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생, 교사가 되다
박상완.박소영 지음 / 학이시습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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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생 요즘 교사의 이야기와 그들과 함께 일하는 기성세대 교사 이야기를 동시에 들을 수 있어서 흥미롭다. 이 책에서 인터뷰한 90년대생 교사의 특징은 꼭 ‘교사‘가 아니어도 90년대생, MZ세대의 특징이라고 볼 수도 있다. 90년대생을 이해하고 싶은 기성세대가 읽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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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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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신작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 아름다움의 구원, 투명사회, 타자의 추방, 폭력의 위상학 ... 한병철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진단하고 그만의 언어로 표현해 왔다. 한병철의 신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 사물의 소멸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그는 '철학은 급진 저널리즘이며 철학자는 저널리스트로서 가차 없이

"오늘"을 다뤄야 한다고 말한 푸코를 추종한다. '오늘을 사유로 파악하려고 애쓰며, 그 사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디지털화 시대, AI 시대, 포노 사피엔스 시대, 정보기계 시대

이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롭게', '지금 여기의 충만함'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한병철은 그 실마리를 삶을 안정화하는 '사물'에서 찾는다.

정보 사냥꾼의 시대

"정보 사냥꾼으로서 우리는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을,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을 못 보게 된다.

자극성이 없지만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는 것들을(9)"

즉각적인 자극과 흥분에만 집중하면 은은하고 평범한 것들의 가치를 알아 볼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극과 흥분에 중독된 정보 사냥꾼에게 그 자리에서, 은은하게, 살며시 빛나며 있는 듯 없는 듯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우리의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사물들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더 많은 흥분, 더 빠른 변화에 주목하면서 '사물과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고유한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사라진 시대

"오늘날 우리는 정보를 쫓아 질주하지만 앎에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두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차를 타고 온갖 곳으로 달려가지만, 단 하나의 경험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공동체에 속하지 못한다. 우리는 데이터를 저장하지만 기억을 되짚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와 팔로워를 쌓아가지만 타자와 마주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보는 존속과 지속이 없는 삶꼴을 발전시킨다." (19)

한병철에게 '타자', '부정성'은 매우 중요한 개념(실재)이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타자'와 '부정성'이 완전히 제거된 과잉긍정, 거대자기, 과도소비만 존재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라는 지옥이 아니라 '같음의 지옥', '동일성의 지옥'에 빠져 점점 더 우울해 진다.

가까움은 떨어져 있음, 거리의 감각이 있어야 그 의미가 성립할 수 있다.

거리의 완전한 소멸(타자 부정, 부정성 배제)은 그 가까움의 의미를 철저히, 남김없이 파괴한다.

은은한 충심의 사물의 소멸

"오늘날의 소비재들은 은은하지 않다. 추근거리고 조잘거린다. 그것들은 미리 제작된 표상과 감정을 이미 너무 많이 담고 있다.

그 표상과 감정이 소비자에게 봇물 터지듯 밀려드다. 소비자 자신의 삶은 그것들 안에 거의 깃들지 못한다." (29)

"셀피 촬영은 소통 행위다. 따라서 셀피는 타인의 바라봄에 노출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한다. 셀피의 본질은 전시다." (55)

"셀피는 일차적으로 메시지이기 때문에 수다스런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셀피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극단적인 자세들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초상 사진은 대개 고요하다. 그 사진은 주목을 구걸하지 않는다. 바로 이 고요함이 아날로그 초상 사진에 표현력을 부여한다. 셀피는 요란하지만 표현이 빈곤하다. 과장된 표현 때문에 셀피는 가면처럼 느껴진다. 디지털 이미지의 소통이 인간의 얼굴을 침범함에 따라 여러 귀결이 바랭한다. 그 침범은 인간의 얼굴이 상품의 형태를 띠게 만든다." (57)

에리히 프롬은 '소유나 존재냐'를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충심의, 은은한 사물이 소멸되고 모든 것이 정보기계로 대체되고 있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유와 존재는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는 개념(실재)이 아니다.

충심의 사물을 소유할 수 없는 자, 은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자는 제대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쓰고 버리는 일회용품만 가득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도 일회용품처럼 쉽게 소비될 수밖에 없다.

