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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내가 있었다
(사)일하는여성아카데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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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는 것. 

일상에 치여 매일을 어찌 보내는지 가늠하지 못하는 세월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기회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만큼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며 글을 쓸 수 있을까. 

타인의 이야기를 세심히 듣고 글을 쓰거나,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깊이 살피며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그런 글쓰기 중 한 가지가 책으로 엮여져 나왔을 때 그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그 곳에 내가 있었다> 는 한때 노동운동을 했거나 여전히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글쓰기 모임에서 썼던 글들 중 아마도 각자가 선별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자신의 노동운동사를 기억나는 대로 적은 글도 있고, 어떻게 하다가 노동운동에 발을 내딛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글도 있고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에 비중을 둔 이야기들도 있다. 

개인의 경험이어서 사소하달 수도 있지만 그들이 지나온 어느 시기가 평범하고 소소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채 바꿀만큼 역사의 소용돌이와 맞물려서 개인사이지만 평범하지만은 않은 경험들이 담뿍 담겨 있는 글들이 많다. 노동, 역사, 세상의 흐름 등에 마음을 두어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주로 강물에 비유하는가 싶은 글들 역시 여러 편 눈에 띄었다. 

어느 한 시기에,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떠밀리듯 어느 자리에 이르러 그 자리를 내내 지키며 살아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체로 그런 시기를 지나온 사람들이 썼고, 그래서 그들만의 공통점이 묻어나는 글들이 많다. 

한편으로는 그래서, 너무 큰 얘기에 묻혀버린 그때 그 시절 당신의 마음은 어땠는가, 다시 묻고 싶어지는 글들도 여러 편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고 그때 어떤 일을 겪었고만 건조하게 적힌 글들 속에서 그래서 그 사건들 속에서 당신이 추구했던 그 큰 마음들 속에 분명 두렵고 아프고 왜소했을 당신 마음은 어땠을까 궁금해지는 글들. 

책에 실리지 않은, 아마도 더 많이 써냈을 그들의 글 속에 그런 이야기도 담겨 있을 테지, 내가 읽지 않아서, 내 눈에 띄지 않아서 그런 과정이 없었을 거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니. 치유 글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쓴 글들이어서 어쩌면 더 깊고 내밀한 마음이 드러난 글들은 굳이 더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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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
주디스 베넷 지음, 신성림 옮김 / 이프북스(IFBOOKS)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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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SEX SIGN>이란 제목으로 읽었던 책이 작년에 다른 표지디자인으로 다시 발행된 것을 알았다. 내용이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사보지는 않았다가 다시 읽어볼 기회가 생겼다.  각 별 자리 앞부분에 위치해 있던 체크리스트가 카드 형태로 나와 따로 살펴볼 수 있게 된 점이 달라졌고, 체크리스트를 통해서 내 별자리를 짐작해보고 그 기준으로 찾은 그 별자리 사람들이 보이는 특성을 읽어보는 재미가 여전했다. 


사람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도구는 세상에 아주 많이 나와있다. 흔하게는, 과학적인 근거라고는 1도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 많이 회자되는 혈액형 성격론부터, 객관적인 검사를 토대로 도출한 것이라고 얘기되는가 하면, 어차피 주관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치를 내는 것이라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MBTI, 9가지 유형을 토대로 하여 점덤 더 설명의 내용이 늘어나고 있는 애니어그램 등을 활용해서 이 사람은 이러하다 저 사람은 저러하다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사주나 타로로도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당연 별자리를 기준으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여성을 위한 별자리 심리학>은 12개의 별자리 각각에 대해 그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을 여러 측면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점성학이나 사주의 설명 원리가 나름 논리적이라 생각하지만 논리적인 것이 곧 과학적 사실은 아니기 때문에 재미를 느끼는 데 비해 저런 기준으로 나온 사람에 대한 설명을 신뢰하지는 않는 편이다. 


하지만 여러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여다볼 구석이 있다고 여기며, 특히 오랫동안 다양한 사람을, 나름의 학문적 기준을 가지고 만나온 이가 자신의 또다른 지식을 엮어서 설명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같이 돌아볼 기회는 되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고 살펴보곤 하는 편이다. 


