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 때문에
좋은 사람 때문에


내가 걷는 백두대간5
- 이성부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히 쳐다보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가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시집 [지리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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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 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 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 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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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레슨  

- 채희문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떠나 볼 줄도 알아야지

              좀 돌아서 갈 줄도 알아야지
              좀 천천히 갈 줄도 알아야지

              점점 높아지는 하늘
              점점 얕아지는 땅
              그 사이에서 점점 흔들리며 작아지는
              나
              새삼 느껴 볼 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잎, 다시 볼 줄도 알아야지
              싸늘한 바람에 손만 흔들고 서 있는
              나무들도, 다시 볼 줄 알아야지

              좀 멀리 볼 줄도 알아야지
              좀 가까이 볼 줄도 알아야지
              깊은 것도
              얕은 것도
              함께 볼 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가을비
              아침 이슬 같은 빗물로 만나
              한 번쯤 썰렁한 가슴
              젖어 볼 줄도 알아야지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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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원태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내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참으로 따뜻하고 행복합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행복이 TV 드라마나 CF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제 눈동자에서도 행복이 보인답니다.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무의식 중에 눈에 띄는 모든 것에
그 사람의 의미를 갖다 붙이고 무시하고
지나치던 유치한 무엇들에게 예전에 그렇게 생각해서 미안해 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도 좋은 일들만 생길 수가 있는지, 그렇게 늦게 오던 버스도 어느새
내 앞에 와 어서 집에 가 전화를 기다리라는 듯 나를 기다려주고,
함께 보고 느끼라는 듯
감미로운 사랑 얘기를 테마로 한 영화들이 속속 개봉되고,
읽어보고 따라 하라는 듯 좋은
소설이나 시집들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주도,
그렇다고 그렇게 뜸하게도 만나지 않습니다.
매우 적당히 서로에게 다가가도 있는 중입니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손을 잡는 것으로
만족하고,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다음 약속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하여 만나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서로의 왼쪽과 오른쪽 어깨가 똑같이 젖을 정도로 다정하게 하 나의
우산으로 비를 피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그의 생일이 찾아옵니다.
그의 생일날 무슨 선물을 건네줄까 고민하는 내 모습이 참 예뻐 보입니다.
그에 게 어울릴 만한 향의 로션이나 스킨이 무엇일까? 아니면 어떤 색깔이,
난방이 그 에게 어울릴까?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언제나 나를 떠올릴 수 있게 메모와 지갑을 겸할 수 있는
다이어리 수첩을 사줘 볼까?
하며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 내 보습이 그렇게도 행복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으며 내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을 때 문득문득 불안해지고는 합니다.
아닐 겁니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 느낌을 불안하다 따위의 작은 감정의
기복으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심장이 찢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면 안 되는데,
또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버스가 너무 빨리 와 어쩔 수 없이 일찍
들어간 집에서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 전화기만 만지작만지작
쳐다보고 있으면 안 되는데, 감미로운 사랑 얘기를
테마로 한 영화가 개봉될 때마 다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 안 되는데, 읽을 만할 거라고 선물 책 밤새도록 뒤적이며 울고
또 울게 되면 안 되는데. 어쩌면 그래서 그렇게 자주도, 그렇다고 그렇게 뜸하게도
아닌 적당히 만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을 맞추고 싶다가도 손만 잡고
말아버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일 선물 하나 고르는데 몇 날을 고민하는 이번에
또 잘못되더라도 기억 속에 안 남을 선물을 고르려 노력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또 그렇게 되면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또 생기고 말았습니다.  


원태연의 시는 개인적으로 별 좋아않지만, 이병헌의 유일한 앨범[TO ME]의 낭송을 듣고 찾게 된 詩랍니다. 녹음은 약간 다른데 그게 훨~씬 -목소리 포함ㅋㅋ-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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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우리가...

- 원태연

 

 

 

때로는 그대가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으면 합니다
모자랄 것 없는 그대 곁에서
너무도 작아 보이는 나이기에
함부로 내 사람이 되길 원할 수 없었고
너무도 멀리 있는 느낌이 들었기에
한 걸음 다가가려 할 때
두 걸음 망설여야 했습니다

때로는 내가
그대와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사랑의 시간이 지나간 후
친구도 어려운 이성보다는
가끔은 힘들겠지만
그대의 사랑얘기 들어가며
영원히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담 없는 동성이기를 바라곤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수진 인연이었으면 합니다
서로가 잘되는 꼴을 못보고
헐뜯고 싸워가며
재수 없는 날이나 한번 마주치는 인연이었으면
생살 찢어지는 그리움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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