고요히 눈을 감을 때만 발생하는 에로틱함

"환상이 없으면 포느로만 존재한다. 오늘날에는 지각 자체도 포르노의 특징들을 나타낸다. 지각은 단박 접촉으로서, 그야말로 이미지와 눈의 성기 결합으로서 이루어진다. 에로틱함은 눈을 감을 때 발생한다.

고요가, 환상이 비로소 주체에게 욕망의 깊은 내면 공간을 열어준다." (117)

스마트폰은 우리를 꿈꾸게 하거나 상상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사물이 아니다. 언제나 '사용'가능하고 원하면 '교체'할 수 있는 정보 기계다. 끊임없이 정보와 자극을 제공해서 고요를 파괴한다. 고요함 속에서 주체가 스스로 욕망을 응시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든다. 외부로 부터 주입된 욕망, 타인들의 욕망, 기업들의 욕망을 소비하도록 만든다.

다시 타자들에게로, 다시 충심의 사물에게로

한병철을 말한다. "디지털화 초기에 사람들은 노동을 놀이로 대체하는 것을 꿈꿨지요. 하지만 현실에서 디지털 자본주의는 인간의 놀이 충동을 무자비하게 착취합니다." (155)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우리는 다시 타자들에게로 되돌려보내져야 해요."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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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상담실 - 정신과 전문의 반유화가 들려주는 나를 돌보는 법
반유화 지음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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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보면 자연스럽게 제목이 왜 '언니'의 상담실인지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정신과 전문의로서 의학적인 진단과 처방을 해 주는 게 아니라 친한 언니처럼 조곤조곤 마음을 읽고 부드럽게 응원해 준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되면 거의 모든 고민은 해결될 줄 알았다. 탄탄하게 경력도 쌓고 인정받으면서 '멋진 어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아이도 어른도 아닌 '어른이'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지만 어른이 되는 방법을 몰라서 방황하는 어른이. 남의 마음을 알아 주기는커녕 내 마음 하나도 재대로 모르고 다독이지 못하는 유치하고 치졸한 어른이다. 반유화 선생님(언니)의 편지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닦고 피식 웃기도 했다.

무기력, 착한 아이 콤플렉스, 우울, 미루기, 엄마와의 관계, 결혼, 시기심, 차별, 슬픔... 딱 내 고민과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겹쳤다. 반유화 선생님이 은서씨, 재인씨, 정연씨, 하나씨...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면서 해결책이 아니라 다정한 응원을 건넬 때 꼭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 같았다. 주저 앉아 울고 싶지만 누가 보지 않아도 괜히 부끄러워서 마음껏 울지도 못하는 나에게 괜찮다고, 스스로를 챙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틀린 감정은 없다고, 지금도 잘 하고 있다고 등을 토닥여 주는 느낌이 받았다.

이 책을 읽는 시간 동안 차갑고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은 따듯하고 밝아졌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아도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속 시원하게 털어 놓을 수 없어서, 나만 이런 고민을 아직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한 번에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어도 차근차근, 나를 돌보면서! 나와 잘 지내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조금씩 나만의 방법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타인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공감하고, 맞추는 능력은 사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엄청나게 귀한 역량이에요. 그 기술을 안으로 돌려 나라는 타인에게 발휘하기를 바랍니다." - P57

‘왜‘ 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봅시다. 앞으로 스스로에게 접근할 때 ‘나는 왜 이렇지?‘라는 ‘왜‘에서 주의를 돌려 최대한 ‘어떻게 하지?‘, 즉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어주세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질 때 가능한 한 ‘됐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지금 이 상태보다 더 괜찮아질 수 있지?‘라고 물었으면 합니다.

감정을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주세요. 과업을 앞두고 부정적인 감정을 조절하는 첫걸음은 ‘지금 나에게 버겁고 힘든 감정이 든다는 사실을 알아주는 것‘임을 꼭 기억해주세요. 그러면서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서 전개해보세요. 그 두려움을 하나씩 추적하면서 열어보는 과정은 오히려 압도감을 줄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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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소개 문구는 "마음이 곰팡곰팡한 이들에게 보내는 따사로운 햇볕과 같은 공감과 위로"다. 나는 곰팡곰팡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푸르스름하고 축축하고 냄새나는 곰팡이가 핀 마음이라니, 그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그 마음에 한 번 '닿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심한 우울 장애와 공황 장애를 겪었다.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우울과 공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우울도 공황도 겪진 않았지만 저자처럼 '애정결핍 확진자'다.