저자인 주디스 베넷은 사람이 단순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토대로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업인 심리치료사이고 점성학과 사람의 특성을 연결하여 풍부한 언어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을 위한 심리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여성혐오가 만연한 세상에서 마음을 다독거려줄 언어가 필요한 여성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수많은 긍정의 언어로 표현된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각 별자리의 특성을 따로따로 보다가 이 별자리 저 별자리 찾아보다 보면 유사한 언어표현이 반복해서 나와 결국엔 모든 별자리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그런 느낌이 사람에 대한 설명에 더 가까운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12가지의 특성 안에 다양하게 세분화한 설명기준들 중 어떤 시점, 어떤 상태의 '나'를 설명해준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아주 복잡다양하면서도 서로서로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많은 이들이 이상적인 사람의 상태를 상상해왔다. 공자와 맹자에게 그는 '군자'였고, 노자와 장자에게는 '도자'였으며, 플라톤에게는 '철인'이었고, 융에게는 '개성화된 인간'이 그였다. 이들 모두 다 '남성'이 스스로 갈고 닦고 성장했을 때 다다를 수 있는 '상태'였고, 여성은 그 범주 안에 들 수 없는 존재였다면, 주디스 베넷이 제시하는 '모든 별자리를 거쳐 완결된' '우주적 여성'은 어쩌면 여성들 각자가 '내 성장의 도달 지점'으로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상태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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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
지현 외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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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이야기 뿐일까. 세상에는 '그'들이 쓴 글과 책과 '그'들이 그린 그림과 '그'들이 만든 영화와 '그'들이 만든 노래들로 넘쳐난다. 자연스럽게 주위에 널려 있는 그 많은 작품들에 손을 뻗어 읽고 듣고 보며 빠져들다가 어느 사이엔가 마음이 삐걱거리는 시점이 도래하고, 되짚어보면 이야기 속 누구에게도 나를 이입하기가 불편해지는 서사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가부장제가 만연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하는 호기심이 가득한, 이 세상 어디에 자신을 두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싶어지는 여성이라면 특히. 


다른 모든 문화 콘텐츠처럼 옛이야기에도, 오래된 가부장 문화의 속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주인공은 대개가 남성 혹은 남아들, 내용은 그들의 모험담, 등장인물 중 여성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남주인공을 해치거나 돕는 정도의 역할에 머문다. 남주인공을 해치는 역할로, 여성으로'만' 변신하는 '구미호'가 자주 등장한다. 


여성,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면? 무조건 자기 희생이 주제가 된다. 심청이가 그렇고, 콩쥐가 그렇고, 바리데기가 그렇고. 아니면, 너무나 억울한 피해자. 아무 것도 모른 채 운명이 시키는 대로 이리 저리 밀리다 죽음에 이르러 귀신이 되고서도 강자에게 하소연 하는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장화홍련이 그런 이야기의 대표급이 되겠다.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의 저자들은, 살아오면서 겪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오랫동안 의문을 가진 옛이야기에 다른 형식을 부여하고 다른 등장인물을 개입시켜 적어도 여성들이 읽기에 더 마음이 쏠리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길동에게는 그와 견줄 역량이 있는 누이가 있었고, 콩쥐에게 팥쥐 엄마는 실은 누구보다 품이 넓고 단단한 새 엄마였으며, 선녀에게는 자신의 아픈 생을 마음으로 같이 산 딸이 있었다는 설정들.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왜 내게 이 모양 이 꼴로 덤벼드는가, 의문이 들다가, 화가 나다가, 때로 무섭기도 하고, 하지만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이야기가 더 많이 필요하고,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러 방식의 시도 중 하나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옛이야기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어떤 틀 속에, 그 이야기를 토대로 자신의 마음을 집어넣어 새롭게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들과 그 이야기에 호응하는 사람들 덕에 현재까지 내려온 이야기이기도 하니, 어쩌면 더 많은 여성이 더 많은 이야기들을 더 많이 바꾸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에, 백설공주 이야기를 흑설공주 이야기로 바꾸어 책이 나왔을 때 반가웠으나 그런 식의 이야기 바꿈이 그 한 시기로 끝났다는 기억을 갖고 있다. 이번에는, 이 책을 기점으로 우리가 아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더 새로운 방식으로 탈바꿈하여 나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성의 마음에 더욱 기껍게, 세상에 널리 퍼진 오랜 이야기들을 다시 되짚고 깊이 살피고 시원하게 뒤집는 작업을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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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관음의 탄생 - 한국 가부장제와 석굴암 십일면관음
김신명숙 지음 / 이프북스(IFBOOKS)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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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된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 마음에 들어오는 요소들을 골라내어 이리 뒤집어 보고 저리 살피며 요런 식으로 보면 어떨까, 저렇게는 못 보는 걸까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해서, ‘여성 관음의 탄생이란 제목의 책에 흥미를 느꼈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여기 저기를 훑으며 고대에 있었을 여신신앙이 가부장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밀려났다가 가부장적인 힘이 센 종교 중 하나인 불교 안에서 어떻게 통합되어 관음이란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찬찬히 살피는 내용을 따라가는 과정이 그닥, 흥미롭거나 재미 있지가 않았다.

