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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
서대숙 지음 / 을유문화사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생각해보면 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 앞의 '파란만장'이란 영광이나 성공의 의미보다는 이 나라가 당해온 굴욕이나 피해의 규모, 상황면에서 유효한 단어이다. 이 나라에 영광스러웠던 과거는 없다. 사실상 내가 적을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국력이 강성했던 때는 과거에서 찾을 필요없이 '현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약 60년쯤 전에 이 나라가 분단만 안 되었더라면 아마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넓은 땅덩어리에 1억 정도의 인구가 사는, 상당히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여름에는 대동강에서 수상스키를 즐기고, 겨울에는 개마파크(?)에서 보드를 타며, 휴가 때는 자가용을 끌고 중국으로 넘어가 만리장성을 보고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는 분단이 되어 버렸다. 그 원흉은 - 국외의 열강들도 있었겠지만 - 시류에 따라 부화뇌동하여 자기의 권력 키우는 데 급급했던 이승만, 김일성 이 두 인간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김일성은 꽤나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었다. 그는 불과 열다섯에 아비를 잃고 열여덟에 항일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잡혀들어갔다. 거기다 스물한 살 때는 모친마저 죽어 그야말로 고아에 밑천 하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항일운동에만 전념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첫 아내 - 김정일을 낳은 - 김정숙도 항일 빨치산 동료라고 하니 그야말로 항일투사의 표본으로서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해방 직전에 소련의 88여단인가에 복무하고 있던 김일성은 38선 이북에 소련이 진주하자 소련의 완벽한 하수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서른넷이었다. 사람이란 게 권력에 맛을 들이면 버릴 줄을 모르는 것이 습성인 것 같다. 김일성도 한번 신세가 펴기 시작하니까 막 나가기 시작했다. 저자는 그 의도를 순수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한국전쟁까지도 벌이고 말았다.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승국들이 해결하지 못한 한반도의 분단을 한반도 사람의 손으로 해결하고 민족의 독립을 성취하려다가 실패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조선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웠던 조선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방법, 즉 무력으로 분열된 민족과 분단된 나라를 통일해 보겠다고 남침을 강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쟁에 그가 충성을 바친 소련은 기대만큼 도와주지 않았고,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분단된 것을 통일하자고 해방된 지 불과 5년만에 피를 나눈 이웃들에게 총을 쏴댄다는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또한 그 놈의 전쟁 때문에 휴전된 지 무려 50년이 지나서도 내가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후 김일성은 북한에 일인 독재 체제를 정립하는 데에 온 정력을 쏟았으며, 그 목표를 아주 완벽하게,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하게 성취하였다.
저자는 이어 주체사상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나는 주체사상의 이름만 들었지 그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고 대충 감을 잡게 되었다. 내가 보았을 때 주체사상은 그 내용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성립 배경이 중요한 것 같다. 저자도 주체사상이 당시에만 유용했던 사상이지 다른 시기, 다른 곳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사상이라고 쓰고 있다.
주체사상의 성립 배경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위 인용문에서 보이듯 소련은 한국전쟁 때 북한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고, 이후에도 갖가지 문제로 북한과 소련은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중국도 모택동의 아들이 전사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심전력으로 도와주긴 했으나 문화혁명인가 할 때 김일성을 비방하는 목소리가 드세졌다. 따라서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국에게 종속되다시피 하는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자립, 자위하는 국가로 북한을 변모시키려 했으며 그것을 공공연히 표방하였다. 그것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주체사상이고, 김일성은 실제로 주체사상을 북한에 완벽하게 적용시켰다. 아무리 군대를 손에 쥐고 호령했다 하지만 2천만 명의 사람들을 거의 완벽하게 리드하였다는 것은 김일성의 리더십이 대단했다는 걸 증명한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봐도 이 정도로 완벽한 사기꾼(?)은 흔치 않을 것이다.
저자는 김정일의 권력 승계와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에 책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다. 김정일은 약 20년 정도의 권력 승계 준비를 하고서 김일성 사후에 매우 안정적으로 권력을 물려받았다.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 일들이라 대부분 아는 내용이거나 지금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었다. 요컨대 이 책은 김대중이랑 김정일이 정상회담하기 2년 전에 씌어진 책이다.
책에 나와 있는 북한의 실상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저자는 이런 시기에 각성하지 않으면 큰일날 수 있다고 김정일을 위협(?)하기도 한다.
「북한의 경제 문제는...철강 생산도 뒤떨어지고, ...도로 공사 문제도...소비품 생산이 뒤떨어지고, 전력공업과 석탄공업도 퇴보하였다. ...이러한 경제는 누구 식의 사회주의 경제라고 하기보다는 파산된 경제이다. 북한은 그 국가의 이름이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이러한 파산된 경제를 경험하면 감자 농사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정부의 지도자를 갈아치우는 혁명을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이런 경제 문제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주민을 세뇌했고, 김정일은 경제 파산으로 인한 국가 붕괴가 오지 않도록 군대를 강화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저자는 책 말미에 나름대로 북한에게 여러 분야에 대한 정책 조언을 하고 있는데, 그 중 남한과의 국교를 맺고 교류를 활성화하라는 이야기는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느껴졌다. 입장을 바꿔서 자기가 김정일이라면 남한이랑 국교 맺고 민간 교류 계속해서 정권을 스스로 붕괴시키겠느냐는 말이다. 배 곯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 사는 모양을 가까이서 보게 된다면 자연히 대규모 월남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김정일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고, 때문에 그 쪽으로는 생각도 안하는 것이다.
남한 사람이 평소에 상당히 접하기 힘든 자료가 북한에 대한 자료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자료는 특히나 그렇다. 이 책은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김일성에 대한 나름 객관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다. 물론 이 책이 남한 사람의 손으로 남한에서 출판된 책인만큼 그 '객관'성도 썩 장담하기 어렵기는 하다. 아무튼 어렸을 적 '김일성'이라고 하면 '일본놈'과 동급의 나쁜 욕으로 알고 자랐던 나로서는 색다른 독서경험이었다.