그리고 미움 받을 용기도 사랑 받기를 포기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저자의 고백이 때떄로 '느끼하고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끝까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끝까지 읽게 하는 힘이 이 책에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걱정 중 대부분은 쓸데없는 것이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걱정이 있다.

바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26

나는 수많은 사람을 이유도 없이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왜 나는 미움받는 걸 그토록 두려워할까. 왜 늘 타인의 애정과 사랑을 갈구할까. 저자도 나와 같은 불안에 시달렸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저자는 "외로움은 우리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경고(153)"라고 말한다.그런데 "우리는 외로움이란 경보를 빨리 끄기 위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인스턴트 관심을 갈구"했다고도 한다. 인스턴트 관심은 우리를 아주 잠시 외롭지 않다는 착각에 휩싸이게 한다. 하지만 곧 우리를 더 배고프게 하고, 더 외롭게 만들 뿐이다. 손쉽게, 어디서나, 값싸게 살 수 있지만 건강하지도 맛있지도 않은 인스턴트 음식 같은 관심이 아니라 내 입맛에 꼭 맞는, 건강에 좋은, 나만을 위한 마음이 담긴 정성스러운 집밥 같은 관심을 찾고 서로에게 선물하자.

그리고 잘 헤어지기 위해 미리 준비하고 충분히 대화하자.

저자는 아픈 엄마께 말한다. "나는 엄마랑 살아서 기뻤어. (166)"

엄마랑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지만,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 하자.

함께라서, 서로 손을 맞잡을 수 있고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어서

정말로 기쁘다고. 나중이 아니라 지금.

저자의 옆엔 사랑스러운 순이(배우자)가 있다. 그는 "결혼이란 어쩌면 사랑의 다른 형태를 체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다른 형태가 모여 우리의 사랑은 더욱 완벽해질 것" (212) 이라고 말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 나의 방황을 지켜보면서도 묵묵히 응원해 주는 단 한 사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곰팡곰팡한 내 마음이 뽀송뽀송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줄기 햇살이 내 마음에 비췄다.

그 온기로 또 오늘 하루를 잘 살아보려고 한다.

※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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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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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은 눈이 아니라 '감겨진' 눈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여성들'의 눈은 감겨져야 했을까?

여성들의 눈을 (강제로) 가려버린 건 누구일까? 그들은 무엇을 원하나?

이 책에는 7가지 색다른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1. 작가도, 주인공(서사의 중심 주체)도 여성이다!

2.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성 불평등 구조'를 다룬다

3. 매혹적(몰입도가 높고 술술 읽힘)이다

황금 비파 (정도경)

이웃 노파가 눈을 부라리며 여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물귀신아! 도로 물속으로 썩 꺼져! 다시는 오지 마! 귀신 같은 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아직 버려지지 않은 여자들이 앞으로도 버려지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애써야만 했다.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그녀들을 탓할 수 없었다. 여자는 황금 비파를 손에 들고 울면서 돌아서서 마을을 떠났다.

40-41

"여자의 적은 여자다.", a.k.a 여.적.여.

도대체 이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절대로.

남자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여자들이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건

그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자멸적 행위를 멈추고

여.적.여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퍼뜨리는 남자들의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눠야 할 때가 왔다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전염병이 돌아도 ... 그 모든 나쁜 일의 원인을 '힘 없는 약자, 특히 여성'에게 돌려버리는 건 터무니없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발생해온 일이며 지금도 그런 일은 계속되고 있다. 비파를 연주해서 사람들을 위로해줬던 가련한 여인, 죽을 고비를 넘겨도 돌아갈 곳이 없는 여인.

이 이야기는 여자들을 위한 세상은 존재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망선요 (김인정)

"엄마"

"너 어딜 보면서 말하니? 애가 종일 넋을 빼 놓고."

"엄마, 기억나? 그때."

