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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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연하지. 이미 살아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제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대개."
"..... 너도 그래?"
그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라니?"
"제대로 산다는 건 좀 어려운 것 같고, 다르게 살아보고는 싶어.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르게."
"음......."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러려면 아무도 너를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할 거야."
"그래,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아무것도 아닌 컨쎕으로 사는 거야."
"아무 것도 나닌 컨쎕?"
그가 되물었다.
"응, 지금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고, 그때부터 그런 컨쎕으로 사는 거지."
- 오늘의 날씨 -34-35쪽

"너희들 나이에 필요한 건 자유가 아니야."
라고 했다.
"그럼 뭔가요?"
내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근데 자유는 아니야."
나는 약간 실망했다.
-오늘의 날씨 -36쪽

"너, 사람 믿지 마라."
컵라면 대여섯 개를 껴안고 나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정도 주지 마."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삶이 모토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생각했다. 그가 나를 조금이라도 믿지 않았다면 내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오늘의 날씨 -41쪽

나는 매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서도 세상은 그 자체가 이미 완전하다는 것을.
-다시, M -44쪽

나는 그들을 대략 세 부류로 구분한다.
일단 고급담배파. 대나무숲 필터의 에쎄 순이나 가장 비싼 에쎄 곹든리프, 클라우드나인 따위의 제법 고가의 담배를 사는 중년남성들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몸을 좀 생각해볼까, 하는 저타르파. 주로 삼십대 초중반의 회사원들이 많다. 담배를 끊지는 못하겠으니 새로 출시된 0.1이나 0.5의 저타르 담배를 피우면서 스스로 위로해보려는 부류이다.
마지막으로 다분히 마초 느낌을 풍기는 고타르파. 말로보 레드나 던힐 라이트 같은 주로 빨간색의 담배를 산다. 이 부류는 딱히 픕연을 망설이지 않으며 본인들의 심신에 대해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나머지는 던힐 프로스트를 피우는 여자들, 한라산과 도라지 따위를 피우는 노인들 정도다.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난해한 담배는 디스다. 디스는 그렇게 많이 팔리는 편은 아니지만 노숙자 아저씨부터 고위급 간부로 보이는 남자, 복학생부터 공사판 아저씨까지, 구입하는 연령대와 직업군이 무척이나 다양하다.
- 흡연의 계절 -72쪽

"........나는 그게 겁이 나."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사는 게 어렵지 않을까봐. 사는 게 쉬어질까봐. 그게 겁나.....식물처럼 아무데도 가지 못할까봐. 너는 정말 괜찮단 말야?"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어."

하지만 사실은 그랬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나는 이미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식물도 가끔은 이곳이 아닌 저곳에 있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식물은 자신이 뿌리내린 땅을 결코 의심하지 못한다. 그게 바로 식물과 동물의 차이점이다. 나는 괜찮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상한 나라의 물고기 -96-97쪽

"근데 도대체 그 녀석은 그때 나한테서 뭘 봤던 걸까? 그리고 지금 와선 왜 그게 보이지 않지? 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데."
"......그냥 간단히 생각해. 선배가 변한 게 아니라 세상이 변한 거라고.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만두었다. 당신이 세상을 원해야 세상도 당신을 원하는 거라고, 그도 이미 알고 있을 그 명확한 진리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자격이 없었다.
- 이상한 나라의 물고기- 103쪽

"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하나가 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행지에서의 인연은, 그곳에 두고 올 것."
그녀는 한 모금을 더 빨았다.
"난, 내가 그냥 이곳을 여행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난 이제껏 모두를, 그냥 여행하듯 만나왔어. 언제든 헤어질 사람, 그런 전제로."
"왜 굳이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가벼우니까."-146-147쪽

"하지만, 그럼 아무 의미가 없잖아."
"어떤 의미?"
"누군가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의미."
그녀는 순간 노인처럼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냥 그걸로 된 거야. 화분의 무게도 즐겁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묵직한 인연은 없어. 추억 같은 건 나프탈렌같이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엔 사라지는 거야. 그냥 한번 엇갈렸단 것만으로도 감사한 거지."
-14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마는 끝났다.

산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배우는 데 그 에너지의 9할을 소진한다. 그리고 나머지 1할로 그 말을 살아낸다--고, 나는 단지 그것만을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이런 상태였다.-152쪽

나는 더 이상 나의 성장에 저항할 힘이 없다. 나는 자라는 데 지쳤다.
- 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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