 

읽으면서 내내 왜 그러지? 고대 여신들의 근원을 자료를 들어 확실친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보건대 충분히 이럴 수 있다는 이 얘기가 왜 내게는 얄팍하게 느껴지고 와닿지 않지? 하다가. 아하! 내 이유는 찾을 수 있었는데.

 

저자의 관심사와 내 관심사가 일치한 측면은 있을 수 있는데 그 관심사를 탐색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저자의 궁금증과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확장하려는 흐름이 아니라 이것 봐 미약하지만 여기 증거가 있잖아, 여기에도 있다니까 하며 계속해서 확실치는 않지만, 자료가 많지 않지만, 이라는 수식을 붙이며 사실 확인을 넘어서지는 않는 방식으로 서술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은 내게, 기존의 학문 세계에 자기 주장을 맞춰보려는, 세상에서 여성이 대해지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느꼈다면서, 그러나 이렇게나 오랜 시간 그들의 방식으로 굳어진 틀로 이야기하는, 소위 배운 여성들의 흔하디 흔한, 내가 보기에는 방법 선택의 오류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화와 설화에 잠깐씩 등장하는 여성들의 근원을 찾아내어 오, 이런 할매도 있었구나, 싶은 얘기들에 흥미가 생겼다가도, 어차피 다 추측인 걸 이렇게 근거와 증거에 매일 이유가 있었나, 좀더 풍성하고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는 게 더 신나고 재미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읽는 내내 새록새록 솟아나곤 했다.

 

변산반도 일대에 개양할미라는 이름의 여신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는 것, 이름을 알 수 없는 백제의 거인 여신 이야기가 있다는 것, 신라에도 서술성모란 이름의 여신이 수호신이었을 거라는 추측, 그 옛날에 부족을 이끄는 여성 제사장이 존재했을 가능성, 왕에게 종속된 왕비로만 존재하지는 않았을 알영이라는 여성 등을 거론한 것은 흥미로웠지만, 그들에 대해 피와 살을 더한 상상력을 조금 더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가 스러지곤 했던 것 또한 아쉬운 점 중 하나였다.

 

고대에는 여성의 역할이나 힘이 지금과 같이 허약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당시의 현실이 다양한 여신들을 존재케 했을 것이며, 그때의 그 힘을 오늘에 되살려 보자는 저자의 주장에 대해 그 취지는 동의하면서도 다른 질문이 계속 생겼는데, 저자의 시도에 딴지를 걸려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대서 이것 봐 저것 봐 이럴 수 있다니까, 라고 주장하는 방식은 그의 전제에 동의하는 사람까지도 그게 사실이라서 뭐 어떻다는 거지? 라는 대응을 먼저 하게 하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까닭은 독자인 내가 증거와 팩트가 무엇을 설명하는가, 신화는 신화로서, 지금 여기의 우리가 우리 방식으로 이해하고 내 삶에 적용하면 되는 것인데, 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일 테지만.

 

물론 흔치 않은 자료들을 애써 찾아내어 여신과 관음과 오늘의 여성들의 삶을 엮어보려는 시도 자체는 환영할 일이고, 내 생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노력하는 여성들이 있어야 하기도 하므로 미약하나마 학문적 토대를 쌓는 일에서부터 여성의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읽어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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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2018). 하용가. 이프북스

 

달라진 이야기, 달라진 여성들

2018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설마설마, 아마도 소설이라 조금은 과장한 면이 있겠지, 이미 들려오는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이야기의 현실성을 축소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첫장을 채 읽기도 전에 책장을 덮었을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초반에 그랬듯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 커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보다 외면하고 싶었을 것 같다.


소라넷 폐쇄 이후 사그러들기는커녕 더 악랄하고 가혹해진 다양한 방식의 디지털 성폭력의 실상이 모른 척 할 수 없을 만큼 알려진 지금 이 소설은 인터넷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과 같은 인간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물건 취급하고 사고 파는 대상으로 삼은 다수(일부가 아니다!) 남성들의 실상을 곰곰 들여다보게 만든다. 소설 속 인물이 말하듯, 모른 척 한다고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강남역 사건 이후 자기 삶에서 온갖 방식으로 경험한 부당함과 억울함이 대개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비열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여성들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조차 없는 남성들의 행태를 그냥 피하거나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런 여성들의 활동의 일부를 소설에서는 메두사라는 이름을 붙여 보여준다.


