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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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은 눈이 아니라 '감겨진' 눈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여성들'의 눈은 감겨져야 했을까?

여성들의 눈을 (강제로) 가려버린 건 누구일까? 그들은 무엇을 원하나?

이 책에는 7가지 색다른 이야기가 담겨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세 가지다

1. 작가도, 주인공(서사의 중심 주체)도 여성이다!

2.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성 불평등 구조'를 다룬다

3. 매혹적(몰입도가 높고 술술 읽힘)이다

황금 비파 (정도경)

이웃 노파가 눈을 부라리며 여자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 물귀신아! 도로 물속으로 썩 꺼져! 다시는 오지 마! 귀신 같은 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상에서 아직 버려지지 않은 여자들이 앞으로도 버려지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애써야만 했다. 여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는 그녀들을 탓할 수 없었다. 여자는 황금 비파를 손에 들고 울면서 돌아서서 마을을 떠났다.

40-41

"여자의 적은 여자다.", a.k.a 여.적.여.

도대체 이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절대로.

남자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여자들이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건

그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자멸적 행위를 멈추고

여.적.여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퍼뜨리는 남자들의 세상을 향해 칼을 겨눠야 할 때가 왔다

홍수가 나도, 가뭄이 들어도, 전염병이 돌아도 ... 그 모든 나쁜 일의 원인을 '힘 없는 약자, 특히 여성'에게 돌려버리는 건 터무니없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발생해온 일이며 지금도 그런 일은 계속되고 있다. 비파를 연주해서 사람들을 위로해줬던 가련한 여인, 죽을 고비를 넘겨도 돌아갈 곳이 없는 여인.

이 이야기는 여자들을 위한 세상은 존재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려는

자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망선요 (김인정)

"엄마"

"너 어딜 보면서 말하니? 애가 종일 넋을 빼 놓고."

"엄마, 기억나? 그때."

"잠에서 깨서 엄마가 나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던 거. 꼭 여기 있으면 안 될 애가 여기 있다는 듯이. 내가 없는 세상이 엄마 낙원인 듯이. 꿈꾼 듯이. 엄마가 놀라며 내 손에서 칼을 뺏고 뺨을 때렸던 거 기억나? 왜 얌전히 있으랬는데 엄마 말을 안 듣느냐면서, 누가 맘대로 기어 나와서 칼 만지랬냐면서, 날 막 때리고 울었잖아."

...

엄마가 화장실에 나를 집어 던진 그날, 만약에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면 나는 뭘 봤을까? 왜, 엄마? 왜 그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사실은,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서. 응? 엄마."

66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였을까?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어서 낯설고 무섭고 힘들었을텐데

딸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엔 너무, 정말로 너무 어리고 작고 약했다

엄마의 산후 우울증은 딸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그건 엄마의 탓도, 딸의 탓도 아니다

피해자는 둘 이지만, 가해자는 없다

아니, 가해자는 어쩌면 여성에게, 엄마에게 모성 본능을 강요하고

독박 육아를 당연한 듯 요구하는 이 가부장제 사회다

아마존 몰리 (이산화)

아마존 몰리의 알이 수정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자가 주는 자극 뿐이다. 자극만 있으면 난자는 알아서 수정란이 된다. 정자가 소중하게 담고 있는 유전물질은 물론 버려진다. 그러니 아마존 물리의 번식 과정에서 수컷은 단지 자극을 위해 이용당할 뿐이다.

생물학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은 오롯이 암컷만의 것이 된다.

인간도 이런 치사한 방법을 쓸 수만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뀌지 않을까.

94-95

아마존 물리의 번식 과정에서 수컷은 단지 '자극'을 위해 이용당할 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재생산(번식) 과정에서는 누가 '수단'으로 이용될까?

'임신 중절 논의'를 (여성의) 선택권과 생명권의 대립으로 프레임화 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깊이 고민해보게 해주는 이야기다.

 

폐선로의 명숙 씨 (양원영)

울다 지쳐 잠들었다 새벽에 깨었을 때에 엄마가 내 머리 맡에 있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엄마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 표정이 엄마가 아닌 명숙 씨의 표정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내가 미워요?

내가 물었다. 명숙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숙 씨는 이십 대 그 나이에 한번 죽고, 잊힌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버렸다.

너 때문에 내가 돌아갈 수가 없었어.

고운 서울 말씨를 쓰는 명숙씨. 기억이 돌이켜졌다. 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를 창밖으로 밀려고 했다.

나를... 버리려고 했다. 내가, 엄마의 발목을 깨문 뱀이었다.

너 누구니?

명숙 씨가 물었다. 밤공기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엄마 딸, 강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132-133)

엄마, 기억하나?

뭘.

비둘기호 탔을 때, 엄마가 나한테 한 일.

부러 엄마의 얼굴을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강아, 내가 그거 꼭 기억해야 하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그때의 일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껏 잊고 살았다. 엄마 곁에 있고자 함은 엄마를 붙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엄마여서. 우리 엄마라서.

엄마로 남아 주기를 바라서. 어떻게든 엄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잊어버린 주제에 엄마를 향한 갈망만은 이토록 선연하게 남았다. 그런 주제에 엄마를 팔 년간이나 버려 두고, 이제 와서 엄마가 아니게 된다고 무서워한다.

137

철수 엄마, 영희 엄마, 강이 엄마...!!!

엄마는 누군가의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이름을 잃어버린다. 더 적확히 말하면 박탈당한다

'명숙씨'는 '명숙'이라는 이름 대신 엄마가 된다.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엄마로 남아야 할 것처럼.

