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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 - 99가지 강박으로 보는 인간 내면의 풍경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민수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평점 :
공포와 광기에 관한 재밌는 '사전'
사전이 재밌을 수 있을까? 그렇다. 이 책은 정말로 재밌지만 진짜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이다.
고소공포증, 광장공포증, 뱀공포증 등 익숙하게 알려진 공포증도 다루지만 단추공포증, 긴단어공포증, 소리공포증, 휴대전화부재공포증 등 이색적인 공포증도 다룬다. 이 사전에 등장하는 공포증이 진짜로 존재하는, 의학 또는 과학으로 입증가능한 공포증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사전에는 얼마든지 새로운 공포와 광기가 추가될 수 있다. 그런 공포와 광기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발명된, 조장된 '현대적' 공포증?
제약 회사가 약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공포증'을 만들고 부추긴다? 얼핏 음모론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이런 지적은 꽤 흥미롭고 설득력 있다. 예를 들어, 광장공포증의 생리학적 측면만 강조하면 사회, 문화, 역사적 요인을 간과하게 된다고 인류학자 캐스린 밀런은 지적한다(113). 또 크리스토퍼 레인은 의사들이 개인의 성격을 병으로 둔갑시켜 내성적이거나 혼자 있길 좋아할 뿐인 사람들을 '환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남다른 기질과 별난 행동, 일상의 감정을 타당한 이유 없이 의학적 문제로 다루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125).
공포증에도 유행이 있다?
공포나 광기는 개인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라 '집단 내에서 유행'하기도 한다. 즉, 공포나 광기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유행하는 공포증이나 광기를 통해 그 시대의 흐름을 파악해 낼 수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사전에서 다루는 공포증 중 가장 인상적인 건 '소리공포증'이다. 내가 평소에 느끼는 공포, 스테르스를 '소리공포증'이라는 적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특정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공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니! 괜히 마음이 놓인다.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마실 때 나는 후루룩 소리, 음식 씹는 소리, 코 훌쩍이는 소리, 바삭바삭한 포장지 소리를 들으면 극심한 공포와 더불어 분노를 느낀다(288). 그렇다. 나도 공포와 분노, 짜증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공포보다 오히려 분노나 짜증을 느끼는 게 더 낯설었다. 그런데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있다니!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사전에 실리다니! 소리공포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를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위안을 받았다. 공포증에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나름 위안이 되고 일정 부분 그 공포증을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하철냄새공포증, 시계소리공포증, 꽃공포증, 층간소음공포증 ...
내가 공포와 광기에 관한 사전을 만든다면 지하철냄새, 시계소리, 꽃(절화), 층간소음, 거울, 킬힐 공포증을 추가하고 싶다. 말도 안 된다고? 무슨 그런 공포증이 있냐고? 맞다.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내 사전엔 포함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공포를 실제로 느끼니까. 또 나와 같은 공포증을 가진 자가 어딘가 있을 테니까.
자기 자신의 공포증을 다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또 시시각각 새로운 공포나 광기가 생긴다.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무엇보다 재밌다! 이 사전(책)을 통해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공포증이나 광기를 발견할 수도 있고 이 사전에 나오지 않는 공포증을 새롭게 추가해 볼 수도 있다. 이 사전은 절대 완성될 수 없다. 새로운 공포와 광기가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