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2018). 하용가. 이프북스

 

달라진 이야기, 달라진 여성들

2018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설마설마, 아마도 소설이라 조금은 과장한 면이 있겠지, 이미 들려오는 소문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이야기의 현실성을 축소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첫장을 채 읽기도 전에 책장을 덮었을 수도 있겠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초반에 그랬듯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 커서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보다 외면하고 싶었을 것 같다.


소라넷 폐쇄 이후 사그러들기는커녕 더 악랄하고 가혹해진 다양한 방식의 디지털 성폭력의 실상이 모른 척 할 수 없을 만큼 알려진 지금 이 소설은 인터넷과 현실을 오가며 자신과 같은 인간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물건 취급하고 사고 파는 대상으로 삼은 다수(일부가 아니다!) 남성들의 실상을 곰곰 들여다보게 만든다. 소설 속 인물이 말하듯, 모른 척 한다고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강남역 사건 이후 자기 삶에서 온갖 방식으로 경험한 부당함과 억울함이 대개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비열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여성들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조차 없는 남성들의 행태를 그냥 피하거나 보아 넘기지 않았다. 그런 여성들의 활동의 일부를 소설에서는 메두사라는 이름을 붙여 보여준다.


메두사, 머리카락이 뱀으로 된 날개 달린 그리스신화의 그 괴물 말야. 머리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다 돌로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무시무시한 그 여자 말야. 이 사이트는 이름만큼 무시무시했어. 남자들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여자들이 모인 것이거든. 눈치만 안 보는 게 아냐. 남자들을 조롱하고 욕하고 공격하기까지 해. 조롱하고 욕하다니, 여자와 남자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권리들은 누구의 것이었어? 남자들의 것이었지. 여자들은 남자라는 존재를 선망하고 복종하고 감정이입하는 것밖에 허락되지 않았잖아? 그런데 드디어 남자들을 욕하는 여자들이 나타난 거야. 욕할 수 있는 권리,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걸 혁명이라고 생각해. ‘착한 여자라는 도덕을 벗어던진 거거든.” (261)


엇비슷하게 사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각자의 삶을 산다. 각자의 삶을 사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산다. 개방적이고 발랄한 듯 보이는 많은 여성들이 오래 전부터 많은 여성들이 그래왔듯이 자신이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고, 몸을 함부로 하는 여성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다. 여성들에게 그런 두려움과 공포가 있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여성을 끌어들여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상황이 쳐넣어버릴 거라고 협박하며 여성을 노예란 이름으로 착취하고 고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모자라고 한심한 이유를 타인에게 떠넘기며,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자들이, 타인, 그것도 자신보다 약한 미성년자나 여성을 자신과 같은 자리로 끌어내는 방식.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온갖 방식의 성폭력의 원인은 여성이 옷을 야하게 입어서도 아니고 남성을 배신해서도 아니고 여성이 나빠서도 아니고 단지 그 일을 버린 자들이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라며 비열해서 이미 자기 인생을 내던져버린 자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앞부분을 읽으며 걱정을 했었다. 단지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진하게 보여주는 내용이면 어떡하지? 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깊은 절망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다행히도 소설은, 피해자가 경험하는 배신감, 두려움, 고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땅을 파지는 않는다. 어떤 종류의 남성들이 자신의 모자라고 부족한 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타인을 사용하여 덮어버리기 급급해하는 동안 스스로를 사랑하는 능력자로서 성장해버린 여성들은 오래된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을 애써 털어내고 서서히 다시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퇴로를 차단당한 짐승의 심정이 이럴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 아귀들에게 물어 뜯겨 너덜너덜해진 채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직 죽지 않은 제물이 자신의 목을 따 피를 흘리게 만든 이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이다.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이제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157)

 


목격자의 역할

말로 하기 어려운 힘겨운 상황을 겪은 이가 가까이 있을 때 그를 지켜보는 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느껴진다. 돕고 싶지만 어떻게 도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고, 이미 너무 개별화하다 못해 파편처럼 흩어진 개인들이 개인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실제로 많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 힘든 상황에 처한 이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손을 뻗으면 도움을 줄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 확인이다.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스스로 체화한 공동체의 성관념과 실제 공동체 내에서 이야기하는 여성을 우선 비난하는 행태에 짓눌려 제 삶을 온전히 살아내지 못하곤 한다. 또다른 많은 이야기들은 여성들은 어려움이 처해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어야 하며 그 도움의 손은 남성이 내민다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들만으로 채워진 세상에서 여자 아이들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일으키고 함께 힘을 합쳐 서로를 돕는다는 생각을 하기는 쉽지 않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지수도 그런 상황에 처한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동료로서 의식하고 있는 여성이 디지털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당사자보다 먼저 알았을 때, 지수는 고민한다. 고민하는 동안 그냥 조용히 모른 척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지수는 생각의 단계 하나를 스스로 뛰어넘는다. 그리고, 피해자인 동료와 친구가 된다.

그런데 지수는 문득, 이런 걱정을 하는 것도 자신의 세계만을 지키려는 쓸데없는 안간힘이 아닐까 싶었다. 도움을 주고 싶으면 주면 된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으면 그러면 된다. 만약 그 사람이 거절하면 거절당하면 되고, 힘이 되어주고 싶으나 그럴 힘이 없으면 잠시 쪽팔리면 된다.” (125)


소라넷이 폐쇄되고 N번방이 드러난 이후 여전히 무수한 성폭력 사이트들에서 그 이용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인정하지 않은 채(모를 리가 있나!) 같은 범죄를 계속 저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온다.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이미 일을 저지른 자들은 공범의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도덕이니 올바른 삶이니 하는 말들은 단지 고리타분한 옛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가볍게 치부해도 괜찮은 분위기. 그 분위기를 끊어내는 역할을, 그들 속의 누군가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위 목격자의 역할. 처음엔 잘 몰랐고 중간에는 모르는 사이에 당연하게 느껴졌던 일에 대해 어, 이건 아닌데 싶었을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우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용기. 소설 속에는 차마 그 정도의 용기를 내지는 못했으나 이건 아닌데 라는 감각은 가진 남성과 이전에 저지른 성폭력에 대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명확히 깨닫고 용서를 구하는 남성이 각각 등장한다. 그와 같은 이들이, 이미 많은 여성들이 달라진 세상을 좀더 빠르게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싶은 듯 하다.


모르는 여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과히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건 스트레스를 푸는 저렴한 방법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었다. 사진 속 여자들은 살아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혹은 성적인 연기에 합의한 포르노 배우처럼 여겨지기도 했으니 딱히 불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아니었다.” (181)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든 피해자의 자리에 놓일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의 선택일 것이다. 타인의 눈에 더 나아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고 불편하지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어떻게 하면 좀더 예쁜 모습으로 호감을 살까 고민하기보다 근육을 단련하고 우정을 쌓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여성, 의 모습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작가는 그 말을 더 하고 싶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여성은 확실히 멋. . .


“C는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쁜 놈은 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진격했다. 단련된 몸이 주는 자신감과 착한 여자의 도덕을 벗어던지는 용기가 그것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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