"잠에서 깨서 엄마가 나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던 거. 꼭 여기 있으면 안 될 애가 여기 있다는 듯이. 내가 없는 세상이 엄마 낙원인 듯이. 꿈꾼 듯이. 엄마가 놀라며 내 손에서 칼을 뺏고 뺨을 때렸던 거 기억나? 왜 얌전히 있으랬는데 엄마 말을 안 듣느냐면서, 누가 맘대로 기어 나와서 칼 만지랬냐면서, 날 막 때리고 울었잖아."

...

엄마가 화장실에 나를 집어 던진 그날, 만약에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뭘 봤을까? 왜, 엄마? 왜 그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사실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서. 응? 엄마."

66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였을까?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어서 낯설고 무섭고 힘들었을텐데

딸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정말로 너무 어리고 작고 약했다

엄마의 산후 우울증은 딸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탓도, 딸의 탓도 아니다

피해자는 둘 이지만, 가해자는 없다

아니, 가해자는 어쩌면 여성에게, 엄마에게 모성 본능을 강요하고

독박 육아를 당연한 듯 요구하는 이 가부장제 사회다

아마존 몰리 (이산화)

아마존 몰리의 알이 수정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자가 주는 자극 뿐이다. 자극만 있으면 난자는 알아서 수정란이 된다. 정자가 소중하게 담고 있는 유전물질은 물론 버려진다. 그러니 아마존 물리의 번식 과정에서 수컷은 단지 자극을 위해 이용당할 뿐이다.

생물학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은 오롯이 암컷만의 것이 된다.

인간도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쓸 수만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뀌지 않을까.

94-95

아마존 물리의 번식 과정에서 수컷은 단지 '자극'을 위해 이용당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재생산(번식) 과정에서는 누가 '수단'으로 이용될까?

'임신 중절 논의'를 (여성의) 선택권과 생명권의 대립으로 프레임화 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깊이 고민해보게 해주는 이야기다.

 

폐선로의 명숙 씨 (양원영)

울다 지쳐 잠들었다 새벽에 깨었을 때에 엄마가 내 머리 맡에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표정이 엄마가 아닌 명숙 씨의 표정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미워요?

내가 물었다. 명숙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 씨는 이십 대 그 나이에 한번 죽고, 잊힌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버렸다.

너 때문에 내가 돌아갈 수가 없었어.

고운 서울 말씨를 쓰는 명숙씨. 기억이 돌이켜졌다.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창밖으로 밀려고 했다.

나를... 버리려고 했다. 내가, 엄마의 발목을 깨문 뱀이었다.

너 누구니?

명숙 씨가 물었다. 밤공기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엄마 딸, 강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32-133)

엄마, 기억하나?

뭘.

비둘기호 탔을 때, 엄마가 나한테 한 일.

부러 엄마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강아, 내가 그거 꼭 기억해야 하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그때의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껏 잊고 살았다. 엄마 곁에 있고자 함은 엄마를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엄마여서. 우리 엄마라서.

엄마로 남아 주기를 바라서. 어떻게든 엄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잊어버린 주제에 엄마를 향한 갈망만은 이토록 선연하게 남았다. 그런 주제에 엄마를 팔 년간이나 버려 두고, 이제 와서 엄마가 아니게 된다고 무서워한다.

137

철수 엄마, 영희 엄마, 강이 엄마...!!!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이름을 잃어버린다. 더 적확히 말하면 박탈당한다

'명숙씨'는 '명숙'이라는 이름 대신 엄마가 된다.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엄마로 남아야 할 것처럼.

'강아, 내가 그거 꼭 기억해야 하니?

엄마도 엄마의 '이름'을, '인생'을 되찾고 싶겠지.

엄마의 인생을 되찾으면 엄마는 더이상 우리 엄마가 아닌 게 되는 걸까?

나도 두렵다. 솔직히. 내가 엄마의 이름을,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엄마가 그만 놔달라고 하면 나는 엄마, 아니 명숙씨를 위해 놔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사형 집행인 바르길리아의 하루 (유월)

"그렇게 말할 줄로 알았습니다."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바르길리아를 향해 체념 섞인 말을 던진다.

"재판정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시는지요."

