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난 장소로부터 일생 동안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가? 그리하여 어디쯤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는가? 생텍쥐페리처럼 멀리멀리 비행기를 타고 출격하여 끝내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천재의 붓을 꺾어버리고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이지 않는 머나먼 아프리카의 아비시니아로 떠나 살다가도 끝내 병든 몸으로 고향에 실려와 숨을 거두는 랭보도 있다. 조르주 상드처럼 대부분의 생애 동안 일하며 사랑하며 살아온 고향집 자기 방에서 불과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정원의 느릅나무 밑에 가서 묻히는 사람도 있다. 또 자기가 죽은 후에는 어느 특정한 장소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그 유언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고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다. ‘양지바른 뒷산’에다 묻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도 있고, 대양의 파도가 몰아쳐와서 묘석을 핥는 바닷가에 묻히기를 원하는 샤토브리앙 같은 이도 있다.~~
그러나 생명이 떠나버린 육신을 어디에 묻은들 어떠랴? 더군다나 생전에 위대한 작품을 남긴 예술가의 경우 그의 예술에 비한다면 묘지쯤은 부차적인 관심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140~141쪽
인도 사람들은 확실히 촉감의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으로 만지며 음식을 먹는 그들이 여기서는 발바닥으로 신의 공간을 애무한다. 흰 대리석의 넓은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발바닥을 식힌다.~ ' 저 신들이 부도 주었고 가난도 주었고 공포도 주었고 사랑도 주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랴'하는 표정이 인도인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서려있다. 파리떼같이 달여드는 행상인이나 거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닌 것 같았다. 거리를 어슬렁 거리는 흰 암소도 그런 눈길로 우리는 바라본다. 저들의 신앙심은 지금쯤 발바닥에 서늘하게 고여 있을 것이다.
-311~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