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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록 ㅣ 범우문고 109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수필 서평 [무서록] 이태준, 범우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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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무서록(無書錄)은 ‘두서없이 쓴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말하는 수필에 해당하는 글이다. 이 책의 저자 상허 이태준은 해방 이후 월북해서 초기 북한 문학 형성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수필의 기점을 1947년 김진섭의 [인생예찬]과 이양하의 [이양하 수필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무서록은 1941년 초판이 출판되었다. 이념을 넘어서 문학적 가치로만 평가한다면, 수필이라는 이름 대신 무서록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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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 이태준은 1930년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고 불린 만큼 당대의 문장가였다. 이러한 이유로 상허를 소설가로서만 알고 있지만, [무서록]에서 보이는 간결하면서 아름다운 문체와 [문장강화]에서 보여주는 탁월한 문학적 식견은 우리문학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것에 동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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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상허를 생각하면 백석이 떠오른다. 백석 또한 월북 작가로 분류되어서 현대 문학사에서 소외되었던 인물이다. 어느 젊은 시인은, 백석의 시(詩)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읽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시인(詩人)들이 가장 좋아하는 10인의 시인에 뽑힐 만큼 그의 작품도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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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허는 이념에 따라 북으로 갔지만, 백석은 단순히 고향으로 갔다. 아이러니하게 상허는 1950년대 숙청당했고, 백석은 북한에서 꾸준히 창작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북한 체재를 찬양하는 글을 썼고, 그 글들이 한국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든 그들의 작품을 숨겨둘 필요는 없다.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활발한 재평가를 통해서 우리문학의 우수성을 다시 확인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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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나는 물을 보고 있다.
물은 아름답게 흘러간다.
흙 속에서 스며나와 흙 위에 흐르는 물, 그러나 흙물이 아니요 정한 유리그릇에 담긴 듯 진공 같은 물. 그런 물이 풀잎을 스치며 조각돌에 잔물결을 일으키며 푸른 하늘 아래 즐겁게 노래하며 흘러가고 있다.
물은 아름답다. 흐르는 모양, 흐르는 소리도 아름답거니와 생각하면 이의 맑은 덕, 남의 더러움을 씻어는 줄지언정. 남을 더럽힐 줄 모르는 어진 덕이 이에게 있는 것이다. 이를 대할 때 얼마나 마음을 맑힐 수 있고 이를 사괴일 때 얼마나 깨끗이 할 수 있는 것인가!
물은 보면 즐겁기도 하다. 이에겐 언제든지 커다란 즐거움이 있다. 여울을 만나 노래할 수 있는 것만 이의 즐거움이 아니다. 산과 산으로 가로막되 덤비는 일없이 고요한 그대로 고이고 고이어 나중날 넘쳐 흘러가는 그 유유무언(悠悠無言)의 낙관(樂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독에 퍼 넣으면 독 속에서, 땅 속 좁은 철관에 몰아놓으면 몰아넣는 그대로 능인자안(能忍自安)한다.
물은 성(聖)스럽다. 무심히 흐르되 어별(魚鼈)이 이의 품에 살고 논, 밭, 과수원이 이 무심한 이로 인해 윤택하다.
물의 덕을 힘입지 않는 생물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물, 기쁜 물, 고마운 물, 지자(智者) 노자(老子)는 일즉 상선약수(上善若水)라 하였다.
(본문 17쪽에서 18쪽) * 옛 문장 그대로 옮겼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