"거야, 부인과 재판관들, 참관인, 여럿에 사제 몇 명하고, 증인, 그러니까 백작의 동생 되는 분 아닌지."

"그렇죠. 죄인인 나를 빼면 모두 아내를 둔 남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못난 부인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닙니다."

"그래도, 말은 해볼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외람되지만, 어차피 사형이 결정된 마당에 변론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지."

153

"그들은 모두 부인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게 가능할까?

남편이 자신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아내를 때린다면 우리나라 법은 어떤 처벌을 내릴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바르길리아는 백작 부인이 아니라 백작 부인과 아이들을 무참히 폭행한 남편의 목을 잘라야 하지 않았을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아이러니.

 

애귀 (김이삭)

더러워. 애까지 낳은 게. 그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네 귓속에서, 네 머릿속에서, 네 마음 속에서. 정말 그게 문제였던 걸까. 그가 네 집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고 했다. 너를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월세가 아깝다 했다, 너는 그를 사랑했고 결국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네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 네 집도 네 노동도. 네 방에서 잠을 자고 네가 차린 밥을 먹였다. 가끔은 반찬 투정도 했다. 너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그의 종도 아니었다. 생활비라도 내라는 네 말에 굳은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을 너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186-187

'더러워.'

뭐가 진짜로 더러운 걸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남의 집에 기생하는 사람, 그러면서 반찬 투정하고 고마운 줄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더러운 걸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음식을 하는 그 사람이 더러운 걸까?

사람이 사람에게 '더럽다'고 하는 현실,

그것도 그럴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떳떳하게 하는 사회,

그 사회, 그 현실이 정말 구역질나도록 더럽다.

감겨진 눈 아래에 (전혜진)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격체라고 말하면 페미니스트냐고 빈정거리며, 그녀들을 멸시할 수 있는 온갖 낯설고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내던, '평범한' 젊은 남자들.

바로 그들이 그 정책을 지지했다. 그저 자신들의 아주 작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층의 큰 기득권에 기생하면서.

225-226

'평범한'남자들이 자신들의 아주, 아주, 아주 작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더 큰 불의, 인간의 기본권을 무참히 짓밟는 권력을 용인하고 재생산한다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다. 더이상 그 남자들은 평범하지 않다. 무지하고 무자비하다.

요즘이야 칠 개월이면 플라코스에서 아기를 꺼내겠지만, 사람이 직접 아이를 임신하던 시절에는 구 개월이 지나야 아이를 낳았으니, 말하자면 임신 후기였을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그때 나오는 정책이라는 게 정말 여자를 사람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것들이었어. 하지만 그때 나온 이야기는 정말로 참을 수 없었지."

236

만약, 이 이야기 속 사회 처럼 인공 출산, 체외 출산이 실현된다면 여자를 '걸어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일'이 사라질까? 안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끔찍하다.

하지만 재경은,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자신의 인생이 망가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이블 다물고 어픋린 채 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동등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곳의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그런 여자애들에게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권이 있다는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속이 상했다. 약자가 반드시 선(善)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고 들었으면서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괜찮아. 세실."

재경은 내 옆에 나란히 누운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여긴 꽉 닫힌 상자 속이잖아. 쟤들이 나쁜 게 아냐. 너나 나도 평생 이 닫힌 상자 속에 갇힌 채로 나라에서 보여 주는 것만 보고 살았으면,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지도 몰라."

302

꽉 닫힌 상자 속에서 그만 나가고 싶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갇혀 있는 혹은 스스로를 가둔 상자 속으로 빛이 비쳐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빛이지만 내가 답답하고 좁은 상자 속에 들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한 빛이다. 자신이 상자 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알면서도 그 상자속에 계속 머무려고 애쓰는 것도, 더이상 용서받을 수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다.

나가야 한다.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 떳떳하게, 아주 잘, 아주 행복하게.

내 발 아래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만큼, 찬란하게 밝은 하늘 아래에서

348-349

나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고 싶다.

행복하고 떳떳하고 밝게. 자신없지만 노력해보려고 한다.


7가지 이야기가 각기 다른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야기 속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마음도 너덜너덜해지지만!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바꿀 껀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힘도 생긴다.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서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좋을 거 같다.

(읽어봤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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