문장으로 독자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은 소설도 나쁘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문장으로 채워진 소설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2012.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