메두사, 머리카락이 뱀으로 된 날개 달린 그리스신화의 그 괴물 말야. 머리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돌로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무시무시한 그 여자 말야. 이 사이트는 이름만큼 무시무시했어. 남자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여자들이 모인 것이거든. 눈치만 안 보는 게 아냐. 남자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공격하기까지 해. 조롱하고 욕하다니, 여자와 남자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권리들은 누구의 것이었어? 남자들의 것이었지. 여자들은 남자라는 존재를 선망하고 복종하고 감정이입하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잖아? 그런데 드디어 남자들을 욕하는 여자들이 나타난 거야. 욕할 수 있는 권리,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걸 혁명이라고 생각해. ‘착한 여자라는 도덕을 벗어던진 거거든.” (261)


엇비슷하게 사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각자의 삶을 산다. 각자의 삶을 사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산다. 개방적이고 발랄한 듯 보이는 많은 여성들이 오래 전부터 많은 여성들이 그래왔듯이 자신이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고, 몸을 함부로 하는 여성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여성들에게 그런 두려움과 공포가 있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여성을 끌어들여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이 쳐넣어버릴 거라고 협박하며 여성을 노예란 이름으로 착취하고 고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모자라고 한심한 이유를 타인에게 떠넘기며,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자들이, 타인, 그것도 자신보다 약한 미성년자나 여성을 자신과 같은 자리로 끌어내는 방식.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온갖 방식의 성폭력의 원인은 여성이 옷을 야하게 입어서도 아니고 남성을 배신해서도 아니고 여성이 나빠서도 아니고 단지 그 일을 버린 자들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라며 비열해서 이미 자기 인생을 내던져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며 걱정을 했었다. 단지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진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면 어떡하지? 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깊은 절망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히도 소설은, 피해자가 경험하는 배신감, 두려움, 고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땅을 파지는 않는다. 어떤 종류의 남성들이 자신의 모자라고 부족한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타인을 사용하여 덮어버리기 급급해하는 동안 스스로를 사랑하는 능력자로서 성장해버린 여성들은 오래된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을 애써 털어내고 서서히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퇴로를 차단당한 짐승의 심정이 이럴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아귀들에게 물어 뜯겨 너덜너덜해진 채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직 죽지 않은 제물이 자신의 목을 따 피를 흘리게 만든 이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157)

 


목격자의 역할

말로 하기 어려운 힘겨운 상황을 겪은 이가 가까이 있을 때 그를 지켜보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고, 이미 너무 개별화하다 못해 파편처럼 흩어진 개인들이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실제로 많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 힘든 상황에 처한 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손을 뻗으면 도움을 줄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 확인이다.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스스로 체화한 공동체의 성관념과 실제 공동체 내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을 우선 비난하는 행태에 짓눌려 제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곤 한다. 또다른 많은 이야기들은 여성들은 어려움이 처해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어야 하며 그 도움의 손은 남성이 내민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진 세상에서 여자 아이들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일으키고 함께 힘을 합쳐 서로를 돕는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지수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동료로서 의식하고 있는 여성이 디지털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당사자보다 먼저 알았을 때, 지수는 고민한다. 고민하는 동안 그냥 조용히 모른 척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지수는 생각의 단계 하나를 스스로 뛰어넘는다. 그리고, 피해자인 동료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지수는 문득,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자신의 세계만을 지키려는 쓸데없는 안간힘이 아닐까 싶었다. 도움을 주고 싶으면 주면 된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으면 그러면 된다. 만약 그 사람이 거절하면 거절당하면 되고, 힘이 되어주고 싶으나 그럴 힘이 없으면 잠시 쪽팔리면 된다.” (125)


소라넷이 폐쇄되고 N번방이 드러난 이후 여전히 무수한 성폭력 사이트들에서 그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인정하지 않은 채(모를 리가 있나!) 같은 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이미 일을 저지른 자들은 공범의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도덕이니 올바른 삶이니 하는 말들은 단지 고리타분한 옛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가볍게 치부해도 괜찮은 분위기. 그 분위기를 끊어내는 역할을, 그들 속의 누군가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위 목격자의 역할. 처음엔 잘 몰랐고 중간에는 모르는 사이에 당연하게 느껴졌던 일에 대해 어, 이건 아닌데 싶었을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용기. 소설 속에는 차마 그 정도의 용기를 내지는 못했으나 이건 아닌데 라는 감각은 가진 남성과 이전에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남성이 각각 등장한다. 그와 같은 이들이, 이미 많은 여성들이 달라진 세상을 좀더 빠르게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듯 하다.


모르는 여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과히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스트레스를 푸는 저렴한 방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었다. 사진 속 여자들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혹은 성적인 연기에 합의한 포르노 배우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딱히 불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181)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 피해자의 자리에 놓일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의 선택일 것이다. 타인의 눈에 더 나아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불편하지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어떻게 하면 좀더 예쁜 모습으로 호감을 살까 고민하기보다 근육을 단련하고 우정을 쌓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 의 모습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작가는 그 말을 더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성은 확실히 멋. . .


“C는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쁜 놈은 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진격했다. 단련된 몸이 주는 자신감과 착한 여자의 도덕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그것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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