'강아, 내가 그거 꼭 기억해야 하니?

엄마도 엄마의 '이름'을, '인생'을 되찾고 싶겠지.

엄마의 인생을 되찾으면 엄마는 더이상 우리 엄마가 아닌 게 되는 걸까?

나도 두렵다. 솔직히. 내가 엄마의 이름을, 인생을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엄마가 그만 놔달라고 하면 나는 엄마, 아니 명숙씨를 위해 놔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사형 집행인 바르길리아의 하루 (유월)

"그렇게 말할 줄로 알았습니다."

부인은 한숨을 내쉬고 바르길리아를 향해 체념 섞인 말을 던진다.

"재판정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하시는지요."

"거야, 부인과 재판관들, 참관인, 여럿에 사제 몇 명하고, 증인, 그러니까 백작의 동생 되는 분 아닌지."

"그렇죠. 죄인인 나를 빼면 모두 아내를 둔 남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못난 부인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닙니다."

"그래도, 말은 해볼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외람되지만, 어차피 사형이 결정된 마당에 변론 정도는 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지."

153

"그들은 모두 부인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남편이지,

남편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얻어맞는 아내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을 '정당한' 이유로 때리는 게 가능할까?

남편이 자신의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아내를 때린다면 우리나라 법은 어떤 처벌을 내릴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바르길리아는 백작 부인이 아니라 백작 부인과 아이들을 무참히 폭행한 남편의 목을 잘라야 하지 않았을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아이러니.

 

애귀 (김이삭)

더러워. 애까지 낳은 게. 그의 말이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네 귓속에서, 네 머릿속에서, 네 마음 속에서. 정말 그게 문제였던 걸까. 그가 네 집으로 이사를 오고 싶다고 했다. 너를 사랑해서, 함께 있고 싶어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월세가 아깝다 했다, 너는 그를 사랑했고 결국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네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다. 네 집도 네 노동도. 네 방에서 잠을 자고 네가 차린 밥을 먹였다. 가끔은 반찬 투정도 했다. 너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었고, 그의 종도 아니었다. 생활비라도 내라는 네 말에 굳은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을 너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

186-187

'더러워.'

뭐가 진짜로 더러운 걸까?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남의 집에 기생하는 사람, 그러면서 반찬 투정하고 고마운 줄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더러운 걸까?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고 음식을 하는 그 사람이 더러운 걸까?

사람이 사람에게 '더럽다'고 하는 현실,

그것도 그럴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이 그런 말을 떳떳하게 하는 사회,

그 사회, 그 현실이 정말 구역질나도록 더럽다.

감겨진 눈 아래에 (전혜진)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인격체라고 말하면 페미니스트냐고 빈정거리며, 그녀들을 멸시할 수 있는 온갖 낯설고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내던, '평범한' 젊은 남자들.

바로 그들이 그 정책을 지지했다. 그저 자신들의 아주 작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지배층의 큰 기득권에 기생하면서.

225-226

'평범한'남자들이 자신들의 아주, 아주, 아주 작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더 큰 불의, 인간의 기본권을 무참히 짓밟는 권력을 용인하고 재생산한다면

그건 정당화될 수 없다. 더이상 그 남자들은 평범하지 않다. 무지하고 무자비하다.

요즘이야 칠 개월이면 플라코스에서 아기를 꺼내겠지만, 사람이 직접 아이를 임신하던 시절에는 구 개월이 지나야 아이를 낳았으니, 말하자면 임신 후기였을 것이다."그렇지 않아도 그때 나오는 정책이라는 게 정말 여자를 사람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것들이었어. 하지만 그때 나온 이야기는 정말로 참을 수 없었지."

236

만약, 이 이야기 속 사회 처럼 인공 출산, 체외 출산이 실현된다면 여자를 '걸어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일'이 사라질까? 안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끔찍하다.

하지만 재경은, 전단을 만들어 뿌렸다. 자신의 인생이 망가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언제까지나 이블 다물고 어픋린 채 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자들이 동등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곳의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그런 여자애들에게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권이 있다는 것을 믿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속이 상했다. 약자가 반드시 선(善)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우고 들었으면서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괜찮아. 세실."

재경은 내 옆에 나란히 누운 채, 울상을 짓고 있는 나를 오히려 위로했다.

"여긴 꽉 닫힌 상자 속이잖아. 쟤들이 나쁜 게 아냐. 너나 나도 평생 이 닫힌 상자 속에 갇힌 채로 나라에서 보여 주는 것만 보고 살았으면, 비슷한 감정을 가졌을지도 몰라."

302

꽉 닫힌 상자 속에서 그만 나가고 싶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갇혀 있는 혹은 스스로를 가둔 상자 속으로 빛이 비쳐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빛이지만 내가 답답하고 좁은 상자 속에 들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엔 충분한 빛이다. 자신이 상자 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알면서도 그 상자속에 계속 머무려고 애쓰는 것도, 더이상 용서받을 수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도 없다.

나가야 한다.

나는 살아가기로 했다. 떳떳하게, 아주 잘, 아주 행복하게.

내 발 아래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만큼, 찬란하게 밝은 하늘 아래에서

348-349

나도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고 싶다.

행복하고 떳떳하고 밝게. 자신없지만 노력해보려고 한다.


7가지 이야기가 각기 다른 매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이야기 속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온 몸의 힘이 빠지고, 마음도 너덜너덜해지지만!

동시에 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바꿀 껀 바꿔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힘도 생긴다.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서사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좋을 거 같다.

(읽어봤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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