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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ㅣ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한병철의 신작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투명사회, 타자의 추방,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진단하고 그만의 언어로 표현해 왔다. 한병철의 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물의 소멸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철학은 급진 저널리즘이며 철학자는 저널리스트로서 가차 없이
"오늘"을 다뤄야 한다고 말한 푸코를 추종한다. '오늘을 사유로 파악하려고 애쓰며, 그 사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디지털화 시대, AI 시대, 포노 사피엔스 시대, 정보기계 시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게', '지금 여기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한병철은 그 실마리를 삶을 안정화하는 '사물'에서 찾는다.
정보 사냥꾼의 시대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9)"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에만 집중하면 은은하고 평범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극과 흥분에 중독된 정보 사냥꾼에게 그 자리에서, 은은하게, 살며시 빛나며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물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더 많은 흥분, 더 빠른 변화에 주목하면서 '사물과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고유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사라진 시대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쫓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 없는 삶꼴을 발전시킨다." (19)
한병철에게 '타자', '부정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실재)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타자'와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된 과잉긍정, 거대자기, 과도소비만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라는 지옥이 아니라 '같음의 지옥', '동일성의 지옥'에 빠져 점점 더 우울해 진다.
가까움은 떨어져 있음, 거리의 감각이 있어야 그 의미가 성립할 수 있다.
거리의 완전한 소멸(타자 부정, 부정성 배제)은 그 가까움의 의미를 철저히, 남김없이 파괴한다.
은은한 충심의 사물의 소멸
"오늘날의 소비재들은 은은하지 않다. 추근거리고 조잘거린다. 그것들은 미리 제작된 표상과 감정을 이미 너무 많이 담고 있다.
그 표상과 감정이 소비자에게 봇물 터지듯 밀려드다. 소비자 자신의 삶은 그것들 안에 거의 깃들지 못한다." (29)
"셀피 촬영은 소통 행위다. 따라서 셀피는 타인의 바라봄에 노출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한다. 셀피의 본질은 전시다." (55)
"셀피는 일차적으로 메시지이기 때문에 수다스런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셀피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세들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초상 사진은 대개 고요하다. 그 사진은 주목을 구걸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고요함이 아날로그 초상 사진에 표현력을 부여한다. 셀피는 요란하지만 표현이 빈곤하다. 과장된 표현 때문에 셀피는 가면처럼 느껴진다. 디지털 이미지의 소통이 인간의 얼굴을 침범함에 따라 여러 귀결이 바랭한다. 그 침범은 인간의 얼굴이 상품의 형태를 띠게 만든다." (57)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를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충심의, 은은한 사물이 소멸되고 모든 것이 정보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유와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실재)이 아니다.
충심의 사물을 소유할 수 없는 자, 은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자는 제대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만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도 일회용품처럼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고요히 눈을 감을 때만 발생하는 에로틱함
"환상이 없으면 포느로만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포르노의 특징들을 나타낸다. 지각은 단박 접촉으로서, 그야말로 이미지와 눈의 성기 결합으로서 이루어진다. 에로틱함은 눈을 감을 때 발생한다.
고요가, 환상이 비로소 주체에게 욕망의 깊은 내면 공간을 열어준다." (117)
스마트폰은 우리를 꿈꾸게 하거나 상상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사물이 아니다. 언제나 '사용'가능하고 원하면 '교체'할 수 있는 정보 기계다. 끊임없이 정보와 자극을 제공해서 고요를 파괴한다. 고요함 속에서 주체가 스스로 욕망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외부로 부터 주입된 욕망, 타인들의 욕망, 기업들의 욕망을 소비하도록 만든다.
다시 타자들에게로, 다시 충심의 사물에게로
한병철을 말한다. "디지털화 초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것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놀이 충동을 무자비하게 착취합니다." (155)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우리는 다시 타자들에게로 되돌려보내져야 해요."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